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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9] 계급모순과 민족의식 분출 명나라 민란 ②


환관 정치가 살아나고 9살 나이에 정통제가 황위에 오른 1439년 운남 서부 소수민족인 태족(傣族)의 터전 녹천(麓川) 지방에서 명나라 초기부터 군과 민을 관리 감독하던 선위사(宣慰司) 집안의 사임발(思任发)과 사기발(思机发) 부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명 조정은 10년 동안 4차례에 걸친 대규모 토벌을 단행했다. 수십만의 군사가 동원되고 엄청난 물량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토벌에 실패하고 봉록과 작위를 세습한다는 조건으로 맹약을 맺었다. 


왕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상호 협약은 토벌군의 동선이 길기도 했지만 녹천의 반란으로 인해 군사력을 귀주 부근으로 대거 동원하자 절강과 복건에서 군사력 공백을 틈타 민란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토벌군의 전진기지인 귀주 지방의 소수민족들도 지속적인 병역 동원과 가혹한 세금 수탈의 이중고를 참지 못하고 대규모 민란이 발생했고 북방에는 몽골계 오이라트 민족이 침입해 친정을 나온 황제가 생포되는 토목보의 참변까지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절강 출신의 광부 엽종유(叶宗留)는 수백 명과 함께 생업을 위해 복건 복안(福安)에 있는 광산촌으로 가서 채광을 하고 있었는데 1444년 9월 관군이 들이닥쳐 민간 채굴을 금지하고 체포하려 하자 저항하며 군인과 관리를 살해하고 복건과 절강 일대의 광부와 농민을 규합했다. 강서 출신의 소작농 등운(邓云)은 복건 사현(沙县, 현 삼명三明)으로 이주해 소작을 하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군 지주를 살해한 후 등무칠(邓茂七)로 개명하고 부랑배로 살았다. 


마침 엽종유의 광부 민란이 일어나 혼란한 시기였던 1447년이 되자 당시 세금 외에 추가로 명절마다 각종 닭, 오리, 생선, 육류를 바치는 관례인 '동생(冬牲)' 거부 운동을 주도하고 자신을 구금하러 온 관병을 살해하고 소작농을 규합했다. 엽종유는 대왕(大王)을, 등무칠은 산평왕(铲平王)을 각각 자칭하며 세력을 키우는 한편 서로 연합해 복건 일대와 강서, 절강, 광동까지 장악했다. 1499년 2월 등무칠은 관군이 보낸 내부 첩자의 참언을 믿고 공세를 취하다가 매복에 걸려 사망했지만 세금 거부운동과 소작농이 주도가 된 민란의 선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민족 대동단결로 한족 정권과 한판 붙자


▲ 명나라 초기 운남의 태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사진은 운남 곤명의 민족원에서 민속무용을 선보이는 장면. ⓒ 최종명


1449년부터 1461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귀주와 호남, 광서 지역에 거주하는 각 소수민족이 일제히 일어나 지속적인 민란을 일으킨 것은 명나라 중기의 일대 사건이었다. 녹천 반란으로 귀주 일대의 백성들은 오랜 징집과 세금 수탈로 고통 받고 있었는데 마침 만 여명에 달했던 관군이 운남 전쟁터로 떠난 1449년 3월 삼수(三穗)의 묘족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신속하게 사주부(思州府, 현 잠공岑巩)을 점령했으며 오개(五开, 현 여평黎平) 지방의 묘족도 청량(清浪, 현 장공 남부)과 진원(镇远)으로 진공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서쪽으로 영녕(永宁, 현 청융晴隆), 동쪽으로 호남 원주(沅州, 현 지강芷江), 북쪽으로 파주(播州, 현 준의遵义), 동남쪽으로 무강(武冈)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사는 각 민족들이 분연히 일어나 민란에 참가한 사람이 20만 명에 이르렀다. 


명 조정은 깜짝 놀라 광서와 귀주, 후광 등지의 관군을 대거 소집해 토벌을 시작했고 4월에는 녹천에 출병한 병부상서 왕기(王骥)가 급히 귀주로 회군해 합세했지만 워낙 숫자가 많은 민란군에게 계속 패전을 거듭했다. 끊임없이 관군을 급파했으며 9월에는 7만 명에 이르는 토벌군 연합군으로 동서 양쪽에서 공격해 왔다. 1450년 4월에 이르러 민란군은 안남(安南, 현 청륭晴隆)으로 진격했으며 5월부터 명나라 군사의 운남으로의 진군 통로인 수서(水西, 현 대방大方)와 귀주(贵州, 현 귀양贵阳)에 이르는 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관군이 증군되자 서서히 민란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1450년 7월이 되자 귀주 흥륭(兴隆, 현 황평黄平) 출신의 묘족 위동열(韦同烈)이 묘왕(苗王)이라 선포하고 묘족과 포의족(布依族) 등을 결집해 운남으로의 통로를 장악하고 있던 관군을 공격해 평월(平越, 현 복천福泉), 청평(清平, 현 개리凯里), 신여(新添, 현 귀정贵定)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여전히 관군의 수성이 강력해 대치국면이 점점 불리해져 갔다. 


