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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3] 진승과 오광의 대규모 기층 민란 ②


▲  진승 민란군은 수도로 진격했으나 려산의 죄수까지 동원한 진의 마지막 장수 장한 부대와 싸워 패퇴했다. 려산은 한나라를 건국한 후 수도로 정한 장안(지금의 서안)에 있는 진시황 능원과 병마용 뒷산이다. 병마용은 지금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 최종명


왕을 자처하고 망우초 죽을 먹다


진승과 오광이 봉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가담항설(街談巷說)'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거리나 마을마다 번져 말(言)은 말(馬)보다 빨랐다. 진나라에게 핍박 받던 식민지 땅 중원에 회오리 바람이 불었고 초나라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의 불길로 번지기 시작했다. 


전국시대 6국의 열혈 귀족은 농민군을 규합해 떨쳐 일어났으며 진승의 봉기군과 연합해 점점 세력이 늘어났다. 지금의 하남 진현(陳縣, 회양淮陽)을 점령하자 군중들은 진승이 초나라 사직을 복구한 공을 인정해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요청했다. 


진승은 때 맞춰 합류한 장이(張耳)와 진여(陳餘)에게 의견을 물었다. 장이와 진여는 '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며 지금은 서둘러 군대를 서쪽으로 진격해 진나라를 제압한 후 먼저 6국을 재건하고 수도 함양(咸陽)을 기반으로 제후를 파견하고 천하를 호령해도 늦지 않을 것이며 지금 독자적으로 왕이 된다면 천하가 분열될지 모른다고 충언했다. 하지만 진승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서둘러 왕을 자처했다. 전국시대의 각 나라 왕족의 후손을 복위해 연합하자는 장이와 진여의 전략과 상충했다. 


<사기> 등 역사서에서는 진승이 세운 나라를 '장초(張楚)'라고 기록했다. 역사 기록물에 따르면 실제 당시 사용하던 국호 또는 깃발과는 다르게 기재한다. 동서남북과 같은 방위를 붙인다거나 나라의 복원을 뜻하는 후(後)를 앞머리에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초나라를 널리 확대한다'는 장대(張大)의 뜻으로 기록한 사마천 때문에 역사에서 그다지 흔하지 않은 장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고구려를 고대의 지방 정권이라 부르는 역사 왜곡 마인드까지 겹쳐져 진승 왕은 장초 정권의 우두머리로 전락하고 있다. 


진승은 민란을 일으키기 전 쌀 한 톨 없이 가난한 시절이 있었는데 아사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한 농사꾼 집에 들렀다가 할머니와 딸이 봄 나물을 넣고 끓여준 쌀죽을 대접 받은 적이 있다. 너무도 맛있게 먹고 기운을 차린 진승은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는데 왕을 자처한 이후 갑자기 그 모녀가 생각나서 애써 찾았다. 궁으로 초청한 후 다시 그 때의 죽을 먹고 싶었던 진승에게 모녀는 예전처럼 백합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훤초(萱草)를 넣고 죽을 끓여 올렸다. 죽을 먹은 진승은 쓰기만 할 뿐 그다지 맛이 없다고 실망했다. 


노파는 "배가 고플 때는 향기로웠지만 산해진미를 즐기게 되면 쓴맛만 느끼게 된다고 해서 망우초(忘憂草)라 합니다" 고 아뢰니 진승은 부끄러워했다. 창피를 당한 진승은 망우초 대신에 황화채(黄花菜)라 부르라고 했다. 이 풀은 민간에서는 우울한 기운을 싹 가시게 해 준다는 산나물이자 한약재로도 쓰이는 원추리를 말한다. 힘든 시절의 근심을 망각한다는 풀을 등장시켜 진승과 연관된 이야기를 지어냈던 것은 민란의 실패를 아쉬워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승의 봉기가 성공해 가난한 사람들의 꿈을 지켜줄 것을 기대한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고사일 듯하다.


