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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현장에서 다시 꺼낸 <,> (03)

 

경찰이 청와대를 차 벽으로 꽁꽁 에워싸고 있다. 백만 인파가 청와대로 가는 길을 향해 주말마다 진군나팔을 올리고 있지만 난공불락이다. 노동자, 농민, 학생, 시민단체 등 제각각 퇴진의 깃발을 향해 촛불이 환하게 빛을 내뿜고 있다. 대통령이 사는 곳은 황제가 거주하는 성처럼 철옹성이다. 민란의 역사는 물리력으로 성곽을 열어젖히기도 하고 민중의 힘에 놀라 황제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기도 한다. 민란의 성공은 수도를 점령하고 황제의 권위를 대신해 새로운 국가를 개창하는 일이다. 황제를 스스로 호칭하고 개국했지만 튼튼한 민심과 함께 하지 못하면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도 전에 멸망에 이르기도 한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수도를 함락했던 민란 영웅 황소(黄巢) 기억하자. 중원 땅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백만 대군의 신뢰를 한 몸에 받기는 쉽지 않다. 황소가 대군을 형성한 것은 드넓은 중국 땅을 주유하며 민란의 명분을 행동으로 설파했기 때문이다. 산동에서 발흥해 강남을 섭렵하고 복건과 광동 등 남방을 평정한 후 계림을 거쳐 북상해 중원을 초토화시켰고 수도 장안을 점령했다. 황소는 어떻게 민란의 영웅이 됐을까?

 

 

황소는 왕선지(王仙芝)가 일으킨 민란을 틈타 깃발을 들었다. 당나라 시대인 874, 왕선지는 가혹한 폭정과 잔혹한 세금 징수, 가뭄으로 인해 기아가 극도로 치닫자 3천 명의 농민을 이끌고 봉기를 주도했다. ‘천보평균대장군(天补平均大将军)’을 자칭한 왕선지는 세상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천하를 평균하려는 사상은 진승과 오광의 난이나 태평도의 민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낯선구호로서 만인 평등을 처음으로 제창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왕선지는 곧 전사하지만, 황소가 그 이념과 세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대규모 민란을 이어갔다.

 

염상(鹽商) 가정에서 태어난 황소는 승마와 활 솜씨가 뛰어났으며 필묵에도 도통했다. 송나라 역사가인 장단의(张端义)가 집필한 당송 시대 인물 기록인 <귀이집(贵耳集)>에 따르면 5세에 이미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거듭 낙방하고 수도 장안을 떠나며 비통한 시 한 편을 남겼다. <부제후부국(不第后赋菊)>이니 과거 낙방 후 자신의 마음을 국화에 빗댄 것이다. 이 시는 마치 그의 운명을 예언처럼 노래했다.

 

가을 오면 구월 파일 애써 기다리는데, 활짝 국화 피면 다른 꽃 모두 시드네.

눈부시도록 장안에 꽃 향기 자욱하니, 도성 천지가 황금 갑옷으로 물드네.

待到秋来九月我花开后百花杀冲天香尽带黄金甲

 

음력 9 9일 중양절은 가을 국화가 한창이며 성대한 축제 기간이다. 과거 급제에 대한 뜻을 이루지 못한 한탄을 국화만이 활짝 피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가는 존재라고 읊고 있다. 9일이 아닌 8일로 쓴 것은 태풍 전날의 고요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과 운을 맞춘 것이다.

 

국화 향기 만발한 도성으로 진군하는 황금 갑옷의 물결이 연상되는 영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황후화>로 소개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다. 원래 제목이 바로 도성 천지에 황금 갑옷으로 물드네라는 만성진대황금갑이다. 감독은 민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입성한 황소의 시에서 착안해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중국영화계의 배신자로 알려진 장 감독은 영리한 머리로 속에 담긴 메시지를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반란을 일으키면 모두 몰살당한다는 메시지가 피범벅처럼 화면에 난무한다. ‘혁명은 곧 죽음이자 몰락이라는 통치자의 이데올로기를 스크린에 담았다.

 

황소는 억울한 백성을 대신해 관리에 항의하는 등 의협심이 남달랐다. 관청을 상대로 무력행사를 하는 등 평소에 불만이 많았고 정의감도 강했다. 왕선지가 민란을 일으켜 고향으로 오자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웅변하니 수천 명이 동조했다. <신당서(新唐)>는 기아에 시달리던 농민이 수개월 만에 수만에 이르렀다.’고 했다.

 

신망이 두터웠고 지혜롭던 황소는 왕선지가 사망하자 명실상부한 대장군이 됐다. 878 3월 황소는 중원의 변주(汴州)와 송주(宋州)를 공략했다. 토벌군의 방어가 예상보다 강력하자 장강 일대를 거쳐 강남으로 전선을 이동했다. 강남 일대를 초토화하며 가렴주구 관리와 악질 지주를 공격해 민중의 고통을 풀어주었다. 해상 실크로드의 무역항 천주(泉州)에서 부르주아 부상(富商)을 대부분 도륙하고 복건의 중심 복주(福州)로 진입했다.

 

서쪽으로 진군해 광주(广州)를 공략했으며 계주(桂州)까지 손에 넣었다. 의군도통(义军)을 자칭하며 조정을 향해 간신과 중간상이 조공과 무역 기강을 망치고 있다는 신랄한 격문을 발표하는 등 정치적인 역량도 발휘했다. 당나라 최대의 무역항 광주에 거주하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은 조정의 쇠락을 틈타 공공연히 주민들을 핍박하고 살인 등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황소는 20만 명에 이르는 무슬림 반란군을 일거에 소탕하고 광주를 해방했다.

