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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북한 최초의 해외 합작 영화 <평양에서의 약속>


<평양에서의 약속(平壤之約), Meet in Pyongyang>은 북한 최초의 외국(중국) 합작 영화이며, 처음으로 북한 당국이 10만 명이나 참여하는 대규모 집단 체조 '아리랑' 촬영을 허가한 작품이다.


중국 산시(山西) 영화제작사가 1천만 위안(약 18억 원)을 투자하고, 북한은 인력과 물자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제작사 대표 리수이허(李水合)는 북한 영화인 <눤춘(暖春)>이 나름대로 흥행한 것에 용기를 얻어 3년 준비 끝에 개봉했다.


지난 3일 베이징 비롯한 중국 여러 지역에서 개봉... 10일 북에서 상영


▲  <평양에서의 약속> 중국 및 북한 영화포스터 
ⓒ 허난영화TV제작그룹 &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지난 3일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 여러 지역에서 개봉됐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 영화를 보려고 기다리던 중 급한 일이 생겨 서울을 다녀온 사이에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중국 관객들은 '국가 이미지 홍보 영화(國家形象片)'라는 이유로 입소문을 멈췄다. 이후 10일 북한에서도 상영됐다. 북한에 가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인터넷을 통해 어렵게 봤다.


영화는 어항 속 붕어의 유영을 따라 무용 손짓을 배우는 아이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할머니는 아이에게 '조선무용(朝鮮舞蹈)'을 배우게 했다. 성인이 된 아이는 '방울' 춤으로 민족 무용 대회에 출전한다. 하지만 심사위원이기도 한 할머니에게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아 실망한다. 그 와중에 중국과 북한 예술가 문화 교류를 위해 평양에 가게 된 그녀에게 할머니는 사진 귀퉁이를 찢어 보관하던 오래된 사진 속 주인공을 찾아달라고 한다. 


▲  <평양에서의 약속>의 주인공 왕샤오난 역은 신세대 배우 류둥이 맡아 열연했다.
'조선무용'인 '방울' 춤을 추는 장면 
ⓒ 허난영화TV제작그룹 &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조선무용'을 전공한 왕샤오난(王曉楠)역에는 영화 <바링허우(80後)>로 주목받는 신세대 배우 류둥(劉冬)이 맡았다. <평양에서의 약속>은 샤오난이 평양에서 머무는 10일 동안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영화이다.


평양 역에 기차가 도착하자 우연하게 사진작가 가오페이(高飞)와 부딪히는 복선을 빼고는 마치 우리나라 70년대 계몽 영화의 스토리처럼 보인다. 중국어 통역이자 인솔자 김성민(북한배우 김일철)은 차창 밖으로 개선문과 보통문(고구려 평양성 서문), 5.1경기장, 조중 우의탑 등 평양 거리를 안내한다. 샤오난은 김성민에게 할머니가 부탁한 사진 속 주인공을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이튿날 아침에 인솔자 없이 몰래 나와 대동강을 바라보다가 사진을 찍고 있는 가오페이를 다시 만난다. 규율을 지킬 것을 요청받지만, 발랄한 신세대 샤오난은 웃어넘기고 김성민과 함께 북한 무용수 김은순(북한배우 김옥림)을 만나러 간다. 


▲  <평양에서의 약속>의 한 장면. 평양에 온 주인공 샤오난은 북한 무용수인 은순을 만난다.
전문배우가 아닌 북한 실제 무용수 김옥림이 김은순 역을 맡아 열연했다. 
ⓒ 허난영화TV제작그룹 &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온화한 미소를 띠며 유연한 손짓과 발동작으로 아름다운 춤을 추는 은순. 하지만 그녀는 '아리랑' 집단 체조 연습을 지휘하느라 바쁘다. 선물로 가져온 반지를 건네지만, 이미 자기 손에 반지를 끼고 있다며 거절한다. 게다가 은순은 8살 된 중원이를 키우는 데 더 집중하고 있다.


