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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야기> 4편에는 신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참 많다. 김일성, 그의 할아버지 김보현, 협상 달인 강신태, 작곡가 정율성을 비롯 조선인과 동북왕 가오강 등 중국인들의 동북에서의 항전은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특히, 마오쩌둥이 장제스와 동북을 놓고 벌인 내전에서 북한의 지원은 탁월했다. 혼란기에 펼치는 전략가들의 시야는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말 타고날지도 모른다.


북한을 갈 수 없으니 백두산을 중심으로 두만강과 압록강 강변에 있는 중국 도시들을 가노라면 중국과 북한의 어제와 오늘, 미래 관계가 끊임없이 안개 속에 갇힌 듯한데 이 책에는 숨겨진 많은 해답이 있는 듯하다.


2007년 연길에서 새벽에 떠나 두만강 너머 함경북도 무산 시를 내려다 보며 지났고 백두산에서는 천지 너머를 보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단동에서는 유람선 타고 북녘 사람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눈빛을 교환하기도 했으며 집안에서는 강 너머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소리쳐 보기도 했고 60년대 김일성과 저우언라이의 담판으로 북한 영토가 된 강 중간의 조그마한 섬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저 다 중국 땅에서 바라본 북한일 뿐이었기에 ‘갈 수 없는 나라’의 그리움이었으리라.


연길에서 동북 만주를 달리며 끝없이 펼쳐진 벌판은 부러우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 옛날 말 달리던 북방민족의 얼이 숨쉬고 있고 항일전쟁용사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조국을 생각했던 곳이 아니던가? 발해 상경부 성터에서부터 신중국 이후 최초의 집단농장을 조선족이 일궜다는 화천에서는 민족향에서 만난 동포들과의 하룻밤도 너무 좋았던 시절이 그립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중국에서 바라본 무산


조중경계비 앞에서


백두산 입구


백두산 6월의 천지


만주벌판, 자무스 부근


압록강변 단둥


단둥 유람선 타고 바라본 북한 땅


여기서 중국인이야기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싶다.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성루에 올라 투박하고 알아듣기 힘든 호남사투리로 신중국을 선포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도를 수도로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마오쩌둥이 일본 패망 후 국민당과의 내전을 치를 때 승리를 확신하고 새로운 나라를 구상하면서 당연히 수도를 고민했을 것인데 그 최초의 구상은 북경이 수도가 아니었다.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하게 된 뒷배경 하나~


1948년 3월 당 중앙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동진해 산서 성을 해방한 후 건국 후 수도를 정하는 문제가 처음 거론됐으며 여러 번의 토의를 거친 후 수도 예정지로 고도 북경, 남경, 서안도 아닌 당시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하얼빈이 선정됐다. 린뱌오가 세계지도를 보는 것을 취미처럼 즐겼다지만 마오쩌둥도 중국지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도 중국지도 보는 거 좋아한다. 벽에 늘 걸어놓고 산다. 왜? 어딜 갈까 늘 발걸음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을 한 마리 수탉으로 비유하길 좋아했고 흑룡강 성은 한 마리 하늘을 선회하는 고니를 닮았으며 하얼빈은 새의 목구멍 위치에 해당한다고 자주 언급했다.


하얼빈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해방된 도시이기도 하고 소련의 지원을 얻어 안정적인 수도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당 중앙은 ‘특별시’ 수도로 하얼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당사에 기록돼 있다. 신중국 성립 후 무주공산에 가까운 동북의 자원 활용과 외교적인 측면을 고려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뜻밖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국민당이 미친 듯 동북으로 병력을 증파하고 교통로를 점령하자 상황이 급변했으며 다시는 당 중앙은 동북 거점 수도 구상을 논하지 않았다. 이후 낙양, 개봉 등을 포함해 수도를 고려하다가 최후에 북경(당시 북평)을 지목했다. 재미있는 것은 수도를 정하기 전 1949년 1월 동북국정치위원이던 왕자샹王稼祥과 나눈 이야기다.


마오의 “우린 곧 승리할 것인데 우리 정부는 수도를 어디로 하면 좋겠소? 당신 의견은 어떠오?”에 대한 왕의 긴 대답은 당시 그들의 고민과 함께 중국지도를 펼쳐놓고 생각해보게 한다. (지도를 펼쳐 보시라)


(이하 왕자샹의 말)


아주 중요한 문제네요. (엄숙한 말투로) 현재 국민당 수도 남경은 범과 호랑이의 자태를 지닌 호거용반虎踞龙盘의 요충지이지만, 역사적으로 역대 금릉(지금 남경) 왕조와 국민당 정부 모두 단명했습니다. 이런 숙명론적 역사인식을 믿지 않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남경은 동남부 해안과 너무 가깝고 향후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아주 큰 단점입니다. 남경으로 정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게 아닌 듯합니다.


서안의 단점은 너무 서쪽에 편중돼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중국의 강역은 진한시대나 수당시대가 아닙니다. 그때의 만리장성은 변경이었으나 지금은 중국의 중심지에 가로로 퍼져있습니다. 서안은 지리적으로 중심지로서의 장점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서안도 부적합합니다.


황하 연안의 개봉이나 낙양 등도 고도였지만 중원지방의 경제가 낙후돼 있고 이런 문제가 단기적으로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일 뿐 아니라 교통문제나 황하의 범람 등 문제로 인해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은 북평입니다. 북평은 해안지구에 위치하면서도 경제가 발달한 영역에 속하는데다 동북과 관내(산해관 안쪽)로 통하는 핵심적인 요로이기에 전략적으로 십분 중요하며 현재 중국의 혈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깝게는 소련과 몽골이 위치해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비록 바다와 가깝지만 발해는 중국의 내해에 해당하고 요녕과 산동 두 반도가 둘러싸고 있어서 전략적으로 봐도 비교적 안전합니다. 국제적으로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즉각적으로 수도에 충격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북평은 명청 제국의 수도이었기에 인민들도 마음 속으로 흔쾌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런 유리한 조건들을 생각해볼 때 수도는 당연히 북평으로 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오쩌둥은 거침 없는 양자샹의 의견을 듣고 난 후 몹시 기뻐하며 ‘일리 있어, 일리 있어. (有道理, 有道理)를 연발하며 한편으로 웃으며 한편으로 말했다.


“당신 분석이 내 생각과 딱 들어맞네, 우리 수도는 북평으로 정해야 할 것 같네. 장제스가 수도가 남경에 있는 까닭은 그의 기반이 절강의 자본가였기 때문이었다면 우리는 수도를 북평에 정하고 우리도 그 기반을 찾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광범위한 노동인민대중일 될 것이다.”


1949년 3월 중순 마오쩌둥과 당 중앙은 북평으로 들어섰고 9월 21일부터 거행된 신중국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회 전체회의에서 ‘신중국의 수도를 북평에 설치한다.’는 안건을 토의한 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당일 정식으로 북평을 북경으로 개명했다.


<중국인이야기> 4편의 뒷부분 북한 이야기를 읽고 동북 지방을 다닐 때 기억을 하다가,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생각하다가 공연히 ‘수도’ 이야기만 잔뜩 푼 듯하다.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하얼빈의 성소피아 성당 광장의 야경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난징의 부자묘 앞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카이펑의 청명상하원 모습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뤄양의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 앞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시안의 당장안성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마오쩌둥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