1451년 1월 민란군은 호남 정현(靖县, 현 정주靖州)에서 토벌당해 3천여 명이 참수되고 6백여 명이 생포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판세가 민란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며 4월에는 동서 양쪽에서 공격해오는 토벌군에 맞섰으나 패배한 위동열 민란군은 향로산(香炉山)으로 은거했다. 


관군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는 가운데 내부 배신자에게 생포돼 북경으로 소환된 후 사형에 처해졌으며 민란군은 진압되고 소멸됐다. 그러나 7월에 귀주의 영현(今县, 현 보정普定)과 영녕을 비롯해 오개, 청량의 묘족이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며 호남, 광서 일대의 여러 민족도 동시에 호응하고 나서자 조정도 또 다시 토벌군을 급파했다. 1453년 3월 토벌군과 민란군 사이의 격전이 벌어진 후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한동안 조용하던 귀주가 폐위당했던 주원장의 서출 손자인 광통왕(广通王) 주휘잡(朱徽煠) 수하에 있던 동족 출신의 몽능(蒙能)이 광서 용승(龙胜)에서 봉기한 후 토벌군의 진압에도 굳건히 버티다가 1454년 9월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출해 귀주 동부 일대를 섭렵했다. 


1455년 11월에 이르러 몽왕(蒙王)을 자칭하며 묘족 3만여 명을 더 결집시킨 후 융리(隆里, 현 용리龙里)를 공격했다. 12월에는 평월(平越, 현 복천福泉) 출신의 왕아방(王阿榜), 묘금호(苗金虎) 등이 묘왕(苗王)을 자칭하고 봉기해 투쟁을 이어갔다. 봉기하고 토벌하고 전투를 벌리고 민란군이 소멸했다가 다시 일어나고 또 진압을 위해 관군이 등장하기를 반복했는데 역시 조정은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며 진압을 서둘렀다. 


녹천 반란의 진압에 참여했던 방영(方瑛)의 관군에 의해 1457년 4월에 몽능의 민란군을 비롯 각 민족 단위의 민란군이 참패해 수천 명의 수급이 참수되자 호남과 광서 지역의 묘족 민란군도 진퇴를 놓고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1458년 4월에는 귀주의 13개 부락 묘족 지도자들이 연합해 도균(都匀)을 공격하자 방영 장군이 귀주 서남부 관군을 동원해 토벌하자 1459년 4월까지 민란군 1만여 명이 참수당하고 6천여 명이 생포됐다. 이어서 귀주 일대의 모든 마을로 토벌이 이어졌으며 1460년 8월에 또다시 귀주 서부 서보(西堡, 현 육지六枝)에서 묘족의 봉기가 일어나 1461년 1월에서야 진압됐다. 


귀주와 호남 광서 일대의 소수민족들은 한족 정권 명나라의 횡포에 맞서 가열찬 투쟁을 이어왔는데 조정이 허약한 틈만 보이면 언제라도 봉기할 조짐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도 묘족, 동족, 포의족, 장족 등은 민족공동체라는 일심동체의 조직력을 기반으로 독립적인 왕을 자칭하며 민란의 깃발을 들었으며 1643년 이자성(李自成)의 민란에 호응해 호남에 전선을 형성하고 묘족의 강역을 선포하는 등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민족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 왕조가 건국했다고 해서 투쟁은 멈출 수 없었으며 19세기 말까지 늘 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중앙정부의 구심력이 미약해지면 호시탐탐 독립의 발톱을 드러내는 것이 소수민족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노상강도가 북경을 도모하다


▲ 동족 출신의 몽능은 봉기 후 동족과 묘족 연합군으로 귀주 동부 융리를 공격했다. 사진은 융리고성 입구. ⓒ 최종명


황제가 북방민족 오이라트에게 생포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않은 명나라 조정은 환관과 탐관에 의해 부패한 정치가 난무하고 토지겸병이 가속화돼 계급모순이 격화되고 있어서 각 지역의 농민봉기가 연면부단(连绵不断), 끊이지 않았다. 


