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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5] 양산박 송강과 방랍 민란의 송나라 ②


▲ 신중국 초대 문화 부총리 곽말약, 송나라 민란 방랍을 기념해 그가 사망한 동굴에 기념 친필을 썼다. 사진은 곽말약의 친필인 자금성 후문 '고궁박물원' ⓒ 최종명


북경 십찰해(什刹海) 부근 후통 골목에 곽말약기념관을 가면 문학가이자 역사학자로서 엄청난 저작을 남기고 간 그의 공적에 감탄한다. <시경>, <서경>, <역경>에 두루 능통하고 시, 소설과 희곡 작품은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도 탁월해 번역서도 많다. 중국 최초의 유물사관에 따라 집필한 <중국고대사회연구>나 <갑골문자연구>, <중국사고> 등은 그의 천재적 지식인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자인 곽말약(郭沫若)은 1949년 신중국 정부에서 중화전국문확예술회 주석으로 선임됐으며 중국 문화정책을 총괄하는 부총리를 역임해 '중국은행(中国银行)', 자금성 후문 신무문에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을 비롯해 수많은 필적을 남기기도 했다. 곽말약은 1964년 항주와 황산 사이 순안(淳安) 현에 있는 동굴을 위해 친필 3글자를 썼으니 바로 '방랍동(方腊洞)'이다.


방랍은 청계(青溪, 현 절강 순안淳安) 사람으로 원래 옻을 재배하는 칠원(漆园) 집안 출신이지만 소작 머슴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호탕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며 생활이 매우 어려운 농민을 잘 돌봐주던 성품이었다. 송 휘종 시대 '육적'의 횡포와 강남 지방의 공예품이나 기암괴석은 물론이고 특산물을 대량으로 운송하기 위해 농민을 수탈하고 동원하고 있었다.


1120년 10월 방랍은 민란을 일으키며 선포한 결의에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오늘날 가렴주구가 심각하고 가무나 즐기며 개나 말, 토목까지 동원해 사당 짓기에 여념이 없고 병사들은 화석을 운송하는데 낭비하고 뇌물에 여념이 없으니 곧 우리 동남 지방의 순박한 백성의 고혈이구나.'라고 하며 하늘의 부첩(符牒)을 받아 일어섰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는 북송 시대 관리이자 의사였다고 전해지는 방작(方勺)이 고향 이름을 따 편찬한 <박택편(泊宅编)>에 고스란히 기록된 말로 이어지는 말은 현장 중계를 하듯 생생하면서도 명쾌한 웅변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농민은 오로지 늙어 죽을 때까지 죽도록 일해도 처자식은 늘 춥고 굶주리니 단 하루만이라도 배불리 먹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어찌해야 하는가? 独吾民终岁勤动,妻子冻馁,求一日饱食不可得,诸君以为何如?


청계의 농민은 소문을 듣고 순식간에 만여 명이 호응했으며 방랍을 '성공(圣公)'이라 추대했다. 송 휘종은 강남 자원을 중원으로 운송하는 화석강(花石纲)을 일시 중지하고 '육적' 권신인 동관(童贯)을 강절선무사(江浙宣抚使)로 임명해 토벌을 명령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선 방랍 민란군은 11월에 이르러 청계 현 서쪽 지역에 상주하고 있던 관군 5천 명을 섬멸한 후 청계 현을 공략했으며 현위 등 관리들을 생포했다. 이어 목주(睦州, 현 항주 서남부)를 공략하고 섭주(歙州, 현 안휘 황산 일대)로 남하했다가 곧바로 당시 화석강 지휘를 총괄하던 항주로 공격 목표를 정하고 진격했다.


▲ 송나라 시대에는 운하를 통해 강남의 물자을 중원으로 이동하는 화석강이 모순의 결정체이었다. 사진은 지금도 물류수단으로 활용 중인 강소 성 상주의 경항운하. ⓒ 최종명


방랍의 민란 소식을 듣자 남쪽 처주(处州, 현 절강 여수丽水)의 농민을 비롯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항배상망(项背相望)하듯 전투에 참여했으며 구주(衢州)의 마니교(摩尼教) 조직도 군사를 일으켜 호응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에서 예언자 마니에 의해 탄생했으며 비교적 체계적인 우주론에 입각해 인간의 운명을 조율하는 종교적 구원으로 3세기에서 7세기에 융성했으며 경전의 세계적 번역에 따라 위구르어와 중국어로 번역돼 전해졌고 위구르민족의 국교로 성장하기도 했다. 8세기 중반 안사의 난으로 혼란하던 당 대종(代宗) 시기 중국으로 전파된 마니교는 16대 무종(武宗)에 이르러 종교 활동이 금지됐다. 이후 비밀리에 전파되던 마니교 조직은 14세기에 이르러 사라지기 전까지 고통받던 농민의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인 지지를 받았다.