 

강남과 복건, 광동, 계주 일대를 종횡무진 진군한 황소는 남방에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고자 했다. 그런데 북방에서 함께 남진한 장수들과 민란 대오는 남방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북벌을 주창하는 장군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본격적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정은 황소의 대군이 북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둔병을 설치해 10만 군사를 주둔시켰다. 황소의 대군이 도달하자 토벌군 대장은 질겁을 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하루 만에 성을 열고 들어가 토벌군을 섬멸하니 10만 명의 피로 강물이 넘쳤다. 여세를 몰아 도주하는 토벌군을 쫓아 장강을 건넜다. 토벌군이 혼비백산 달아나자 황소는 강서와 안휘 일대 15개 주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880 11, 낙양유수는 저항을 포기하고 백관을 인솔해 황소를 영접했다. 절도사 고변(高騈)이 이끄는 토벌군은 민란 대군을 방어하거나 회유하려 했지만, 수도 장안으로의 진격을 조금 늦추게 할 뿐 무용지물이었다. 고변은 토벌이 목적이 아니라 토벌 이후의 전공에만 관심을 가졌기에 황소의 진격을 막기에 한계가 있었다. 고변의 추천을 받아 토벌군에 종사한 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을 기억나는 대목이다. 워낙 명문이라 황소가 읽다가 놀라 자빠졌다고 하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앞뒤 상황을 고려해보면 허무맹랑한 허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거짓 보고로 전공을 독차지하려던 고변의 지시로 황소가 장악한 지역마다 최치원의 격문을 뿌리고 다니며 헛소문을 퍼뜨렸을 뿐이다.

 

황소의 대군은 격문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눈 깜짝할 시간도 없었다. 12월에 드디어 수도 장안 근처 동관()과 화주()를 점령하니 당나라 황제 희종은 다급하게 사천 성도(成都)로 도주했다. 양귀비와 희희낙락하던 현종(玄宗)이 안사의 난으로 도피했던 전철을 밟은 것이다.

 

881 1월 황소는 과거에 낙방한 설움을 담은 시의 운명처럼 황금갑옷을 입고 장안으로 진입했다. 선봉장은 황소 왕이 백성을 위해 봉기했으며 당나라 이씨 정권과 달리 너희를 사랑하니 안심하고 두려워 말라고 진무했다. 100만 군대를 이끌고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으며 등장한 황소는 점령군으로서의 자비를 베풀었다. 수도를 점령한 후 국호를 대제(), 연호를 금통()이라 했다. 논공행상에 따라 장수들에게 벼슬을 책봉하는 등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지향했다.

 

황소는 성공적인 민란을 이루지 못했다. 수도 점령과 동시에 도주한 황제를 일망타진할 시간을 놓치고 황권이 재기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조정의 반격과 함께 황소 군대의 맹장 주온()이 대세를 저울질하다가 조정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회주의자 주온은 황제로부터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받고 토벌의 선봉장이 됐다. 게다가 서북방면 준가르 분지에서 세력을 키운 사타족(沙陀族) 이극용(李克用)이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를 구원하러 남하해 왔다. 대패 후 군량미 부족에 휩싸이며 후퇴한 황소는 살인마의 악명을 쓰고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배신자 주온은 23년 후 충성을 버리고 다시 주황(朱晃)이라 개명하고 양()나라를 건국해 오대십국 시대를 열었다.

 

 

이명박근혜정권은 서민의 피를 빠는 빨대와 같다. 복지는 간데없고 차별은 갈수록 극심하고 가난과 한탄은 점차 일반명사로 변해가고 있다. 당나라 때보다 더 악랄한 가렴주구가 판치고 있고 1% 재벌권력은 국가까지 농단하고 있다. 쌀 수매가와 최저임금은 농민과 노동자에게 상처 위 상처로 도지고 있다. 청년학생은 비전은커녕 매시간 아르바이트에 쫓기는 중이다. 썩은 하수구에 빠져서 악취만 풍기고 있는 국가권력은 세월호메르스로 점입가경이었으며 지진으로 하늘도 경고하고 있다고 믿는 지경에 이르렀다.

 

1938년 마오쩌둥은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라는 문건에서 황소 민란 실패를 빗대어 민란 주력이 근거지에서 인민과 호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인지 강조했다. 역사에 해박했던 마오쩌둥은 황소에게 일침을 가하는 교훈을 바탕으로 신중국을 건국했다. 근거지란 세력이자 명분이라는 점을 역사로부터 배운 민란 지도자 마오쩌둥은 성공했다.

 

우리가 마오쩌둥보다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황소의 민란을 통해 배우자. 마음속에 황금갑옷을 입고 진군나팔을 따라 청와대의 주인은 민중임을 분명하게 밝히자!



  • 민란에 관한 대 부분의 내용은 졸고인 <,>(2015, 썰물과 밀물)에서 인용하고 일부 내용을 고쳐서 기재한 것임을 밝힌다. ‘중국민중의 항쟁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은 중국 방방곡곡을 취재하면서 느낀 소회와 얻은 자료를 기초로 집필된 이야기 책이다민란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미래를 눈 여겨 볼 수 있는 잣대로서 읽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