진승은 장이와 진여의 전략을 무시한 채 곧바로 군대를 셋으로 나눠 전국을 한꺼번에 장악할 태세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 왕권을 대신하지만 후계 승계는 할 수 없는 가왕(假王)이 된 오광에게는 하남 성도인 정주 서쪽 곡창지대인 형양(滎陽)을 공략하도록 했으며 무신(武臣)을 대장으로 임명한 후 장이와 진여와 함께 북쪽 조나라 영토로 진군시켰다. 주시(周市)에게는 위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며 얼마 후에는 등종(鄧宗)과 합세해 남방 진출을 촉구했다. 사방으로 봉기군의 위세를 떨치며 옛 전국 시대의 나라를 복구하기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부전부승(屢戰屢勝)으로 진나라 군대를 섬멸하고 형양에 당도한 오광은 뜻밖에도 승상 이사의 장남인 이유(李由)가 이끄는 군대의 완강한 저항에 가로막혀 한치 앞도 진군할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진승은 전국에서 봉기에 호응한 대규모 군대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선무라 여겼던 형양이 지지부진하자 주문(周文)에게 장군 인장(印章)을 내리고 급히 형양 남쪽으로 우회해 함곡관(函谷關)을 돌파해 수도 함양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문은 전국 시대 초나라 영웅 항연 부대에서 점복사(占卜師)로 근무했으며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로 신망이 두텁던 초나라 재상 춘신군(春申君) 황헐(黄歇) 문하에서 자칭 병법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진승의 부름을 받아 장군이 된 후 사병을 모집해 수 십만의 군사와 천 량에 이르는 마차를 이끌고 질풍노도로 함곡관을 돌파해 지금의 병마용이 있는 서안 동쪽 임동(臨潼) 부근 희정(戲亭)에 진을 치고 진나라 최후의 대장군으로 유명한 맹장 장한(章邯)의 대부대와 맞섰다. 


장한은 려산(驪山) 일대에서 황릉 공사를 담당하던 노예와 죄수 20만을 동원해 상비군과 함께 전투에 나섰는데 주문의 부대는 패전을 거듭해 관중(關中)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주문은 연이어 장한 군대에 쫓기어 낙양 서쪽 면지(渑池)에 이르러 더 이상 가망이 없자 자결했다. 


한편, 부장 전장(田臧)과 이귀(李歸)와 함께 형양을 공략하던 오광은 장한의 군대가 주문 군대를 물리치고 진격해오자 진퇴양난이었다. 하루 빨리 형양을 함락하자는 오광의 전술에 대해 전장은 장한 군대와 전면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전장은 돌연 오광을 살해하고 '오광이 군권을 통솔하지 못하고 자만에 빠져있어 불가피하게 도모했다'는 상소를 올렸다. 


전시 상황은 긴박했으며 진승은 반란 동지의 죽음을 한탄한 겨를도 없었다. 승상으로 임명된 전장은 군 통수권을 부여 받자 이귀에게 형양의 준동을 통제하게 한 후 전군을 동원해 의기양양하게 장한 군대에 맞섰다. 하지만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의 지략에 밀려 패퇴하고 살해 당하고 말았다. 진승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장한에 맞섰지만 이미 주력부대들을 잃은 상태에서 역부족이었다. 


진승은 민란을 일으킨 대택향에서 불과 100km 떨어진 하성부(下城父, 안휘 과양渦陽)로 후퇴한 후 후일을 도모하며 부대를 다시 모으던 중 자신의 수레를 몰던 부하 장고(莊賈)에 의해 살해 당했다. 장고는 장한이 벌린 이간질의 유혹에 빠져 주군을 사살하는 천추의 죄를 짓게 됐다. '배신'은 민란의 역사에도 비일비재한데 '도원결의'처럼 의리와 충성을 계속 관리하는 지도자의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승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진승 사후 부하장수 여신(呂臣)이 초나라 수도 진현을 회복하고 장고를 죽여 복수했지만 진승과 오광이 일으킨 민란은 뜻하지 않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유방에게 '나라'라는 말 바꾸는 것도 '식은 죽 먹기'


▲  역사의 고도 서안의 종루가 보이는 광장 ⓒ 최종명


2014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말인 지록위마(指鹿爲馬). 조고가 사슴을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이라고 하자 황제 호해가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가?'하고 읊조린 말이다. 조고의 위세에 겁을 집어먹은 신하들이 모두 동조해 '말'이라는 말로 아부한다. 정통성을 갖지 못한 황제 호해는 조고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고 조고는 황제를 손바닥에 놓고 정치를 농간한다. 


