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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7] 원나라 말기 홍건군 백련교의 민란 ②


▲ <의천도룡기>, <천룡팔부> 등 중국무협소설의 대가 김용.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팽화상은 백련교 민란 주모자 팽영옥을 묘사한 것이다. 사진은 김용 소설의 무대를 성곽으로 만든 운남 대리의 '천룡팔부성'의 황제 출성식 장면. ⓒ 최종명


홍콩의 <명보(明报)> 잡지를 창간하고 낮에는 정치평론을 쓰고 밤에는 무협소설을 쓴 소설가 김용(金庸)은 우리나라에서도 모르는 애독자가 없을 정도다. 그의 작품 <천룡팔부>는 중국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명문으로 꼽히기도 한다. 중원의 6대문파인 소림사, 무당파, 아미파, 곤륜파, 공동파, 화산파와 명교의 무공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무협 장편소설 <의천도룡기(倚天屠龙记)>에는 민란과 관련한 주목할만한 인물이 등장한다. 


소설 주인공이자 명교의 교주가 되는 장무기를 비롯해 대부분 등장인물은 당연하게도 소설가의 창작이다. 무공이 상당한 수준인 다섯 명의 명교 교주 오산인(五散人)에는 스님 두 명이 포함돼 있는데 포대화상(布袋和尚)으로 등장하는 설부득(说不得)과 팽화상 팽영옥(彭莹玉)이다. 소설 주인공 중 완전 허구는 아닌 역사 속 인물이 있으니 바로 팽영옥이다.


<의천도룡기>만큼 맹활약한 화상


팽영옥은 강서 원주(袁州, 현 의춘宜春) 출신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10세 때 인근에 있는 유명 사찰 자화사(慈化寺)에 들어가 스님이 됐다. 원나라의 잔혹한 통치가 계속돼 백성이 고통 받고 명절이 와도 쌀 한 톨 구경하지 못하고 그저 종교행사에 겨우 의탁해 위안을 찾는 지경임을 느꼈던 팽영옥은 당시 백련교가 농민들 깊이 뿌리내리자 자신도 교도로 가입했다. 


시간이 흘러 지역 내 백련교의 수장에 오르고 비밀스레 반원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의술에 뛰어났던 그는 명성을 듣고 사찰 부근으로 찾아오는 환자를 돌보면서 법술도 뛰어나 '미륵이 강림하고 건곤(乾坤, 역경의 뒤 괘, 음양이나 천하를 뜻함)이 변화한다'는 교리를 선전하면서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 신도가 수 천명에 이르게 됐고 일가를 이루거나 종파를 창립한 사람에게만 존칭하는 팽조사(彭祖师)로 불렸다.


팽영옥은 1338년 자신의 제자인 주자왕(周子旺)을 주왕(周王)으로 옹립하고 백련교도 5천 여 명을 동원해 민란을 일으켜 정교합일의 나라를 세웠다. 가슴과 등에 미륵이 보우한다는 기원을 담은 '불(佛)' 자를 새긴 책을 품고 거병했으나 곧 진압된 후 주자왕은 체포돼 살해됐다. 팽영옥은 제자 황천(况天)과 함께 교도들을 이끌고 회서(淮西, 안휘 서남부) 지방으로 도피해 포교를 지속했다. 신도들이 대량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능력이 돋보이는 신도 중 리더로서 소질이 보일 경우 황천을 황보천(况普天)으로 개명한 것처럼 모두 가운데 이름에 '보(普)' 자를 넣어 '팽당(彭党)'을 결성했다.


<의천도룡기>에서도 뛰어난 무공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우며 쉽게 살생을 하지 않는 인물로 등장하듯이 신도를 관리하는 측면에서도 매우 조직적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신도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홍건군 민란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많았으니 '사관학교'나 다름 없었다. 오죽하면 김용과 쌍벽을 이루는 무협작가 양우생(梁羽生)의 소설이자 드라마로도 유명한 <평종협영(萍踪侠影)> 속에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과 장사성이 모두 팽영옥의 제자로 등장할 정도다.