보통 명교(明教)라고도 부르는데 김용 무협소설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며 조직적인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명교 조직이 처음으로 민란에 참여한 것은 오대의 후량 시대 920년 진주(陈州, 현 하남 회양淮阳)에서 봉기한 모을(母乙) 민란으로 알려져 있다.


방랍을 주모자로 한 민란군은 바야흐로 강소, 절강, 안휘, 강서 일대의 6주, 52현을 일시에 평정해 권력을 틀어쥐니 송나라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되고도 남았다. 드디어 승승장구하며 항주를 점령해 고위 관리들의 수급을 거두는 한편 당시 전국적인 원성의 대상이던 재상 채경(蔡京)의 조상 무덤을 도굴해 해골을 부관참시하고 백성의 원성을 어루만지니 민란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때 한 태학생(太学生)이 천하를 군림할 자리에 오를 계책이라며 먼저 강녕부(江宁府, 현 남경)로 진공해 장강의 요새를 점령한 후 관군의 도강을 저지해야 한다고 건의를 했다. 방랍은 '천하가 부패해 백성이 도저히 살 수 없어서 나선 것이지 천하를 주무를 수 없다'며 어쩌면 '천자'를 위한 전략적 방향이었을지 모를 건의를 듣지 않았다. 역사에서는 언제 어디로 군사를 움직일지에 대한 전략의 선택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순간의 선택이란 늘 어려운 것인가 보다.


방랍이 항주 서남부 무주(婺州)와 구주로 군사를 이동하자 토벌군도 동관(童贯)과 담진(谭稹)을 대장으로 15만의 수륙 양군을 동서로 나누어 항주와 섭주로 진격해 왔다. 1121년 1월에 방랍은 북상을 결정하고 오른팔 대장군인 방칠불(方七佛)을 파견해 숭덕(崇德) 현을 함락시키고 항주 동북부에 위치한 수주(秀州, 현 가흥嘉兴)를 지나 후주(湖州)로 진격해 왕품(王禀)이 이끄는 동로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참패해 항주로 후퇴하고 말았다. 식량 보급이 단절되자 항주를 버리고 후퇴했다가 3월에 이르러 다시 항주를 공격해 성밖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왕품 군대에게 참패했다.


항주를 잃은 후 국면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더니 유진(刘镇)이 이끄는 부대에 의해 섭주를 점령 당하는 등 차곡차곡 주변 현들을 내줬으며 4월에는 구주의 마니교 교주 정마왕(郑魔王)이 생포됐다. 거듭 승리하던 민란군은 점점 거듭 패배하고 말았으며 방랍은 후퇴를 거듭해 결국 최초의 근거지 청계 현으로 돌아왔다. 이때에도 방랍의 군사는 20만 명에 육박했으나 전투력은 크게 떨어져 관군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후에는 방원동(帮源洞)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1121년 4월 토벌군이 방원동을 포위했으나 방랍의 군사들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천혜의 동굴 속에 숨어 버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령을 엄호하는 비장(裨将)에 불과하던 한세충(韩世忠)이 동굴의 침투경로를 찾아내 방랍이 숨은 곳을 찾아내 수천 명을 격살하고 민란 주모자들을 생포했으며 동굴 속에서 반항하던 7만 명의 군사를 살해했다고 하니 그 참혹을 연상하기조차 끔찍하다. 방랍 등 주모자급 52명은 수도 변경(汴京, 현 개봉开封)으로 압송돼 8월 24일 사형에 처해졌다. 비록 민란의 주모자이자 영수가 사망했으나 도주했거나 남았던 이들은 절강성 곳곳에서 1년여를 더 항쟁을 벌였다. 비록 장기적인 민란은 아니었지만 농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강남 일대를 섭렵했으니 <송사>에서도 방랍 열전을 따로 둘 만했다.


천 년이 지나도 씻기지 않을 22m 깊이의 방원동은 방랍동이라 개명됐으며 피비린내를 안타까워 한 것인지 방랍이 품었던 민란의 뜻에 공감한 것인지는 몰라도 흔쾌히 써 내린 곽말약의 '방랍동'은 아담한 비석이 되어 동굴을 지키고 서 있다.