조고는 다시 호해를 폐위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3번째 황제로 만들고자 했다. 곧이어 조고는 진승 오광의 봉기군이 함양을 향해 진격하자 진 황실을 모두 도륙하려는 술책을 은밀하게 감추고 있었다. 아버지 부소의 억울한 자살을 알고 있던 자영은 조고의 의도를 눈치채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물러나는 고육책을 세워 유인한 후 조고를 살해했으며 삼족을 멸해 아버지에 대한 복수에 성공했다. 하지만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니 그도 항우의 칼날에 짓밟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진승 오광의 민란이 일어나자 일약 풍운아로 등장한 두 사람이 있었다. 장이와 유방(劉邦)은 민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역사에 단 한 자도 기록될 리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남고 말았을 것이다. 혼란의 시기에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처세에 능통한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게 마련이다. 게다가 일생 일대의 행운을 직감하고 제대로 낚아채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적 삶이 필요하다.


장이는 위나라 태생으로 빈곤했을 뿐 아니라 죄를 짓고 타향살이를 하던 시절에 행운을 걸머지게 됐다. 무능하고 평범한 남편에 실망한 부자 집 딸이 집으로 돌아온 상태에서 아버지 지인으로부터 소개 받은 장이를 보자 단숨에 이혼해버렸다. 장이는 부자 집 사위로 들어앉아 전국의 빈객들을 불러모아 교우 관계를 넓혔다. 지역 유지이자 명사로 전국에 유명해진 덕분에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던 유방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진나라에 멸망 당한 후 장이는 위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현상금까지 걸린 죄인으로 전락했다. 진현으로 도피한 후 문지기로 위장한 후 살아가고 있었는데 바로 이곳은 진승 오광의 봉기군 거점이었다. 전국에 체포령이 내려진 죄인에게는 인생을 전환할 절호의 기회가 바로 코 앞에 찾아온 것이다. 진승은 일찍이 전국에 유명세를 떨친 장이가 몸을 의탁하자 크게 기뻐했다. 


장이는 진승의 책사로 임명되자마자 하북 성 일대 조나라 땅 평정을 자원하겠다는 건의를 올렸다. 장이는 왕을 칭하려는 진승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국 각 제후의 후예들과 연합하자는 전략을 제시한바 있다. 진승은 결국 오랜 친구였던 무신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소요(邵騷)를 도위로 삼았으며 충성심이 검증되지 않은 장이와 진여를 교위로 삼아 함께 조나라 땅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무신이 인솔하는 3천여 명의 부대는 승승장구해 조나라 영토를 삽시간에 장악했다. 장이는 무신에게 조나라 왕이 되라고 권유했고 이어 연나라에 파견된 한광(韓廣)도 왕을 칭하는 등 너도나도 왕을 자칭했다. 진승을 비롯해 혼란기에 왕이 된 자는 치열한 전투와 내분으로 인해 모두 요절했다. 장이는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고 왕을 보필하는 위치를 견지하고 때를 기다렸다가 유방과의 친분으로 사돈을 맺고 한나라가 선포된 후 제후국의 왕으로서 장수했다. 


유방 역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조그만 마을 사수(泗水)의 촌장이었는데 호송 중이던 포로를 석방한 대역죄를 짓고 망탕산(芒砀山)에서 산적이나 하면서 평생을 살았을 운명이었다. 두주불사이던 술꾼 유방이 산천의 초목이나 뜯으며 산골 대장 노릇에 갑갑해 하던 유방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농민 출신의 진승과 오광이 민란을 일으키자 천하가 혼란에 빠진 것이다. 혼란을 등에 업고 천하를 움켜졌으니 진승과 오광은 유방에게는 하늘에 내린 선물이나 다름 없었다.