1348년 팽영옥은 황보천을 데리고 고향 원주로 잠입해 반원 활동을 재개하면서 인근 호남 유양(浏阳)과 강서 만재(万载)에서 적극적인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하지만 관군의 추적이 더욱더 극심해지자 부득이하게 도피해 멀리 호북 마성(麻城 )에 있던 제자 추보승(邹普胜)에게 의탁하게 됐다.


1351년 5월에 유복통이 홍건군 민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팽영옥은 8월에 추보승, 서수휘 등과 함께 호북 기주(蕲州, 현 기춘蕲春)에서 또다시 미륵 강림의 구호를 걸고 민란의 깃발을 들었다. 곧바로 10월에 호북 기수(蕲水, 현 희수浠水)를 점령한 후 서수휘를 옹립해 국호를 천완(天完),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으며 관료사회에서 왕명 출납을 전담하는 중서성(中书省)의 기능을 두고 그 이름을 연대성(莲台省)이라 불렀고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추밀원(枢密院) 및 6부 체제를 구축했다. 무엇보다 홍건군 민란에 호응해 붉은 두건을 두르고 향군답게 향을 피우며 전투에 참여했으며 정보랑(丁普郎)처럼 '보' 자 이름의 추밀원 맹장을 여럿 임명하는 등 군사조직을 편재했다.


▲ 백련교 민란 주모자 팽영옥은 가슴과 등에 미륵이 보우한다는 기원을 담은 ‘불(佛)’ 자를 새긴 책을 품고 거병했다. 사진은 대웅전 앞에 '불'자가 또롯한 조벽을 세운 소주 태호의 석공사. ⓒ 최종명


남부 홍건군의 시조가 된 팽영옥은 호북과 강서 일대의 모든 현을 공략하며 지방 관료나 지주를 무참히 살해했는데 '성마다 불을 뿜으니 관리는 도처에 숨고 성에는 사람 하나 없고 홍군만이 윗자리에 앉았네'라는 민요가 유행할 정도였다. 1352년 팽영옥은 부하 장수인 이보승(李普胜)과 조보승(赵普胜)에게 안휘 무위(无为)와 함산含山)을 공략하도록 한 후 두 군대를 모아 장강을 건넜다. 이후 팽영옥이 안휘 일대를 지나 절강 항주를 점령하자 크게 놀란 원 조정이 토벌군을 보내자 항주에서 후퇴해 강소 일대를 공략하며 북상해 집경(集庆, 현 남경)에 이르렀다.


1353년 원나라 토벌군이 다시 추격하자 팽영옥은 군대를 이끌고 강서에 있던 황보천과 합세한 후 고향 근처 강서 서주(瑞州, 현 고안高安)를 점령했는데 성을 함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벌군에게 겹겹이 포위를 당하는 곤경에 빠지게 됐다. 팽영옥은 황보천과 함께 전력으로 방어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돼 모두 학살당하니 남녀노소 모두 살아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의천도룡기>의 명교 교주이면서 무공 보유자이거나 양우생의 소설에서 '천하제일고수'이자 주원장과 장사성의 사부로 등장하는 팽화상은 실제로는 평생 민란을 꿈꾼 종교지도자였다. 당시 백련교 중심의 홍건군에게 백성들이 주목한 점은 배불리 먹고 사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염원을 실현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를 건국하고 토벌군에 맞서 싸우고 승리하는 것만큼 백성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일이라면 그것이 사교이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고 곧바로 자신의 정치적 자양분이던 명교를 배반하고 '사교'로 규정했던 것을 보면 역사에 남을 훌륭한 황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승화된 민란 주인공


▲ 백련교 민란으로 명옥진이 세운 대하의 수도는 중경이다. 서부대개발의 중심도시 중경은 가릉강과 장강이 흐른다. 사진은 중경 도심과 장강 남단을 잇는 장강케이블카. ⓒ 최종명