은순은 샤오난에게 무심하게 대했다는 마음에 무용을 가르쳐 주려고 저녁 약속을 잡지만, 지키지 못한다. 둘은 오해가 생겨 잠시 소원하지만, 인민군 장교인 아버지가 폭발 사고로 사망하고 무용수이던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뜨자 중원을 키우게 됐다는 것을 전해 듣는다. 중원의 생일 때문에 약속을 어긴 것도 알게 된다. 


'아리랑' 체조에 북한과 중국 우의 담으려고 시도 


▲  <평양에서의 약속>의 한 장면. 은순과 샤오난은 작은 오해를 풀고 함께 '방울' 춤을 추고 있다.

ⓒ 허난영화TV제작그룹 &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샤오난은 자신이 아이디어를 낸 중국 민속놀이 공죽(空竹)을 체조에 적용한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풀린다. 은순은 미안한 마음에 화해로 '방울' 춤을 선보인다. 샤오난은 은순의 동작을 따라 함께 추고 배우며 마음속으로 화해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샤오난과 은순 사이의 영락없는 신파극이다. 영화는 본격적으로 두 방향으로 확산된다. 하나는 '아리랑' 체조에 북한과 중국의 '역사적' 우의를 담으려는 시도이다. 또 하나는 사진 속에 담긴 비밀을 푸는 일이다. 엄청난 인원이 동원되는 '아리랑'에 양국의 역사와 정치 외교적 관계를 담는 과정은 진부하다. 공연만 보면 그만이다.


한편, 은순과 샤오난 사이에는 왠지 모를 실마리가 있는 듯하다. 성민이 은순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 샤오난은 "사진 주인공을 찾아주면 사랑을 연결해 주겠다"며 내기를 건다. 


▲  <평양에서의 약속>의 한 장면. 영화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60년 전 종군기자의 사진.
귀퉁이가 잘라져 두 사람의 사진이 각각 나누어져 보관됐다.

ⓒ 허난영화TV제작그룹 &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영화에서 나름 흥미로운 수수께끼이자 실타래는 바로 사진작가 가오페이가 쥐고 있다. 그는 60년이나 지나 골동품에 가까운 카메라로 할아버지가 남긴 사진첩 속 사진을 그때 그대로 다시 찍고 있다. 종군기자이던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60년이나 지난 지금 시점의 사진을 찍기 위해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닌다는 설정. 이 영화에서 가장 '영화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은순은 휴일을 맞아 농악무용을 보여 주려고 고향으로 샤오난을 초청한다. 은순은 샤오난에게 연두색 한복을 선물하고, 샤오난은 반지를 다시 건넨다. 농악이 벌어지는 마을에서 은순과 샤오난은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춘다. 


가오페이는 사진 한 장을 펼치고 옛 군복과 공훈 배지를 주렁주렁 매단 노인들을 불러모았다. 왼쪽 귀퉁이가 찢겨 나간 사진을 보며 노인들은 60년 전을 회고한다. 마침 한 할머니가 빈 사진 속 인물은 둘이니 두 장이며 그 중 한 장은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  <평양에서의 약속>의 한 장면. 60년 전 사진 속 주인공이자 은순의 스승. 
샤오난의 할머니와 친자매처럼 지냈다는 이야기를 알려주고 있다.

ⓒ 허난영화TV제작그룹 &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샤오난이 무심결에 흘린 사진을 본 은순은 사진 속 주인공을 알고 있다고 한다. 주인공은 바로 은순의 스승이자 샤오난의 할머니와 친구 사이였다. 두 할머니의 아버지는 중국 동북 지방,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하던 동지였기에 친자매처럼 지냈다. 전쟁 후 헤어질 때 기념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사진사가 없어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을 오려 서로 상대방 사진을 간직했던 것이다.


샤오난이 사진과 함께 가져온 나무 빗과 은순이 이미 끼고 있던 반지는 두 할머니의 어린 시절에 나눠 가진 징표였다. 그제야 샤오난은 할머니가 자신에게 낮은 점수를 주고 평양으로 가라고 한 이유를 깨닫기 시작한다.


