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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5] 녹림과 적미, 농민의 야망이 되다 ②


▲  적미군의 초기 근거지 태산 정상 부근의 석벽 조각. '노신판화상'을 수상한 유명 서예가 라이샤오지(赖少其)의 작품. 약간의 의역을 붙이면 "태양이 환하게 나타나니, 산들이 모두 동요하네. 검을 빼들고 미친 듯 노래하니, 뜻을 세워 크게 나아가리."는 의미이니 참으로 '민란' 정서와 맞다. ⓒ 최종명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신나라의 '법령은 괴로울 정도로 가혹했고, 백성들은 온갖 금지령에 손사래를 쳤으며, 생계를 잇기조차 힘들었다. 노역도 몹시도 고달픈 지경이었으며 논에는 메뚜기조차 가물었으니 부자나 빈자 모두 다를 바 없어 구분조차 힘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왕망이 통치하던 서기 14년, 낭야(琅琊) 군 해곡(海曲, 일조日照) 현성에서 허드렛일을 맡아 하던 청년 여육(呂育)은 강직한 성품으로 평소 가렴주구(苛斂誅求)가 못마땅했다. 어느 날 농민의 세금을 강제로 징수해 오라는 현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노발대발한 현령은 납세를 거부하고 폭동을 저지른 농민들과 공모했다는 죄를 물어 여육을 살해했다.


엄마(여모呂母라 부름)는 아들이 원통하게 죽자 고통에 못 이겨 함께 죽으려고도 했다. 비통한 마음을 가슴에 새긴 채 경솔하게 화풀이조차 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지역 유지였던 여모는 전 재산을 풀어 조용히 비밀 조직을 결사하는 한편, 빈궁한 농민을 위한 구제에도 힘을 쏟았다. 술집을 개업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외상 술도 서슴없이 베풀고 생활이 곤란한 사람에게는 옷이나 양식도 건네주며 인심을 얻었다. 수소문을 해 칼과 검을 수시로 구입해 보관했다. 


사람들이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면 그저 하천 토사를 마을 뒷산인 규산(奎山) 위로 날라달라고 했다. 쌓인 흙으로 축대를 건설했는데 여모는 민란을 일으키고 방어벽인 점장대(点将台)로 활용했다. 새로 생긴 얕은 산을 여모고(呂母崮)라 불렀다. 여모는 가산이 대부분 탕진되자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 추석에 모두 모였다. 여모를 위해 옷이나 재물을 모아 보상하려 했으나 사양하며 슬피 울며 말했다.


"그 동안 여러 번 여러분을 도왔지만 이익을 바라고 한 게 아닙니다. 억울하게 죽은 내 아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보수설한(报仇雪恨)', 얼어버린 심장에 박힌 철전지 원수를 갚고 원한을 풀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용사들이시여. '일비지력(一臂之力)',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태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가슴에 사무치는 원한을 얼음 같다고 표현했는데 폭정에 분노하고 있던 농민들에게 기름을 붓는 하소연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과 아홉 구를 합친 '수(仇)'자의 원래 뜻은 백년해로하는 반려자였는데 중국어의 반어적인 훈(訓)으로 바뀌었다. <사기>의 '진세가(晋世家)'와 <설문>에 따르면 곧 원수를 말한다. '보수설한'은 서한 황족 회남왕이 쓴 통치총서 <회남자(淮南子)>에 기록돼 있으며 춘추 시대 월왕 구천(勾践)을 언급하면서 등장하는 말이다. 


범려(范蠡)의 계책에 따라 4대 미인 서시(西施)를 미인계로 오왕 부차(夫差)에게 보내 복수를 설계한다. 부차가 서시와 정신없이 즐기는 사이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을 겪으며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여모 역시 구천의 심정으로 농민들에게 가슴 속 '설한'을 풀어달라고 단 네 글자로 응축된 호소가 절절하게 전해지고 있다.