남송 시대 공주(恭州)를 관장하던 효종(孝宗)의 셋째 아들 조돈(赵惇)은 1189년 1월 황태자로 지명돼 공왕(恭王)이 되자마자 2월에 선위를 받아 황제로 등극했으니 광종(光宗)이다. 연이어 이중 경사를 축하한다는 뜻의 쌍중희경(双重喜庆)으로 자랑할만한 일이라 했고 중경부(重庆府)를 설치한 것이 중국의 5대 직할시이자 서부대개발의 중심 도시 중경이다. 일부 기자조차 왕가위(王家卫)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이 떠오른다는 무지한 농담을 하는 중경은 경사가 겹치듯 두 개의 강이 남북으로 나란히 흐르고 있다. 북쪽에는 가릉강(嘉陵江)이 흐르는데 옛날부터 유수(渝水)라 불렀기에 지금도 중경의 약칭을 '유(渝)'라 한다. 남쪽에는 중국의 젖줄 장강(长江)이 거쳐간다.


가릉강과 장강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대불사(大佛寺)에는 대웅보전, 관음전 등 흔히 볼 수 있는 전각 외에도 중국 어느 사원에서도 보기 힘든 오불전(五佛殿)이 있다. 높이 7미터, 너비 12미터 가량에 깊이 1미터의 불감에는 모두 다섯 분의 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에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毗卢遮那佛), 왼편에 화신(化身) 석가모니불(释迦牟尼佛), 오른편에 보신(報身) 노사나불(卢舍那佛)이 봉공돼 있다. 만물을 자비할 듯한 손 모양인 비로자나불의 설법인(說法印)도 눈길을 끌지만 삼신불을 향해 봉공하듯 양 옆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萨)과 보현보살(普贤菩萨)의 예사롭지 않은 모양을 자꾸 살펴보게 된다. 두 보살의 형상은 원나라 말기 홍건군 민란을 일으킨 서수휘와 명옥진을 그대로 닮은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서수휘는 호북 라전(罗田) 출신으로 포목을 팔던 상인으로 신체가 장대하고 용모가 비범했으며 정직한 성품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기에 평소에 사람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지니고 있던 백련교도였다. 1351년 8월 기주에서 팽영옥과 추보승이 중심이 된 홍건군 민란이 일어난 후 황제로 옹립됐다. 국호 천완(天完)은 대원(大元)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대(大)에 일(一)을 더했으며 원(元)에 갓머리 면(宀)으로 누른 것이다. 서수휘의 홍건군은 건국 후 '부자를 무너뜨리고 빈농에게 이익이 되도록 한다'는 최부익빈(摧富益贫)을 구호로 했기에 수많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삽시간에 수 십만 명의 군대로 발전했다.


서수휘는 초기에 호북 황강(黄冈)에 근거지를 두고 군대를 나누어 강서와 호남으로 진출했다. 홍건군은 기율이 매우 엄격하고 공정했는데 전쟁을 통해 성을 함락시켜도 함부로 살인하지 않았고 귀순하는 사람은 용서해주고 나머지도 괴롭히지 않았으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따르는 이가 백만 명에 육박했다. 1353년 원 조정의 토벌이 시작된 후 홍건군 근거지를 포위해오고 천완 정권의 핵심 지도자인 팽영옥이 전사하고 수도 방어 중 핵심 장수 4백여 명이 희생되자 호북 황매(黄梅)의 험준한 요새 나보원(挪步园)으로 후퇴한 후 군 조직을 정비했다.


이듬해 다시 반격에 나선 홍건군은 강서와 호남 일대를 진압했으며 사천과 섬서 일대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한양(汉阳)에 새로운 수도를 마련했다. 서수휘는 자신의 4대금강(四大金刚)이라 불리는 추보승, 예문준(倪文俊), 조보승, 부우덕(傅友德)과 초기부터 민란 동지이자 피를 나누는 사이였다. 하지만 1356년에 이르러 승상이던 예문준의 견제를 받아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 황제로 전락하게 됐다.