▲  <평양에서의 약속>에 등장하는 "아리랑" 훈련 장면

ⓒ 허난영화TV제작그룹 &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이제 영화는 10만 군중이 동원된 대규모 체조 '아리랑'으로 옮겨 간다. 영화 촬영을 위해 실제 동원된 군중 체조는 약 10분간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원래 10여 가지 이상의 레퍼토리가 90분간 수놓는 공연. 가장 멋지고 화려하고 질서정연한 모습만 담았으니 꽤 볼만하다.


운동장 상단, 화면 위는 "장군", "수령", "강성 대국", "백두산", "일심 단결" 등으로 생경하다. 간혹 원근감이 물씬 풍기는 "삼천리 금수강산"의 자연 풍경은 신기하다. "현대화"와 "정보화"라는 메시지와 함께 '조중 우호'를 담아 중국어로 매스게임하기도 하고, 후진타오 주석이 추구하는 이론인 "과학적 발전관",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는 한글과 중국어는 운동장 한가운데 벌어지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을 만끽하는 데 방해한다.


전체 공연을 중심으로 촬영했지만, 지루하지 않도록 카메라 각도를 다양하게 시도했다. 운동장 한복판에서 클로즈업으로 역동적인 장면을 포착한 부분도 많다. 10분 공연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를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을 것이다. 대형 스크린으로 못 본 것이 내내 아쉽다.


'아리랑' 장면이야말로 중국 관객에게 '국가 홍보 영화'라는 외면을 받은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기존 레퍼토리에 없는 중국식 폭죽이 터지는 장면과 판다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중국 관객은 할리우드 영화와 친하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영화에는 비싼 관람료를 내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는 평양 개봉도 고려했으며 양국 정부의 허가도 받아야만 했다. 


제작사의 적극 추천으로 신장(新疆) 위구르족 출신 시얼자티·야허푸(西爾紮提·牙合甫) 감독과 북한 감독 김현철이 공동 연출했다. 두 감독은 몇 번의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 기존 원본의 밋밋한 스토리 대신에 항미원조(抗美援朝, 6.25전쟁) 이야기, 1980년대 당시 실제 사진 작가 이야기, 현대 중국 무용수 이야기까지 추가해 완성도를 높였다고 고백한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샤오난은 할머니와 함께 가오페이 사진 전시회를 찾는다. 60년도 더 지난 사진, 잘려 나갔던 자리가 복원된 사진 앞에서 한 없이 서 있다.


한중 합작 영화와 드라마는 많지만...


▲  <평양에서의 약속>에 등장하는 대규모 집단 체조 '아리랑'

ⓒ 허난영화TV제작그룹 &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샤오난과 은순은 서로에게 부족했던 점이 무엇인지 서로 소통하며 깨달았다고 독백한다. "우린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야"라는 마지막 대사, 여운도 있지만, 좀 상투적이다. 복원된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영화 크레딧이 올랐으면 더 좋았지 싶다. 


영화를 보면서 몇 번 울컥하는 장면이 있었다. 텍스트 스토리만 봐서는 지나친 감정 표현이라고 할지 모른다. 60년 전 사진을 보며 옛 친구를 떠올리며 회상하는 할머니가 전하는 진한 소회의 말투, 도화지 그림을 보며 은순이 짓는 온화한 눈빛에 더 끌리는 것은 아마도 한 민족에게 느끼는 감성 때문은 아닐까?


한중 합작 영화와 드라마는 많지만, 중국과 북한은 이제 처음 합작품을 내놓았다. 앞으로 영화와 드라마 합작 계획이 많다고 한다. 남북한 합작 영화는 언제 가능할까 궁금하다. 영화 완성도나 흥행 여부를 떠나 서울에서 개봉하면 어떨까? 지금 정부에서는 개봉조차 힘들겠다.


인터넷으로 중국 정부가 허가한 '영화'를 찾아본다고 잡아가지는 않을 것이니, '아리랑' 10분을 위해서라도 한번 찾아봐도 좋을 것 같다. 10만 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체조를 보면서 사람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들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