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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중국대장정(04) – 둥다라산과 란창강대협곡, 쥐에바산과 방다대초원

 

, ‘길다라는 말? 사전으로 들어가 보니 뜻도 참 다양하다. 적어도 여행가에게는 길어서 생긴 말이라고 해도 좋다. 그 길이 긴 만큼 보고 듣고 느낄 일도 많은 것이니 말이다. 꼬불꼬불 끝없이 앞만 보고 가야 하는 차마고도는 이다. 푸얼차가 아니라면 어찌 그 긴 노정을 생각하기나 했을까? 발효차는 오래될수록 좋은 것이니 지혜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2천 킬로미터가 넘는 아스팔트 길을 달리는데도 숨이 가쁜데 말은 어떻게 생명이자 노동을 승화시킨 것인가? 생명을 이어주려는 노동, 이것이 차마고도의 정신이다.

 

국도 214번 도로는 여전히 북쪽을 향해 달린다. 쾌청한 날씨라 선명한 빛깔의 하늘과 구름, 연두의 칭커(青稞)까지 펼쳐진 길은 눈이 부셔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다. 2시간 만에 차를 세운다. 차창 밖 칭커를 바로 앞에서 보니 더욱 짙푸른 감촉이 향기처럼 눈을 물들인다. 볏과식물인 칭커는 흔히 쌀보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노랑과 연두를 지나 연초록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수확 후 말리고 갈아서 국수도 만두도 만들어 먹는다. 게다가 술로도 담근다. 티베트에서 가장 유명한 술이라면 칭커주라 할 수 있다. 손님을 초대해 접대하는 말을 칭커(请客)라고 한다. 발음이나 뜻도 아주 좋다.

 

Mp-04-01 국도 214번 도로의 칭커 밭


Mp-04-02 생 콩 먹는 티베트 아이들

 

도로 안쪽에 농가가 하나 있다. 대문 앞에 아이 둘이 앉아서 무언가 열심히 먹고 있어서 다가가 본다. 푸른 콩이다. 낯선 이방인에게도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는 순박한 아이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콩에 시선이 자꾸 가니 몇 개를 넌지시 손에 담아준다. 콩을 그냥 먹고 있으니 걱정스러워서 물어본 것이었다. 정말 맛있게 훑어내며 야금야금 먹는 게 신기하다. 아이들도 먹는데 뭐 어때 하는 마음으로 껍질을 열고 한 알을 씹었다. 그런데 이 무슨 달콤하면서도 싱그러운 맛이란 말인가.

 

기사 쓰면서 콩 검색했다. 도대체 그냥 생으로 먹는 콩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티베트 고원만의 특별한 콩인가? 생김새는 자그마한 작두콩(중국어로는 다오더우刀豆라 함)과 비슷하다. 콧물이 콧잔등에 버젓이 남은 채 콩의 단 맛을 풍기는 아이들과 잠시 눈빛을 나누고 일어선다. 저 나이 때, 배고픈 시절의 동네 꼬마를 기억해내고 아련해지는 마음이랄까? 우연으로 잠시 만난 순간마다 추억은 여행이 주는 고유한 이기도 하다. 다시 길을 떠나지만, 차창 뒤로 달려올 듯하다. 싱그러운 콩의 단내가.

 

망캉(芒康) 현으로 들어선다. 티베트 말로 선묘(善妙)한 땅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지극히 신비로운 곳이라고 하면 될 듯싶다. 동경 98~99, 북위 28~30도에 위치하지만, 평균 해발이 4,317m. 그래서 8월 한여름이어도 몹시 덥지는 않다. 윈난에서 북쪽으로 온 사람과 쓰촨에서 서쪽으로 온 사람이 서로 만나는 도시다. 십자가의 가운데를 점유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남북을 가르는 국도 214번과 동서를 가르는 국도 318번이 딱 만난다. 이제부터 라싸로 가려면 318번 국도를 타야 한다.