모두 힘껏 도와 여모 아들의 원수를 갚고자 이구동성으로 동조했다. 여모는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재빨리 수백 명의 대오를 모아 여모고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출귀몰하게 공격 준비를 도모하면서 동시에 납세거부 운동을 벌였다. 해마다 발생한 수해, 가뭄과 우박으로 세금 부담이 가중된 농민들의 삶은 파탄지경이었다. 갈 곳 잃은 농민들이 속속 여모가 일으킨 민란에 참가해 순식간에 수천 명에 이르렀다.


▲  서시(西施)와 부차(夫差)가 함께 물놀이하며 태호를 감상하던 산비탈. 여모의 '얼음처럼' 응어리진 원한이 부차에 대한 원한이 다르겠는가? ⓒ 최종명


드디어 서기 17년, 여모는 규산 기슭에서 하늘을 향해 제사를 올리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한 후 용사 3천 명을 인솔하고 기세 등등하게 현성을 공격했다. 한바탕 전투를 벌인 후 단번에 성을 돌파하자마자 현령을 생포했다. 관리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고 현령은 목숨을 구걸했다. 여모는 '살인자는 당연히 죽어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준엄한 심판과 함께 참수한 후 아들의 무덤 앞에 현령의 수급을 바치고 추모해 원한을 깔끔하게 씻었다. 


현령이 죽자 군 태수가 진압군을 동원했지만, 여모는 침착하게 부대를 둘로 나눠 유유히 사라진 후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은신처로 철수했다. 왕망의 개혁이 점차 실패로 돌아가자 근방의 가난한 농민들이 앞다투어 여모의 근거지로 투항하기 시작했으며 1년 만에 여모의 군사는 만여 명에 육박했다. 힘을 모아 함께 산 농사도 짓고 바다에서 어획하며 생활했다. 이렇듯 점차 자립적인 공동체 생활이 지속되자 토벌도 장기화될 수 밖에 없었다. 관군은 사자를 보내 투항을 권유하고 술수를 부려 와해도 시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여모 민란은 중국 최초로 여성 지도자가 일으킨 특별한 농민 반란이었으며 신나라에 항거하는 반봉건 투쟁의 서막이기도 했다. 서기 18년, 울분의 횃불을 높이 들고 수만 명의 리더로 자리매김한지 1년 만에 여모는 안타깝게도 병사했다. 아들을 위해 '현명한' 복수를 이뤘으며 도탄에 빠진 농민의 아픔을 보듬었던 여성 지도자를 어여삐 여겼던 역사가가 있었기에 <후한서> '유현유분자열전(劉玄劉盆子列傳)' 편 한 자락에 그녀의 모정을 담아 고스란히 기록했다. 지도자를 잃은 농민군은 곧 이어 발발한 적미군(赤眉軍)에 참가해 명맥을 이어갔다. 


도탄에 빠진 붉은 눈썹


서기 17년 녹림산을 근거지로 반봉건 민란의 기치가 서서히 북상하자 고을마다 기다렸다는 듯 농민들의 의기 투합이 심상치 않았다. 산동 동남부 해안 지방에서 봉기한 여모에 이어 서기 18년, 번숭(樊崇)이 자신을 따르는 백여 명의 농민과 함께 봉기했다. 번숭은 낭야 군 변경 영문(靈門, 산동 거현莒縣 북쪽) 사람으로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농민으로 착실하고 용감한 성품을 지녔다. 키가 장대하고 늘 약자 편을 드는 성격이라 평판이 좋았기에 어떤 일이라도 함께 도모하는 것을 원하는 농민이 많았다. 


번숭이 살던 거주(莒州)는 춘추시대 거나라 영토로 춘추오패 시대를 연 제환공(齊桓公)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고대부터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역사문화 도시였는데 서한 말기부터 사회적 모순이 격화돼 농민들이 고단한 삶을 이어오고 있었다. 신나라에 이르러 토지겸병이 심해지니 농민들은 노역과 과세 부담이 겹친데다가 가혹한 통치로 이어져 도탄의 정도가 수심화열(水深火热)이었다.