특히 하북에 거주하는 농민들은 조정의 군마 수급정책인 비양마(备养马) 제도의 피해를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초기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에 하북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농민들에게 말을 길러 보급하는 마호(马户)의 의무를 부여했다. 마호로 지정되면 생각보다 훨씬 부담이 컸는데 농사 짓기에도 바쁜 와중에 기르던 말이 죽거나 종마 번식이 목표에 미치지 못할 경우 엄청난 배상을 치러야 했다. 씻겨 나간 듯 가진 것 하나 없는 일빈여세(一贫如洗)한 농민은 어쩔 수 없이 전답을 팔거나 아들 딸을 팔아버리는 매아육녀(卖儿鬻女)를 해서라도 충당해야 하니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회자되는 말로 '강남의 최대 화근은 양식이고, 하북의 최대 우환은 말이다.'는 말이 나돌 만큼 심각했으며 명 무종의 재위기간인 1508년 파산한 농민들이 노상 강도질을 하거나 관청과 부호의 집을 절도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유랑민들은 '모두 말을 하나씩 타고 말에 소리 나는 방울을 달고 화살 공격을 신호탄으로 타가겁사(打家劫舍)해 재물을 약탈하고 밤에도 수 백리를 내달리니 흩어지면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은 <명사기사본말>의 하소연이었으며 향마도(响马盗)라 부르며 관군들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 명나라 초기 하북 일대를 주름잡고 민란의 주체로 등장하는 노상강도는 대부분 말을 길러 조정에 공급하던 마호 출신이다. 사진은 하북 공중초원의 마부 대장으로 늙은 마호의 모습과 닮았다. ⓒ 최종명


말을 휘달리며 화살 공격까지 하는 노상강도가 하북 문안(文安) 관청까지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유육(刘六)과 유칠(刘七) 형제를 불러 도적을 잡는 일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했다. <명사>에 따르면 두 형제의 본명은 총(宠)과 신(晨)으로 둘 다 담력이 세고 용맹했으며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재주가 뛰어나 동네에서 꽤 유명했다. 두 형제는 동네의 소위 잘 나가는 장사들 34명을 모집해 강도 체포를 전담하면서 치안을 담당하는 소분대(小分队)를 조직해 문안 일대 3개 현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체포해 구금하고 완벽하게 치안을 유지하자 문안을 관장하는 패주(霸州)의 수장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이후 조정에도 알려져 큰 상을 받게 됐다.


당시 전권을 휘두르는 환관 유근(刘瑾)이 군정을 총괄하고 있었는데 그의 수하 양홍(梁洪)이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을 시기해 금은보석을 강탈하려 했으나 유육 형제는 엄중하게 거절했다. 소갈머리도 없이 야비한 양홍은 강탈에 실패하자 더욱 분노가 치밀었는지 자기 주인 유근에게 유육 형제가 사실상 패주 일대의 강도라고 무고했다. 유육 형제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피해 행방을 감췄는데 관군이 집을 불살라 태우고 처자식을 체포하자 두 형제는 막다른 골목에서 낙초위구(落草为寇)의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결국 장무(张茂)가 이끄는 무리에 들어가 스스로 향마도가 되고 말았다. 


노상강도가 수도 턱 밑에서 기승을 부리자 환관 유근은 감찰어사 영고(宁杲)를 파견해 하북 남부 일대의 소요사태를 진압하도록 했는데 고압적이고 잔혹한 방법으로 학살과 처형이 이뤄지자 민심은 가마솥의 개미처럼 소란스러웠다. 향마도 두령들이 속속 체포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장무까지 체포되자 유육과 유칠은 의지할 곳 없이 막막해졌으며 조정에 끈을 연결해 옛날 공적을 들먹여 귀순해 목숨을 연명하려 했으나 '헌금 만금을 내면 용서한다.'는 터무니없는 대답만 들었다. 


1510년 정세가 바뀌어 환관 유근이 모반죄로 사형에 처해진 후 조정이 자수를 허용한다는 조서가 반포되자 유씨 형제는 곧바로 관청으로 달려가 투항을 했다. 하지만 조정에 사면을 요청한 이후 강도를 잡고 치안을 유지하는데 협조하고 있을 때 사면령은 일망타진을 위한 야비한 계책인 것을 알게 됐다. 


허망하게 앉아서 죽을 수 없으며 퇴로도 막혔다고 판단해 관부의 친구 주량(朱谅)과 함께 패주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곧이어 안숙(安肃, 현 서수徐水) 감옥을 공격해 자기가 체포했던 향마도 두령 제언명(齐彦名)을 구출했다. 인근 지방의 조수(赵鐩)와 양호(杨虎)도 빈곤한 처지에 떨어진 농민을 규합해 봉기를 일으켜 합류하니 빠른 속도로 세력이 커졌다. 