 

Mp-04-03 완만한 둥다산 고개로 가는 길


Mp-04-04 둥다산 넘어가는 길

 

갈림길 팻말이 조금 전 보였던 거 같은데 갑자기 가파르게 꼬부랑길이 나타난다. 산 능선을 따라 크게 원을 그리며 오르는 걸 보니 앞에 고산이 가로막고 있나 보다. 둥다산(东达山) 길은 더 이상 회똘회똘 하지 않고 완만하다. 이제 바야흐로 천장선(川藏线)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길고도 사무치게 감동적이라는 길이 시작된 것이다.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해발 5,008m라고 똑똑히 적혀 있다.

 

Mp-04-05 해발 5,008m 둥다산 고개

 

쓰촨에서 라싸로 이르는 천장선에서 두 번째로 해발이 높은 고개다.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금지 구역이라고 하며 천연의 요새, 천참()이라 부른다. 다르초가 휘날리고 바람도 산을 넘어갈 듯 세차게 분다. 표지판에 무경교통(武警交通)이 담당하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무장경찰은 일반경찰보다 여러모로 세다. 국무원 교통부와 업무 협조를 하겠지만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는다. 특별한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다. 둥다산이 있는 티베트는 평범한 곳이 아니다.

 

산을 넘어가면 내리막이 이어진다. 차도 쉬고 사람도 잠시 쉬어간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넘어가서인지 가는 방향으로 세상이 좀 밝아진 느낌도 난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이 한 시간가량 따라오고 있다.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윈난을 거쳐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셋이다. 차마고도 여행은 ()자 형태로 흐르는 삼강병류(三江并流)를 만나게 된다. 세 강을 다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진사강(金沙江)은 지났다. 가운데를 흐르는 두 번째 강이 란창강(澜沧江)이다. 강은 협곡을 만들고 유유히 하산한다. 빠른 물살로 달리는 대협곡이 눈 앞에 나타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차가 멈춰 선다.

 

도로가 끊긴 것이다. 한여름 폭우가 산비탈을 타고 미끄럽게 쓰러지면 바로 산사태다. 며칠 전부터 비가 내렸다고 해서 염려됐는데 이제 곤란이 시작된 것이다. 심하면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도 빈번하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좁은 길에 차량이 줄을 섰다. 현지 가이드는 반 농담 삼아 돼지라도 한 마리 잡을까요? 라며 너스레를 떤다. 란창강 강변에서 별을 보며 돼지 삼겹살?’ 좋겠다고 딱 3초가량 기뻤다.

 

Mp-04-06 국도 318번 도로에서 산사태로 길이 막혔다!


Mp-04-07 국도 318번 도로에서 본 란창강대협곡 강물

 

하늘이 내린 사고 탓에 란창강대협곡의 물살을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게 됐다. 강의 총 길이는 4,909km. 아시아에서 가장 긴 창강(长江) 6,300km, 황하(黄河) 5,464km만큼은 아니어도 길긴 긴다. 중국 대륙에서만도 2,139km라고 하는데 약 1,000km인 한반도의 두 배가 넘는 기나긴 강이다. 중국을 벗어나면 메콩강(Mekong River)으로 이름이 바뀌어 라오스,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지나 바다로 흘러간다.

 

세계지도를 따라, 강물의 부유물을 따라 바다까지 흘러간 망상에 사로잡힌 시간으로 따지면 30분 정도 됐을까?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너무 싱거운 거 아닌가 싶었지만 큰 사태는 아닌가 보다. S자 도로가 이곳뿐일까마는 위험해 보이는 길이긴 하다. 불도저가 길을 뚫고 있는 모습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운전사가 버럭 화를 낸다. 사진 찍으면 안 된다는 무장경찰이 작업 중이었다. 야단맞아서 살짝 서운했지만 또렷이 무장경찰이라고 쓰여 있는 불도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Mp-04-08 란창강 강변의 작은 마을 루메이진

 

자그마한 강변 마을 루메이진(如美)에 도착했다. 참 이름이 예쁘다. 마을 자체가 깨끗하거나 아름답지는 않지만 개도 사람도 한가한 동네다. 6시 반이 지났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국수와 볶음밥으로 빨리 저녁을 해결했다. 가게에서 수박도 사서 나눠 먹고 다시 서둘러 길을 떠난다.