예문준은 어부 출신으로 민란에 참가해 대장군을 거쳐 승상의 지위에 올랐는데 종교적 색채가 강한 정치제도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주 서수휘의 지휘를 듣지 않고 사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더군다나 포로로 잡은 원나라 왕자의 처를 자신의 첩으로 삼기도 해 인심도 잃고 명예도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원나라 토벌군이 공격해오자 수치스럽게도 서수휘를 살해하고 투항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서수휘 살해 기도가 사전에 발각돼 도주했다가 자신의 부장 진우량(陈友谅)에 의해 피살됐다.


진우량은 호북 면양(沔阳, 현 홍호洪湖)에서 태어난 어부 출신으로 서수휘의 천완 정권이 탄생할 때 같은 어부 출신의 예문준 휘하로 참여했다가 역시 주군을 배신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1359년 서수휘는 강주로 천도했을 때 정권욕에 미혹돼 한왕(汉王)을 자칭한 진우량에 의해 서수휘의 심복 부장들이 차례로 살해 당하고 말았다. 1360년 서수휘는 유인작전을 펼친 진우량의 매복에 걸려 안휘 태평(太平, 현 당도当涂) 부근에서 머리에 철퇴를 맞고 즉사했다. 남방 지역 홍건군을 이끌며 기층농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던 서수휘의 운명도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진우량은 서수휘의 주검을 확인하자 부근 작은 사찰에서 곧바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한(汉), 연호를 대의(大义)라 선포한 후 환궁했다. 하늘도 대의라는 연호가 못마땅했던지 즉위 당일 폭풍우가 쏟아져 행사 진행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진우량의 배신과 악행에 분노한 명옥진(明玉珍)은 관계를 단절하고 중경 남쪽에 서수휘의 사당을 세우고 사시사철 제사를 지냈으며 신위를 추존하고 묘호(庙号)를 세종(世宗)이라 썼다. 서수휘를 따르던 신하들 대부분 진우량의 등극을 치하하며 민란의 뜻을 망각하고 이전투구의 영토 싸움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 명옥진만이 의리를 지키며 서수휘가 추구한 민란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명옥진은 호북 매구(梅丘, 현 수현随县)의 농민 출신으로 원말 민란이 광풍처럼 불어오자 고향 농민 천 여명을 이끌고 산채를 짓고 근거지 마련을 하던 중 1351년 서수휘의 민란이 일어나자 홍건군에 참여했다. 명옥진은 주로 서쪽으로 진군해 사천과 섬서 지역을 공략했는데 1357년에 이르러 중경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원나라 장수 하마투(哈麻秃)와의 전투 중에 오른쪽 눈에 화살을 맞아 애꾸눈 장군으로 통했다.


1361년에는 만승(万胜)을 대장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해 운남으로 진출, 원나라와 대리국 연합군과 전투를 벌리기도 했다. 부하장수들의 옹립을 받아들여 황제에 등극하고 국호를 대하(大夏)라 했으며 수도를 근거지 중경에 설치했다. 명옥진은 서수휘의 천완 정권을 본받아 중서성과 추밀원, 6부를 두는 관리제도를 도입했으며 한림원을 설치해 과거제도를 실시했으며 명교의 이념에 따라 선정을 베풀어 사회 안정을 이루고 생산 발전을 이루니 백성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도록 통치했다.


1363년 명옥진은 사신을 주원장에게 보내 친교를 맺자고 하니 주원장은 기뻐하며 '삼국시대 유비와 손권의 연맹처럼 서로 이해를 같이하는 순치(唇齿) 관계가 됐다'는 서신을 보내왔다고 <명사(明史)> '명옥진전'은 기록하고 있다. 선정을 베풀던 명옥진은 1366년 여름 신하들에게 '사천의 촉 땅을 고수하고 중원을 도모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36세에 불과한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10세의 아들 명승(明升)이 뒤를 잇고 태후가 섭정을 했다.