유씨 형제의 민란에 참가한 농민들은 대부분 말을 길러 조정에 공급하던 마호 출신이 대부분이라 말을 질주하는데 밤낮도 없고 쏜 살처럼 재빨리 이동해 하북을 거쳐 산동으로 진격해 일조(日照), 곡부(曲阜), 태안(泰安) 등 20여 개 현을 순식간에 공략했다. 각 지역의 농민들은 없는 살림에도 양식과 마초(马草)를 공급해 민란에 적극 동조하니 세력은 점점 커져갔다. 지주와 관료는 살해하고 관청은 불사르고 병기 창고를 획득했으며 죄인들은 석방했으며 지속적으로 승리해나가며 '건국부현(建国扶贤)'의 구호를 내걸기 시작했다. 


하북과 하남을 정복하고 병마를 확충한 다음 남경을 점거해 나라를 세울 방침을 세웠다. 수재인 조수의 책략에 따라 민란군은 유씨 형제와 제언명이 인솔하는 동로군과 양호, 조수가 인솔하는 서로군으로 나누어 동로군은 산동 방향으로 남하했고 서로군은 하남을 거쳐 산서로 진격했다. 


동로군은 산동을 시작으로 하남과 호남, 광서로 진입한 후 강서를 거쳐 다시 북상해 직접 하북 패주를 공략했으며 서로군은 산서로 진입하고 다시 하북으로 진격해 문안을 공략한 후 두 군이 합동으로 수도를 향해 곧장 돌진했다. 명 조정은 1449년 오이라트가 북경 도성까지 침공해 오자 필사의 경사보위전(京师保卫战, 또는 북경보위전北京保卫战)을 펼친 이후 60여 년 만에 또다시 수도 북경에 계엄을 선포하고 황궁의 구문(九门)을 닫아거는 치욕을 당했다. 


통주(通州), 양향(良乡), 탁주(涿州) 등지의 근왕(勤王)에게 유씨 형제의 민란군이 수도 공격을 늦추도록 하북의 모든 현이 나설 것을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동시에 수도를 경비하는 정예부대를 출동시켰으며 남북 합동 공격으로 민란군을 토벌할 방침을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경 외곽의 요동(辽东), 하북 선부(宣府, 현 선화宣化), 산서 대동(大同), 섬서 연수(延绥, 현 부곡府谷)를 지키는 변방군까지 동원명령을 내렸다. 이때 수도로 이동했던 변방 부대를 외사가(外四家)라 부르며 향후 명나라 말기 변방 부대의 수도 진입의 시초가 됐다. 


유씨 형제의 민란군은 어사 육완(陆完)이 남북으로 협공을 펼치는 전술로 진격을 가로막고 공격해오자 하북 창주(沧州)로 공격 방향을 바꿨으며 함장산(陷长山, 현 무강武强)을 전전하다가 남쪽으로 철수해 하남까지 후퇴했다. 1512년 유씨 형제의 민란군은 육완의 토벌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형세가 불리해지자 호북 황주(黄州, 현 황강黄冈)에 이르러 명 조정이 집결시킨 10만 명의 토벌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때 유육은 투신자살했고 유칠과 제언명은 말을 버리고 배에 올라타고 장강을 따라 강소 통주(通州, 현 남통南通)까지 도주했다. 유칠은 화살을 막고 강물로 떨어져 죽었으며 제언명은 창을 맞고 사망했다. 


민란군의 전략가 조수는 민란 실패 후 머리를 깎고 승려로 변장한 후 회충(怀忠)이라 개명하고 도첩(度牒)을 품고 멀리 달아났는데 호북 강하(江夏, 현 무한武汉)의 한 주막에서 고기를 안주로 술을 마시다가 체포되고 말았는데 북경으로 압송돼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래도 분이 덜 풀린 황제 무종이 조수의 인두겁으로 말 안장을 만들었는데 조수가 민란 초기부터 황색 깃발에 새기고 달렸다는 글귀를 보노라면 황제의 이런 유치한 복수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용사 3천으로 곧장 수도를 점령한 후 제왕이 되어 새로운 하늘을 열리라! 

("虎贲三千,直抵幽燕之地;龙飞九五,重开混沌之天")


▲ 유육 유칠 형제의 민란군이 북경을 향해 진격하자 명나라 조정은 구문을 닫고 전 병력을 동원해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사진은 구문 중 하나인 정양문ⓒ 최종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