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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2014 2] <열하일기>의 땅 승덕 피서산장


북경 고궁()에서 승덕(承德피서산장까지 거리는 약 230킬로미터박지원은 백하를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건너 열하(热河)로 갔다지만 경승(京承)고속도로를 달리면 3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가깝다고 자주 가는 게 아니듯 북경에 산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승덕을 찾았다.

 

'선조가 남긴 은덕을 계승한다'는 승덕의 지명은 청나라 옹정(雍正) 11(1733)에 처음 등장한다. 기원전에는 북방민족이 말 달리던 터전이었고 몽골족이 세계를 제패한 이후 '뜨거운 물 줄기'라는 뜻의 지명 하룬가오루(哈倫告盧)를 그대로 청나라가 열하로 번역했다승덕은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시기 열하 성의 수도였다가 신중국 수립 후 1955년 열하 성이 폐쇄되자 하북성으로 귀속됐다이렇게 몽골족과 만주족의 아름다운 이름이 사라졌다.


여정문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피서산장은 황제의 행궁이다강희제부터 건축해 건륭제가 대대적으로 확장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89년이나 걸렸다이화원의 두 배에 이르는 564만 제곱미터의 넓이에 궁전뿐 아니라 호반이 있는 정원농사와 사냥터인 평원으로 나누어져 있다.

 

피서산장의 입구는 '아름다운 정문여정문(麗正門)이다건륭제가 하사한 편액으로 만주어한족어몽골어티베트어위구르어 등 5개 민족어로 나란히 새겨 있다정문을 넘어 넓은 마당을 지나면 북경 고궁과 같은 이름의 오문(午門)이 나타난다.

 

오문을 지나 관리 및 소수민족 사절을 검색하고 친견하는 열사문(閱射門)이 나온다문 위에는 강희제 친필의 도금 동판 '피서산장(避暑山莊)' 편액이 걸려 있다. 4면을 용 문양으로 새겨 놓았으니 황제가 아니라면 감히 사용하기 어려운 편액이다그런데 자세히 보면 '()'자가 좀 이상하다예민한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는데 '신라면' 매울 신()에 한 획이 더 그어져 있다. 황제가 직접 쓴 글자인데 잘못 썼더라도 다시 쓰면 될 일이고 강희제는 고문과 지식이 해박해 실수도 아니었을 것이다더위를 피하기 위해서이지 피난이란 뜻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는 의지였다는 해석도 있다.


궁문


피서산장 편액의 '피'


이백이 감동이 지나쳐 대동 현공사나 무한 황학루에 장관(壯觀)이란 글자에 점 하나를 더 찍은 것처럼 발랄한 성격도 아니었을 듯하다청나라시대까지 고대한자에서는 ''자에 두 글자 모두 범례로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로 보인다. 4면을 용 문양을 두른 것도 흔하지 않은 편액이다.

 

궁문을 지나면 정궁이다강희제가 처음 세웠고 건륭제 때 운남귀주절강 등지에서 19만 명이 동원돼 운반해 온 녹나무(楠木 또는 樟樹)를 기반으로 재건했다녹나무는 지름이 2미터높이가 20미터에 이르며 방충 역할도 해 고급 건축물에 많이 사용한다 7칸 남목전(楠木殿) 대리석바닥 위에 옥좌가 놓여 있고 주위는 황제를 상징하는 선학(仙鹤), 향정(香鼎), 여의(如意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담박경성전


정면 위에 담박경성(澹泊敬誠)이라 써 있는 편액이 걸려 있다직역해보면 '욕심 없이 마음이 깨끗하고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강희제의 친필 하사 편액으로 고전으로부터 인용했다. <역경(易經)>에 나오는 '평상심을 가지라'는 담박은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때 한 대학교 강연 중 읊은 말이기도 하다말이 꼬여 '담백'이라고 말했다가 얼른 '담박'이라 주워담았다. '담백'처럼 쉬운 말이 아닌데 굳이 '마음이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라고 하던데 '욕심을 부리지 않는 마음이어야 뜻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쉽게 풀어 말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진취적 기상을 젊은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제갈량이 <계자서>에서 밝힌 '비담박무이명지(非澹泊無以明志)'이 그 출처다.

 

담박경성 아래에는 나무 병풍이 하나 있는데 무려 163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농가경직장락도(農家耕織長樂圖)가 있다생생한 모습으로 농사와 직조를 하는 모습이 황궁 안에 있는 것이 독특하다.

 

정궁 뒤는 정무를 본 후 탈의하거나 소수민족 대표와 사절단 환담하고 신하를 접견하는 사지서옥(四知書屋)이 있다황제가 꼭 지켜야 할 원칙으로 삼기 위해 군자의 덕목 4가지를 강조했다. <역경> '계사하(繫辭下)' '군자는 4가지를 알면 만백성이 우러른다.(君子知微知彰知柔知剛萬夫之望)'고 언급하고 있다.


사지서옥


(), (), (), ()을 직역하지 말고 중국 최초의 한자 사전으로 평가 받는 <설문(說文)>의 해석에 따르면 '감추어야 할 일(隐行)' '드러내 밝힐 일(文彰)', '옳고 그름(曲直)''단호한 결단(彊斷)'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원래 강희제는 '맑고 넓은 마음으로 통치하라'는 의청광(依清旷)이라 불렀는데 건륭제에 이르러 사지서옥으로 바꿔 불렀다. 4가지를 싹수 없는 사람을 통속적으로 말하듯, '싸가지없는 지도자에게 말해주고 싶은 경구(警句)이기도 하고 고전을 인용한 작명이 부럽기도 하다.