서기 18년, 번숭은 여모가 일으킨 민란의 땅에서 다시 한번 혈기왕성한 농민들과 함께 핍박에 항의하며 세금 납부를 항거하는 선언을 했다. 번숭은 직감적으로 안전한 은신처가 필요했고 무리를 이끌고 산동의 명산인 태산으로 들어갔다. 청주(青州)와 서주(徐州) 지방에서 기아에 시달리다가 도적으로 변신한 농민들이 하나 둘 번숭의 용맹을 듣고 태산으로 몰려들었다. 1년도 지나지 않아 인원이 만 여명으로 늘었으며 거주의 봉안(逄安), 동해(東海) 군의 서훤(徐宣), 세록(謝祿), 양음(杨音)이 이끄는 농민까지 합류하자 수만 명의 규모로 발전했다. 


사회 불만이 고조된 농민들은 주변 현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다시 근거지 태산으로 돌아오는 전술로 울분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창고를 털어서 운반해 온 양식이 태산에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기아에 허덕이는 고을의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며 구휼을 병행하자 주민들을 통제할 방안이 없는 현령들은 줄행랑을 놓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세력이 점점 확대되자 '사람을 죽인 자는 처형하고 해를 입힌 자는 갚는다.'는 무언의 약속을 정해 점점 조직화했다. 민란의 대의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내부 규율을 세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서도 없고 깃발이나 편재, 명령도 없지만 민란 지도자들을 삼로(三老), 종사(从事), 졸리(卒吏)와 같은 나라의 벼슬에 상응하는 이름으로 위계를 세웠다. 민란에 합류한 농민들은 '동지'라는 의미보다 훨씬 동지다운 '거인巨人'이라 서로 높이 부르며 용기를 북돋웠다. 


번숭은 최고 직위인 삼로라고 스스로 불렀는데 고대국가의 최고 관직인 태사, 태부, 태보처럼 삼 등분된 권력 구조를 이해했던 것이다. 모두 미천한 농민이자 일자무식이었지만 단순 폭동이 아니라 굳건하고 체계적인 민란의 형태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가 토벌군을 보내자 번숭 등 지도부는 서로 뒤섞이면 구분이 힘들 것으로 판단해 모두 눈썹에 붉은 진흙으로 분장했다. 피아를 구분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정도로 지혜롭고 창의적이었으니 번숭의 민란은 '적미(赤眉)의 난'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게 됐다. 


▲  녹림군과 적미군은 차례로 수도 장안 성을 공략했다. 지금 서안의 성문인 동작문의 야경 ⓒ 최종명


21년에는 대장군 경상(景尚)이 이끄는 토벌군과 1년 이상 공방을 벌인 끝에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 대장군이 목숨을 잃자 크게 분노한 황제는 다시 겸단(廉丹)과 왕광(王匡, 녹림군의 왕광과 동명이인)을 장군으로 10만 대군을 보내 토벌하려 했다. 일반 농민들의 적극적 지지까지 등에 업은 용감무쌍한 적미군은 태산 서쪽 성창(成昌, 산동 동평東平) 전투에서 승리했다. 왕광은 도주했고 체포된 겸단이 처형되자 관군은 궤멸됐으니 적미군의 위세는 날로 커져 10만 명이 넘는 무장 봉기군으로 성장했다. 


시기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적미군과 녹림군은 민란의 발발과 지향하는 바가 비슷했지만 아쉽게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다. 서기 23년에 이르러 경시제를 옹립한 녹림군이 곤양대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완성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했을 때였다. 적미군 지도자들은 직접 낙양으로 찾아가 경시제 정권과 함께 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경시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다만 적미군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번숭 등 지도부 20여 명을 권한이나 녹봉도 없이 이름뿐인 열후(列侯)에 봉하자 번숭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근거지로 돌아갔다. 녹림군과 적미군이 연합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데 그래서 역사는 가정법을 쓰면 재미가 없어진다고 하는가 보다. 