나라를 건국한 후 유방의 어머니가 용꿈을 꿨으며 코가 오뚝하고 얼굴빛이 화사한 용모를 용안이라 과장하고 외상 술 즐겨 마시는 것조차 탁월한 능력으로 비화시켰다. 유방이 술을 마시고 누워 자면 용이 자는 모습으로 변모시킨 이야기는 진부한 신화 공작이다. 유방이 연회에 참여하면서 축하금으로 일만 양의 돈을 써냈다는 호방한 성격이 사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지만 후일 여태후(呂太后)가 된 여치(呂雉)의 아버지가 한눈에 유방의 용안을 알아보고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넘고, 게다가 이미 아들까지 있거늘 애지중지 키운 자기 딸을 줬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심지어는 지나던 과객이 여치와 유방, 아이들까지 관상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도 황제가 된 이후 충분히 창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버젓이 <사기> 와 <한서>에 기록돼 있는 것이다. 


건국 신화는 멈추지 않는다. 포로를 석방한 후 유방의 의리에 동조해 산적이 되기로 한 무리가 망탕산에 이르자 뱀이 앞길을 막으니 모두가 두려워 길을 돌아가자고 했다. 이때 유방은 '사나이 가는 길에 두려울 게 뭐냐'고 소리치며 칼로 뱀을 베버렸다. 그래서 죄를 짓고 유방을 따르는 무리들이 일으킨 행위를 '참사(斬蛇) 봉기'라고 부르며 현장을 보존했다. 


지금도 하남 영성(永城)에 있는 망탕산에는 후대의 황제들이 참사비(斬蛇碑)를 세워 놓고 기념했으니, 승리한 역사에게는 영웅담도 적지 않다. 참사비가 있는 망탕산은 진승이 사망한 장소와 가까워 유방이 나라를 세운 후 묘역을 조성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기회가 오자 행운도 뒤따랐다. <초한지>를 본 사람들은 숙하와 조참이 유방을 '혁명군' 수령으로 옹립했다고 생각한다. 아직 진나라의 위세가 여전한 상태에서 농민 반란군이 몰려오고 있었기에 지위가 높았던 그들이 굳이 유방을 끌어들인 것은 행운이었음에 분명하다. '반란'의 주모자는 100% 사형이므로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죽을 목숨인 유방을 찾아가 대장으로 호출한 것도 매우 현실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유방은 왕을 자처하지도 그렇다고 왕을 옹립하지도 않고 항우의 숙부 항량 등 소위 잘 나가는 집단에 의탁해 힘을 기르는 현명한 지략을 발휘했다. 3년 동안의 반진 투쟁, 4년의 초한전쟁을 거쳐 불과 7년 만에 평민에서 황제가 됐으니 '기적'의 영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하지만 황제가 된 유방은 능력과 기회만 되면 누구라도 황제를 호시탐탐 노릴 수 있게 된 '상황'을 '신화'로 덮어버릴 필요가 생겼다. 진나라 이전의 사서에 나오는 나라는 곧 방(邦)이었으나, 한나라 황제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모두 국(國)으로 바꾸는 일은 '식은 죽 먹기' 였다. 


감생설(感生說)을 적용해 삼황오제처럼 황제의 상징인 용 태몽을 창조하고 찬란한 빛이 온 몸에 퍼지고 얼굴에는 용의 관상이 돋보이도록 해야 했다. 사마천은 각고의 고난 속에서도 역사 기록을 남겼다는 명분을 등에 업고 '거짓'을 '참'으로 치환한 유방 우상화 자료를 참고해 유방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를 미화하고 패자를 추화하는 파노라마처럼 흘러왔다. 