연파치상


연파치상 서난각


자희거가

 

사지서옥 뒤쪽은 침궁 연파치상(煙波致爽)이다. '온 사방이 수려하고 넓은 호반이 있어 상쾌하니기분이 좋다고 한 강희제의 말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너비 7깊이 3칸 크기의 침궁 안에 거실과 난각(暖閣), 불당이 있다태평천국의 난과 영국, 프랑스러시아 등 외국 열강에 시달리던 함풍제는 1860년 바로 이곳 서쪽 난각에서 붕어했다


내우외환과 황제 사망권력승계로 혼란한 와중에 27살의 의귀비(懿貴妃서태후)는 공친왕 혁흔과 짜고 신유정변(1861)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서소(西所)는 당시 서태후가 기거하던 장소로 자희거가(慈禧居家)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운산성지

 

뒷문으로 나가는 곳에 운산성지(云山胜地누각이 있는데 1층은 황제가 공연을 보던 무대이고 불교를 숭상했던 만주족답게 2층에는 불당이 있다마당은 중국 정원양식을 따라 가산(假山)이 만들어져 있고 누각 뒤 수운문(岫雲門)을 빠져나오면 바로 넓은 호반과 평원으로 연결된다궁전은 피서산장의 극히 일부분이다대부분은 호반과 평원과 산으로 이뤄져 있다.


호반지역 입구


호반지역


호반지역

 

호반에는 수많은 건물과 다리가 연결돼 있다항주(杭州) 서호에 있는 백제(백거이가 만든 제방)와 소제(소동파가 만든 제방)를 모방해 만든 다리 지경운제(芝徑雲堤) '()'자 모양으로 강희제가 명명했다서호처럼 제방을 쌓자 나누어진 호반마다 제각각 호수 이름을 지었다은호(銀湖)와 경호(鏡湖)가 있고 다리 하나가 상호(上湖)와 하호(下湖)를 갈라놓았으며 징호(澄湖)와 여의호(如意湖)라는 이름도 있다여희호 속 작은 섬 여의주(如意洲)가 있는데 여의는 불교 설법 도구이자 신하가 황제에게 보고할 때 들고 있곤 한다섬과 제방을 이어보면 위가 둥글고 길게 휘어진 모양새가 여의와 닮아 보인다.

 

여의주에는 호반을 바라보며 연꽃을 관람하던 관련소(觀蓮所) 창랑서(滄浪嶼)도 있다창랑서는 정원으로 아름다운 도시 소주(蘇州)에 있는 창랑정(滄浪亭)을 본떠 만들었다고 전한다북송시대 문인 소순흠(蘇舜欽)이 낙향해 지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정원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이다무서청량(無暑清涼), 금연영일(金蓮映日), 수방암수(水芳岩壽), 연훈산관(延薰山館), 일편운(一片云)등 이름도 호반과 잘 어울리는 건물이 즐비하다. 2층 누각 연우루(煙雨樓)는 드라마 <황제의 딸(還珠格格)> 촬영한 곳으로 유명하다.


맞은 편 징호 호반 금산도(金山岛)에는3층 목탑과 함께 옥황상제와 진무대제에게 제사를 지내던 상제각(上帝閣)이있다명나라 영락제가 반란으로 차지한 황제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 도교의 신으로 우상화했는데 바로 진무대제이자 진무사상이다금산도는 강소성 진강(镇江)에 있는 행궁이자 사원인 금산사(金山寺)를 본떠 지은 것이다.


어과포


어과포 내부


호반 주변 정자


문진각 가산


문진각

 

피서산장 평원에는 어과포(御瓜圃)나 보전총월(甫田丛樾등 벼농사를 짓던 논이나 과일, 채소를 재배하던 곳도 있다호수를 따라 곳곳에 수많은 건물이나 농토가 연이어 있다호반 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북쪽으로 걸어가면 숲 속에 아담한 건물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바로 국가도서관 북사각 중 하나인 문진각(文津閣)이다.

 

건륭제는 중국 문헌 총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한 후 영파(宁波)에 있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설도서관 천일각(天一閣)의 구조를 따라서 국가도서관을 만들어 보관했다. <사고전서>를 만든 건륭제는 화재 등에 인해 손실될 것을 우려해 국가도서관 7곳에 복사본을 만들어 각각 보관했다세월이 흘러 각 <사고전서>도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문진각에 보관됐던 복사본은 민국 초기북경으로 옮겨져 현재 중국국가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문진각을 들어서면 돌로 쌓은 가산이 막고 있고 뒤로 작은 연못이 있다연못 뒤쪽으로 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2층이고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암층이 하나 있어 모두 3층 구조이다.


영우사


문진각을 벗어나면 넓은 벌판에 몽고바오(蒙古包수십 채가 있다피서산장에서도 돈을 벌겠다는 노력이 멈출 리가 없다풀이 빽빽하게 자란 만수원(万树园)과 몽고바오 뒤쪽으로 높이 솟은 탑이 보인다. 건륭제가 세운 영우사(永佑寺)  9층 사리탑이다피서산장에서 가장 큰 건물로 본전과 어용루(御容楼)는 사라지고 터만 남았고 석비와 탑만 남아있다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의 화상을 어용루에 걸어놓고 피서산장에 올 때마다 가장 먼저 영우사에 들러 제배(祭拜)했다.

 

세계문화유산이라 입장료는 120위안( 2만원)으로 꽤 비싼 편이다박지원이 다녀간 열하의 땅에 있는 피서산장의 궁전에 담긴 역사 흔적과 호반의 풍광을 거닐고 문진각과 영우사까지 둘러봤다박지원이 왔던 땅, <열하일기>를 생각하며...


피서산장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