이듬해 겨울 적미군은 30만 명을 두 갈래로 나누어 수도 장안을 향해 진격했는데 경시제 정권을 대체하는 것이 목표였다. 장안과 가까운 화양(華陽)에 이른 후 적미군 지도부는 경시제를 대신할 황족을 내세워 백성의 신뢰와 명분이 필요했다. 당시 포로로 잡혀 전투를 진무하는 일을 맡았던 한고조 유방의 10대손 유분자(劉盆子)를 내세워 상장군으로 옹립했다. 상장군으로 명명한 번숭은 옛날에 황제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설 때 스스로 부르던 호칭을 황제로 착각했다. 나중에 유분자는 정식으로 황제가 돼 역사에서는 건세제(建世帝)라 부른다.


농민 출신 번숭은 난세에 민란을 도모해 적미군 지도자라는 명성을 역사에 남겼다. 황제를 옹립하고 농민이 잘 사는 나라, 주인으로 행세하려는 꿈을 꾸었다. 비록 배우지 못했지만 지혜롭고 용감했으며 농민들로부터 추앙 받게 되자 위세가 드높은 민란의 우두머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민란의 영웅이 됐던 것이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유수


적미군이 유분자를 옹립하던 시기, 이미 유현을 경시제로 옹립한 녹림군 역시 함곡관을 넘어 일사천리로 장안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왕망은 진나라가 진승과 오광의 민란을 토벌하기 위해 포로들을 동원한 것을 모방했지만 이미 민심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장안 외곽에 주둔하던 포로들은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다. 


25년 9월 녹림군이 장안 성을 공격하자 대부분의 관리들은 도망치고 성난 백성들은 황궁인 미앙궁(未央宮)에 방화를 했다. 왕망은 왕읍, 왕순 등이 인솔하는 천여 명의 관리들과 궁전 연못 창지(沧池)을 방패 삼아 배수진을 쳤다. 녹림군은 궁전을 겹겹이 포위하고 격전을 벌였는데, 장안 상인 두오(杜吳)가 이끄는 부대도 전투에 참가했다. 왕읍과 왕순이 죽자 왕망은 황급히 실내로 숨은 후 황궁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뒤따라 온 두오의 칼날에 허망한 죽음을 당했으며 성난 사람들에 의해 시체는 도륙돼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약했던 경시제는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실패하고 왕광 등 녹림군의 지도자들의 불만을 샀으며 민란 초기 의지했던 장군을 살해하기도 했다. 적미군이 장안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다가 살해 당했다. 


적미군도 황제를 옹립했지만 오랜 전쟁과 흉년으로 장안에는 양식이 바닥난 상태였다. 26년에 이르러 돌파구를 찾으려고 서쪽으로 진출했지만 평양(平襄, 천수天水)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상장군 외효(隗嚣)에게 가로막혔다. 그 사이 수도 장안을 점령한 유수의 대장군 등우(鄧禹)와 치열한 전투를 치러 겨우 '폐허의 땅' 장안을 수복했지만 성곽은 걸레처럼 쓸모 없고 백골만이 들판에 깔렸다. 식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부득이 동쪽으로 철수했다. 


한편, 유수는 친척 형이자 동지인 유인을 살해 당한 후 반란을 도모할 지 모른다는 경시제의 의심을 피해 하북에 머무르고 있었다. 녹림군과 적미군이 서로 분열한 후 격전을 치르느라 차례로 힘을 빼고 있을 때 온화한 품성과 강렬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포로를 석방하고 악법을 폐지하며 농민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하북 성에서 발발한 농민봉기군인 동마군(銅馬軍)과 청독군(青犢軍)을 포섭했으며 산동, 하남, 하북 삼성을 포괄하는 백만 대군을 주름잡고 있었다. 적미군이 장안으로 진격할 때 후방에서 이미 황제를 칭할 정도로 유수는 철저한 세력화를 달성하고 있었다. 강력한 위력을 지닌 유수가 서쪽으로 진출하자 적미군과의 일대 격전이 불가피했다. 