1368년 주원장이 명을 건국한 후 친교의 약속을 배신하고 이듬해 사신을 보내 투항을 권고했지만 무조건 항복할 수는 없었다. 주원장이 대군을 보내 중경을 공략하니 중과부적으로 긴급히 성도(成都)로 도망갔는데 명옥진의 부인인 팽태후(彭太后)는 '촉으로 파죽지세로 몰려오니 백성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고 만약 출전하면 반드시 사상자가 속출할 것인데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빨리 항복해, 생명이 있는 자들이 화살에 목숨을 잃는 것만 못하다'고 선언하며 투항했다. 


팽태후와 명승을 비롯 관속들은 모두 남경으로 끌려갔는데 주원장은 명승이 유약한 성품임을 알고 작위를 내려 관리했다. 1372년 주원장의 명령에 따라 팽태후와 명승 일행 수십 명은 수만 리 떨어진 고려(공민왕 시절) 황해도의 연안(延安)으로 유배나 다름 없는 이주를 하면서 중원 땅을 떠나게 됐다. 그래서 우리나라 연안 명씨의 조상은 바로 명옥진이다.


중경 대불사 오불전에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사람 얼굴을 조각한 진용조상(真容雕像)이다. 사자 위에 앉아서 매부리코 형상을 한 문수보살은 천완 황제 서수휘이며 코끼리 위에 앉아서 외눈박이 형상을 한 보현보살은 대하 황제 명옥진이다. 대불사 전각은 명나라 영락(永乐)제 재위 때인 1421년 처음 건축된 것인데 고증에 따르면 홍건군의 후손인 이름 모를 장인(匠人)이 비밀리에 조각한 것으로 추측되며 2011년에 명옥진의 부하장수이자 개국원훈인 만승의 후예가 발견했다. 6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백성을 위해 살다간 인물에 대한 염원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보다. 비록 돌 조각에 새겼어도 그냥 돌이 아닌 것이 역사이자 민란의 가치가 아닐까 싶다.


▲ 백년교 민란 주인공 명옥진은 요절했으며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애초의 상호불가침 약속을 배신하고 항복한 명씨 일가를 체포 후 고려로 추방한다. 사진은 주원장의 묘원이 있는 남경의 효릉 입구. ⓒ 최종명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는 백련교를 동경했다?


백련교도이자 홍건군의 중심인물을 보면 농민이거나 소작농, 어부나 뱃사공, 의술이나 법술로 먹고 살았거나 우여곡절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마치 <수호지>의 108 영웅들이 흉내 내고 있는 듯 모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으며 기층인민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사형 사제로 묶어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나 지혜를 짜내어 전투를 하는 장면은 어쩐지 <삼국지>를 닮았으며 현장 법사를 중심으로 구법 여행을 다녀오는 <서유기>는 백련교나 명교의 지향을 고스란히 담은 것으로 읽힌다.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에 대중들에게 널리 읽혔고 모두 오늘날 인기 절정의 고대소설은 대부분 백련교의 홍건군 민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다.


위 촉 오로 나누어 의리와 술수가 난무하는 소설, 협객들의 반정부 투쟁을 그린 소설, 악마와 사악한 신에 맞서 미륵을 찾아 떠나는 소설 모두 어쩌면 권력의 압제를 견디다 못해 울분을 토하고 싶은 마음을 긁어주며 용기까지 주었던 소설임에 틀림없다. 세심하게 원나라 말기 민란을 살펴보면 왜 소설이 현실처럼 보이고 또 현실이 소설보다 더 지독할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3대 소설을 만든 작가의 상상력은 작가만의 몫이 아닌 당시 백성들의 치열한 투쟁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