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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만큼이나 4권 <중국인이야기>를 읽으면 중국 방방곡곡을 땀내 닦으며 걷던 기억들로 설렌다. 장쉐량张学良의 고향 션양沈阳의 장솨이푸张帅府와 ‘시안西安사변’의 총탄 자국, 그의 첫 연금 현장이자 장제스蒋介石의 고향 시커우溪口의 미륵보살 성지, 대장정의 종착지 옌안延安의 동굴 집 야오둥窑洞, 베이징 마올후퉁帽儿胡同에 있는 마지막 황후 완룽婉容의 고거, 마지막 황제 푸이溥仪의 창춘长春 위만황궁伪满皇宫 박물관, 동북항일연군의 만주벌판까지. 옴니버스로 엮은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책 속에 담긴 ‘중국인’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넘어갈수록 그들이 밟고 있던 ‘역사’ 속으로 물밀 듯이 나가고 싶어진다. 나의 중국문화답사기의 단골 메뉴이기도 한 장쉐량과 푸이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이니 어찌 흥분하지 않겠는가?


쑹메이링宋美龄과 장쉐량의 인연은 1부 ‘풀리지 않는 삼각관계’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들의 정분이 ‘만리장성’을 쌓을 정도로 깊었는지 말해주지 않지만, 시안사변 이후 53년 동안의 연금생활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시안사변 1937년 한 달 후 황푸군관학교 출신 국민당 특무 다이리戴笠의 호송을 따라 ‘제일유금지第一幽禁地’ 쉐더우산雪窦山에 온 장쉐량은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낙차 171m의 천장암千丈岩 폭포를 즐겨 찾았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장쉐량과 감정이입을 하노라면 당대 최고의 미남이자 권력핵심의 정치인이 토해냈을 사자후獅子吼가 들리는 듯도 하다.


쉐더우산에는 늠름한 청년 장군 장쉐량 조각상과 함께 연금생활 도중 단 3일도 곁을 떠난 일 없던 자오이디赵一荻 여사의 백옥 같은 조각상도 자리를 잡고 있다. 1960년대 쑹메이링은 해금을 도울 목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한다. 처와 첩을 둔 장쉐량은 일부일처 제도와 해금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미국에 있는 본처에게 상황을 전달한다. 본처 위펑즈于凤至는 장쉐량과 자오이디의 ‘순수한 사랑을 믿으며 백년해로하길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이혼에 동의한다. 장쉐량은 기독교에 귀의했지만, 장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아들이자 총통이 된 장징궈蒋经国에게 ‘절대 불가’를 유언하기도 했다. 72년이라는 세월을 한결같았던 자오이디는 2000년, 장쉐량은 103세의 나이로 2001년 나란히 숨을 거두고 합장 됐다. 장쉐량을 평생 살펴준 쑹메이링도 2003년 천수를 누리고 그들 곁으로 떠났다.


그림1 쉐더우산 연금 장소에 있는 장쉐량과 자오이디 조각상


장쉐량만큼 삶의 우여곡절이 깊던 인물은 마지막 황제 푸이다. 3부 ‘무너지는 제국’에서 비록 수감 중이긴 했지만, 자신의 네 번째 부인 리위친李玉琴에 의해 이혼당하는 황제라는 오명을 얻는다. 진시황 이래 어느 황제도 이혼이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여전히 황제 대우를 받던 시기에도 푸이는 이혼당한 전례가 있다. 황후와 황비를 동시에 얻어 결혼한 푸이는 퇴위 후 1931년 8월 ‘마지막 황비’ 원슈文绣로부터 이혼선언을 당한다. 이를 역사에서 ‘도비혁명刀妃革命’이라 부르는데 황제 푸이의 엄청난 충격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혼에 이르게 된 까닭을 황후 완룽의 시기와 질투 때문으로 여긴 푸이는 크게 상심했다. 완룽은 허울뿐인 황후로 전락했고 우울증에 시달려 아편에 집착했으며 시위와의 불륜으로 임신까지 했으니 황실은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 아닐 수 없다. 1937년 푸이는 만주족 출신의 탄위링谭玉龄과 결혼해 그녀의 사진 뒷면에 ‘내가 가장 사랑한 위링’이라 손수 쓸 정도로 다정했지만 5년 만에 의문의 병사를 했다. 그리고 책에서 자세히 언급한 리위친과 결혼하게 되지만 1957년에 다시 이혼 소송으로 둘 사이의 관계도 끝나고 만다.


창춘의 위만황궁박물관에는 <황제에서 평민까지>라는 푸이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상설전시관이 있다. 그의 일생을 화려했지만 불우했고, 처량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말년을 보낸다. 체포 후 곧 죽을 목숨이라 생각했지만 15년의 수감 생활 후 수많은 반성과 신중국 지지 선언을 거쳐 감옥으로부터 풀려난 후 마지막 부인 리수센李淑贤과 결혼한다. 


둘 사이는 아주 금슬이 좋았지만, 푸이는 문화혁명 초기 홍위병들에게 고초를 겪기도 한다. 1967년에 결국 신장암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사망 후 유해는 베이징 인근 팔보산 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됐다가 1995년 청나라 서쪽 황릉 부근 사설 묘원인 화룽华龙능원에 이장된다. 3살에 황제가 되었지만, 자금성에서 쫓겨난 황제라는 숙명 때문이었으니 청나라 황실 능원인 동릉과 서릉 어디에도 안치되지 못했다. 


그림2 위만황궁박물관에서 본 황제 즉위 시절과 수감 후 재판 장면


마지막 황릉은 선통제 푸이가 아닌 광서제의 몫이다. 청나라는 재정문제로 갈수록 황릉의 규모가 축소됐는데도 광서제의 숭릉은 화려하고 거대하다. 숭릉에 서면 푸이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숭릉 뒤쪽 200m 지점에 잠들어 있는 푸이야말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20세기 <중국인이야기>의 한 장면이니 말이다.


김명호 저자의 <중국인이야기>를 4편까지 읽으면서 늘 ‘중국문화여행’의 발품을 떠나고 싶었다. 중국판 ‘아라비안나이트’는 밤을 새워 읽어야 하듯 우리는 ‘중국’도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살피듯 정치와 경제도 제대로 파악하는 길만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나라와 선의의 경쟁과 우호를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신드바드’가 모험을 떠났음직한 항구 과다르Gwadar는 중국이 40년 운영권을 보유했다. 국제정세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일대일로一帶一路, 신실크로드로 질주하는 중국을 이해하는 코드로 <중국인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중국’ 붐을 일으켜서 바르게 ‘중국인’을 읽어야 한다. 천일야화보다 더 기나긴 ‘차이니즈 나이트’가 또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