장안과 낙양 사이 효산(崤山) 골짜기에서 정면으로 맞붙었으나 참패한 적미군은 군사의 반 이상을 잃고 하남 의양(宜 陽)으로 물러났으며 유수의 군대가 포위했다. 승부가 거의 결판난 상황에서 유수는 자비를 베풀며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자 적미군은 모두 투항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유수는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않았지만 위험한 인물은 반드시 죽였다. 우두머리 번숭이 예외가 될 리가 만무하니 역모를 꾀한다는 죄를 물어 끝내 살해했다. 기록에는 번숭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의미 없는 행동이었거나 척결을 위한 명분을 적었을 것이다. 경시제를 옹립했다가 실패한 녹림군의 왕광도 적미군에게 투항했다가 다시 유수에게 백기투항 후 연명하다가 유수의 부하 장수에게 참수 당했다. 


난세의 영웅 유수 광무제는 한나라를 다시 세웠다. 진승과 오광의 민란을 틈탄 유방처럼 녹림과 적미의 민란을 기회로 잡은 유수. 두 건국 황제는 유씨의 한나라 400년 정권을 양분했다. 유방이 참사축록(斬蛇逐鹿)의 초망영웅(草莽英雄)이라면 유수는 게간이기(揭竿而起)의 녹림호한(綠林好漢)이라 할 수 있다. 뱀을 참하고 사슴을 쫓아 황제가 된 재야 영웅, 죽창을 높이 들고 일어난 비적 호걸? 그것도 다 성공한 자의 달콤한 수사일 것이다. 유방이 신비스러운 치장을 했다는 의심이 드는 반면 유수는 온화한 성품답게 별로 영웅담 한두 가지를 빼면 억지로 화장하지는 않았다. 


유방이 '준엄했다'고 인정하면 유수는 한마디로 '이유견장(以柔見長)'이라는 표현이 적절한데 바로 '부드러운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유방은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패하여 도주하던 중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아들과 딸을 버린 '대의멸친(大義滅亲)'을 마치 개국황제의 미담인 양 선전했으며 항우의 부하 장수 정공의 측은지심을 이용해 목숨을 애걸했는데, 한나라를 개국한 후 뜻밖에도 은혜를 베풀지 않고 죽여버린 '정공비륙(丁公被戮)'의 비정함이 있다. 자신을 살려준 정공의 행동이 불충이었으니 본받지 말고 모름지기 신하들은 냉정하게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니 <사기> '계포전(季布傳)' 기록이 사실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유수는 개국 후 공신과의 만찬에서 '자신과 함께 나라를 건국하지 않았으면 지금 무얼 하고 있었을까?' 물어본 후 등우, 마무 등 공신들의 덕담을 듣고 나서 '오늘날 여러분이 나를 의지해 여기까지 왔으니 나에 대해 두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고 점잖게 말하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어느 날 은둔지사 한 명이 명망이 있다 하여 인재로 쓰려고 친견했는데 도무지 하사 받은 복록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만하고 방자했다. 신하들이 불경죄로 다스릴 것을 주장했는데도 죄를 묻는 대신 오히려 40필의 비단을 하사했다. 유방이었다면 아마 당장 그 자리에서 능지처참으로 다스렸을 것이다. 


녹림산과 태산에서 불 타오른 농민의 원한이 산천초목을 태우고 이마뿐 아니라 온몸에 붉은 피를 뿌리며 번득이는 눈빛으로 달려가는 진군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한서>는 왕망의 망(莽)자를 가운데 글자 대(大)가 아닌 견(犬)으로 써놓았는데 한 세대조차 이어가지 못한 정권은 역사의 '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유수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내세우며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민란의 역사다. 억울하게 죽느니 죽음도 불사하며 떨쳐 일어나, 민란의 깃발을 들어올렸고 비록 짧았지만 한바탕 영웅으로 살다간 이름없는 전사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민란의 주인공이었다.


▲  녹림과 적미의 민란 혼란기에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나라를 세운 광무제 유수는 폐허가 된 장안을 버리고 낙양에 도읍을 정한다. 유수 사후 10년만에 세워진 낙양의 백마사. 이 사원은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이다. ⓒ 최종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