민란 연재한다니 "중국 가기 힘들겠다"는 염려


▲ 춘추전국시대 이래 조나라 왕성 유적지가 하남 성 한단에 조성돼 있다. 진승과 오광의 민란에 등장하는 장이와 진여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 최종명


1975년 11월, 호북 효감(孝感) 시 운몽(雲夢) 현 일대에서 대량의 진나라 죽간이 출토됐다. 상당수의 법률 조문 중에 노역에 관한 요율(徭律)도 세상에 알려지자 '사마천이 우리 모두를 속였다'는 성토가 빗발쳤다. 비록 진나라 법령이 엄하긴 했어도 <사기>가 언급한 '정해진 시일 내에 당도하지 못하면 모두 죽게 된다.'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폭우나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할 경우 징발을 면제한다는 기록도 있어서 사마천의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던 것이다.


<사기>의 내용 중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진승과 오광은 모두 하남 성 사람인데 북쪽 어양으로 진군 방향을 잡지 않고 왜 동남쪽 400킬로미터나 떨어진 태택향에서 민란을 일으켰는가 하는 의심이다. 900명이나 되는 농민들이 한결같이 '참수 당할 것이다.'는 말을 믿었다는 것과 물고기 배속의 신화, 부소와 항연을 거론하는 것도 아무리 농민들이 무지몽매했다고 치더라도 이상하고 '신비한' 기록이긴 하다.


아마도 <사기>는 '유방의 나라'를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사료를 근거로 집필한 사마천의 '기자 정신'에 다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왕후장상'을 명분으로 삼은 것도 평민 유방을 동일시한 냄새도 난다. 그럼에도 중국 역사상 가장 멋진 농민혁명 '소설' <사기>의 '진섭세가'는 읽을만하다. 


진승과 오광이 인간해방을 부르짖던 섭고대(涉故台)의 함성이 여전히 외치고 있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했다지만 사람들이 일부러 찾을 만큼 열광적인 곳도 아닌데다가 교통도 불편한 '기초 단체'나 마찬가지다. 중국 사람들도 교과서에서 진승과 오광을 배워 익숙하지만 대택향이 도대체 어딘지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안휘 성 북부의 한 작은 농촌 서사파(西寺坡) 진으로 오랫동안 불려 왔던 곳이 바로 민란의 발원지 대택향이다. 


2014년 2월 11일 서사파 진이 민정청(民政㕔) 비준을 받아 대택향 진으로 이름을 바꿨다. 마을 이름 바꾸는 일이 우리처럼 주민 투표를 할 정도로 사회적 이슈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꽤 진지한 사안이다. 얼핏 생각해보면 농민 반란의 상징을 마을 이름으로 하는 것이 '상당한 우려'나 '정치적 고려'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중국 지역언론 보도에 따르면 동년 4월 23일 마을 이름을 변경하는 행사에서 지역의 서기 손용(孫勇)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아우성처럼 속전속결 승리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사상, 개척정신으로 무장해 경제개발에 분투하자"고 치사를 했다. 기사는 이어 '역사에 대한 존중', '전통으로의 회귀', '문화적 전승과 민의의 순응'과 더불어 '대택향 마을 발전의 새로운 동력과 보다 커다란 활력'을 위해 이름을 변경했다는 취지를 덧붙였다. 


현대 중국의 작은 마을이 역사 속 민란을 기억에서 지우지 않고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부럽다. '민란'을 연재한다고 하니 "앞으로 중국 가기는 힘들겠다"고 한 지인들에게 꼭 대택향 마을에 같이 가보자고 할 생각이다. 2천 년 세월이 훨씬 지났건만 진승과 오광의 외침이 멈추지 않고 있다. 


▲  고대에는 대나무 죽간에 역사를 기록했다. 1975년 운몽 현에서 출토된 진나라 죽간에 기록된 '노역에 관한 요율'을 통해 사마천의 <사기>가 상당 부분 '사기'임에 드러났다. 사진은 안휘 성 홍촌 마을 시장에서 찍은 죽간 상품.ⓒ 최종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