여진족 금나라는 북송을 남쪽으로 쫓아내다


방랍과 양산박 민란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송나라는 여진족 금과의 동맹을 맺어 거란족 요를 물리치려 했다가 오히려 강력한 여진족을 중원으로 끌어들이게 됐다. 여진족은 동아시아 최강국이던 요를 서쪽 중앙아시아로 쫓아내더니 1126년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해 화의가 성립됐다. 송 조정은 어설프게 내부교란을 획책하다가 나라를 잃었고 태상황 휘종과 흠종을 비롯 3천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정강지변(靖康之變)을 당하고 말았다.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赵构)가 응천부(应天府) 상구(商丘)에서 왕조를 복원했다가 여진족의 공격을 받자 장강을 넘어 임안(临安, 현 항주)으로 수도를 옮겼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남송이라 불렀다.


여진족이 남하해 중원을 점령하자 송 조정의 탐관부패 정권의 수탈 못지 않게 농민들의 고충은 커져갔다. 민란의 성격에 민족항쟁의 기치를 올린 항금 민란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1127년 장령이던 왕언(王彦)은 태행산 太行山에서 농민을 동원해 민란을 일으켜 하남과 섬서, 사천 지방으로 이동하며 항금 민란을 주도했는데 '나라에 충성하고, 금나라 도적 살해를 맹세한다(赤心报国,誓杀金贼)'는 8글자를 새겼기에 팔자군(八字军)의 항금 민란이라고 불렸다. 소흥(邵兴, 현 산서 운청运城)에서도 농민들은 군영을 설치하고 여진족의 침공으로부터 스스로 운명을 보호하고 나서는 등 중원 곳곳은 민중 항거와 민족 항쟁이 결합된 민란이 발생했다.


항금 민란은 당시 사회 저변에 광범위하게 조직돼 있던 명교, 미륵교, 백련교 등 종교집단의 항거를 촉발하기도 했다. 1127년 그들은 산서와 하북 일대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붉은 두건을 쓰고 등장해 '홍건군' 또는 '홍군'이라 불렸는데 이후 13세기 초에 이르러 보다 조직적인 항거로 발전했다.


불 난 틈에 도적질 하다니... 평등의 나라를 만들자


▲ 송나라 시대 동정호에서 민란을 일으킨 종상은 보국 충심의 마음으로 300여 명의 민병을 조직해 응천부(현 하남 상구)로 달려갔다. 사진은 상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상구고성. ⓒ 최종명


동정호(洞庭湖) 서쪽 정주(鼎州, 현 호남 상덕常德)의 소상인인 종상(钟相)은 마니교의 종교이념을 신봉했으며 왕소파의 '균빈부' 사상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다. 송나라가 정강지변으로 멸망하자 종상과 장자 종자앙(钟子昂)은 보국 충심의 마음으로 300여 명의 민병을 조직해 응천부应天府(현 하남 상구)로 달려갔다. 종상 부자는 조정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곧바로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이때 종상 부자는 금에 대항하기 위한 물자보급을 위해 농민수탈, 세금 과중으로 이중의 재난에 직면하자 천하가 이미 대란에 빠졌다는 것을 간파하고 '대오를 결성하고 기치를 내걸고 갑옷을 중시하는 것은 곧 민란의 뜻이 있다.'고 민병대원들에게 설파했다.


금나라 군사에 대패한 후 후퇴한 장군 공언주(孔彦舟)가 불 난 틈을 노려 도적질 하는 진화타겁(趁火打劫)하듯 최량핍조(催粮逼租)하니 동정호 주변 농민은 도저히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1130년 초 현물을 독촉하고 세금을 강요하는 현실이 예사롭지 않게 흐르자 종상은 '법이 귀천과 빈부를 나누면 그것은 좋은 법이 아니며, 내가 행하는 법은 귀천을 평등하게 하고 빈부를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다.'는 생각을 웅변한 후 농민들의 분노를 이끌어 내고 공언주 군대에 대항해 소요를 이끌었다. 종교적 메시지와 강력한 지도력을 함축한 천대성(天大圣)이란 존칭을 자칭한 종상은 자신이 제창한 '법(法)'을 따르는 농민들이 점점 늘어나자 성곽을 점령하고 관청을 불태웠으며 부호를 습격했다. 불과 1개월 만에 종상의 민란은 동정호 주변 19개 현을 점령할 정도로 파급이 컸다. 종상은 '평등한 법'을 기치로 내걸고 초나라 정권을 세웠으며 왕의 자리에 올랐다.


송 조정은 기겁을 해 공언주에게 민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공언주가 정면공격을 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빈민으로 위장한 간첩을 침투시켜 내부에서 호응하라고 지시한 후 급습해 오자 민란 군대는 미처 손을 쓰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사이 종상과 가족은 체포돼 목숨을 잃었으며 종자앙은 도주했다.