 

주카촌(竹卡村) 다리를 따라 란창강을 건넜다. 강을 왼쪽을 보냈는가 싶었는데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번에는 해발 3,911m의 쥐에바산(觉巴山) 고개를 넘는다. 지그재그와 꼬불꼬불, 8km에 이르는 고갯길이 정신 차릴 새도 없다. 길옆에는 집 몇 채만 달랑 모인 촌락이 계속 이어진다. 점점 날이 어두워지니 어둠으로 사라져 가는 집을 따라 달리고 달린다.

 

Mp-04-09 쥐에바산 고개 넘어 가는 길

 

차마고도를 새와 쥐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양의 창자로 비유한다. 고산을 넘어야 하고 안전한 발걸음을 만들다 보니 생긴 말이다. 말이 다니던 길보다 곧은 길이지만 창자 같은 국도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여행객들은 산 아래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울타리를 횡단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산 아래로 내려가니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1시간이나 더 달려 오늘의 숙소 쭤궁()에 도착한다. 쭤궁은 티베트 말로 밭 가는 편우(犏牛)의 등이라는 뜻이다. 황소와 야크(牦牛)의 잡종을 편우라 하는데 아주 큰 수소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등처럼 넓다는 말인가? 힘세고 덩치도 큰 소를 상징하듯 가로 408km, 세로 220km에 이르는 면적이다.

 

Mp-04-10 쭤궁 현의 아침 거리


Mp-04-11 방다대초원의 쌀보리 칭커와 운무

 

아침 햇살이 밝았다. 청아한 하늘과 산 능선에 두루 걸쳐져 있는 구름이 햇살을 받아 아주 새하얗다. 밭에는 역시 초록의 칭커가 반듯하게 자라고 있다. 차마고도를 달리는 상쾌한 기분. 차창 밖 산은 하늘과 가깝고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은 친근하다. 언뜻 보면 우리나라 산세라 해도 믿겠다. 완만한 강물은 호수처럼 흐르고 푸른 초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방다대초원(达大草原)이다.

 

란창강과 누강(怒江) 사이에 있는 고원 초원이다. 130km에 이르며 물과 풀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초원이다. 해발 4,200m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몰라도 포근한 느낌이다. 방다 진()으로 들어서니 시골 마을답게 단층의 가게가 다닥다닥 붙었다. 차마고도의 오랜 도시답게 말을 끄는 사람이 조각돼 있다. 처절하게 산을 넘고 협곡을 건너온 그들이 일심동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쉬며 또다시 떠날 준비를 했으리라.

 

Mp-04-12 고요한 방다대초원의 아침 모습


Mp-04-13 방다 진 광장의 차마고도 상징 조형물

 

고등학교 때인가 본 영화 <초원의 빛>이 생각났다. 나탈리 우드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가슴 아픈 마음을 담아 워즈워스의 시를 읊는 마지막 장면의 강렬한 인상. 그러나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를 떠올리기에는 티베트 초원, 참으로 복잡하다. 화물차가 빠르게 지나가는 길을 뒤따라 오체투지로 걷는 사람이 나타났다.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일어나는 무한한 반복 동작으로 몇천km를 여행하는 사람들.

 

오토바이로도, 자전거로도, 자동차로도 질주하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그들의 영혼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초원의 빛이여! 그 빛이 빛날 때, 그때 그 찬란한 빛을 얻으소서!”라고 새겨봐도 찬란한영혼의 빛은 아침 햇살이 아무리 환상적이라 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명을 이으려고 횡단과 종단을 반복한 노동을 통해 하나가 된 그들의 고운 영혼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됐다는 감사한 마음만을 알게 됐다.

 

Mp-04-14 방다대초원 옆 도로 위의 오체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