그렇게 끝날 것 같던 민란은 다시 양요(杨么)가 수령이 된 후 계속해서 관군과 격전을 이어갔다. 양요는 원래 이름이 양태(杨太)인데 젊고 혈기가 넘쳤기에 초나라 지방 사투리로 '유소(幼小)'라는 뜻으로 '요(么)'라고 불렸다. 양요는 동정호 부근에 병영을 설치하는 한편 동정호 곳곳의 물길이 이어지는 요지마다 벌목을 해 선박을 구축한 후 평시에는 농사나 어획을 하다가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가하는 장기전에 돌입하니 민란의 대오는 갈수록 늘어났다.


6월이 되자 송 조정이 다시 정창우(程昌寓)를 대장으로 토벌군을 보냈다. 정주에 도착한 토벌군도 천 여명을 실을 수 있으며 선원이 발을 굴려 이동하는 대형 선박을 건조해 민란의 병영으로 진격해 토벌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병영은 수심이 얕았기에 모래사장에 빠져 오고 갈 수 없는 처지에 빠졌으며 민란 군대가 재빨리 공격해 오자 토벌군은 선박을 버리고 도주했다. 양요는 확실하게 동정호에 민란 근거지를 확보했으며 민란에 참여한 농민이 20만 명에 육박했으며 점령지도 점점 늘어나는 형세였다. 1133년 양요는 종상의 아들 종자의(钟子仪)를 태자로 삼고 자신은 대승천왕(大圣天王)이라 호칭했으며 모든 노역과 세금을 면제할 것을 선포하니 백성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11월에 이르러 송 왕조의 요충지에서 거듭 확대일로에 있는 우환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왕섭(王躞)을 대장으로 한 6만 명의 토벌군이 진격해 왔다. 민란 함선에서는 단단한 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마치 까마귀 입처럼 생긴 목노아(木老鸦)라 불리는 무기를 만들어 토벌군의 선박을 공격해 반파시켰다. 또한 선박에 깃발을 내리고 탈취한 인장을 찍은 항복 문서를 달고 흰 옷을 입은 채 피를 불고 북을 치면서 왕섭이 지휘하는 본선으로 다가가 거짓 항복하는 담대한 계략을 쓰자 토벌군은 대패하고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동정호 호반의 지형을 이용한 전술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때 송나라를 배반하고 금나라 괴뢰 정권인 제나라를 세운 유예(刘豫)가 관원을 파견해 합공으로 송을 공격하자고 제안했으나 양요는 거절했다. 얼마 후 다시 공식 녹봉 문서와 함께 금대(金带)와 금포(锦袍)를 들고 투항을 권고하러 찾아왔으나 만찬을 베풀어 술을 먹인 후 모두 살해해 버렸다. 송이나 금의 포위와 토벌, 투항 권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종상이 민란을 일으킨 지 6년째가 되는 1135년 2월 송 조정은 당시 4대 명장으로 꼽히는 두 장군을 모두 투입할 정도로 다급했는데 항금 전쟁의 와중에 병마도독(兵马都督) 장준(张俊)과 치제사(置制使) 악비(岳飞)를 대장으로 20만 명의 병력이나 동원했다. 동정호를 포위 당하니 민란 병영도 긴장이 고조됐으며 5월에는 호수 전체와 요소요소의 나루터를 모두 통제한 후 맹장으로 잘 알려진 악비가 선봉에 선 토벌군 대부대가 병영을 향해 진격하며 투항을 권유하니 양흠(杨钦)을 비롯한 장수들이 잇달아 항복하기 시작했으며 양요는 동정호 호반의 병영을 고수하며 격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정호의 수심과 지형에 어두웠던 악비는 투항한 양흠의 계책을 받아들여 수문을 열어 호수의 물을 배출하고 커다란 뗏목으로 곳곳의 물길을 막은 후 호반에 광범위하게 청초(青草)를 뿌렸다. 그런 다음 양흠의 인솔로 양요의 병영을 향해 진격했다. 동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양요는 수군을 직접 인솔해 출전했는데 갑자기 수심이 얕아진데다 함선의 동력장치인 바퀴에 풀들이 엉켜 붙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양요는 희생돼 허망하게 농민정권은 무너졌지만 부하장수들에 의해 유지된 병영들은 1년여 동안 지속적으로 항거했다.


▲ 종상과 양요의 민란으로 6년 이상 동정호 일대는 긴장이 고조됐다. 송나라 조정은 악비를 비롯한 정규군 장군을 총동원했다. 사진은 동정호를 끼고 있는 악양에서 맛본 지역특산물. ⓒ 최종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