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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가. 최근 중국사람들이 최근 개봉한 대작 영화들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말을 유행시키고 있다.


<써지에 色·戒)를 보고 나서 '여자를 못 믿겠고(女人不可靠)', <핑궈 苹果>를 보고 나서 '남자를 못 믿겠으며(男人不可靠)', ,<터우밍좡 投名状>을 보고 나서 '형제도 못 믿겠고(兄弟也不可靠)', <지지에하오 集结号>를 보고 나서 '조직조차도 못 믿겠다(组织更不可靠)'는 것이다.


'커카오(可靠)'는 '믿을 만하다'라는 뜻의 형용사로 앞에 부정의 뜻인 '부(不)'를 붙였으니 '믿을 만하지 못하다'이거나 '믿기 어렵다' '못 믿겠다'라는 정도의 뜻일 것이다. 이름하여 '부커카오(不可靠)' 현상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저 한번 웃고 넘어갈 일이면 그만이겠다. 하지만, 최근의 이런 다소 웃기는 코멘트는 일파만파로 인터넷에서 번져가고 있으니 아마도 중국 사회의 '불신'의 풍조를 은근히 내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색계(色·戒)>는 우리나에서도 개봉돼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지만 다른 영화들은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지 않았거나 개봉 예정이니 다소 이해가 되지 않을 지 모르겠다. 최근 중국에서 대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조소의 대상이 된 영화 4편을 한번 살펴볼까 한다.


여자를 믿지 마라 - 色·戒


워낙 잘 아는 영화라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원작은 여류소설가 짱아이링(张爱玲)이 1950년도에 쓴 단편소설이다. 중국 평론가들로부터 그녀의 소설 중 가장 구성이 잘 짜여있다는 평을 듣는 이 50년도 더 지난 소설을 리안(李安) 감독은 화려한 상상력을 발휘해 대박을 터뜨렸다.


2007년 재출판된 짱아이링의 단편집 <색계>


물론 그 영화 속에는 '여자를 믿지 마라'는 평판(?)을 가져다 줄 정도로 섹시한 여배우 탕웨이(汤唯)를 비롯해 왕차오웨이(梁朝伟)와 인기가수이기도 한 왕리홍(王力宏)까지 동원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상영된 이 영화는 1930~40년대 홍콩과 상하이를 배경으로 항일운동과 미인계를 접목한 영화이다 보니 아마도 '여자를 믿지 마라'고 했나 보다.


전 세계에 개봉되다 보니 그 포스터도 제각각이다. 윗쪽 왼편부터 시계방향으로 중국 본토와 대만, 프랑스, 미국, 터키 순이다.


남자를 믿지 마라 - 苹果


생기가 넘치는 현대 베이징을 배경으로 중국의 사회현실을 심도있게 그렸다는 평을 받고 있는 영화로 2007년 11월 개봉했다. 핑궈는 사과(apple)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는 <로스트 인 베이징>으로 번역됐다.


지방에서 베이징으로 온 젊고 예쁘게 생긴 안마사인 류핑궈(刘苹果)는 어느날 취중에 사장으로부터 겁탈을 당한다. 고층건물 유리 청소부이던 남편이 뜻하지 않게 이를 보게 됐고 격분했지만 오히려 직원들로부터 뭇매를 당한다. 그런데, 핑궈가 임신을 하자 남편은 사장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돈을 요구했고 마침 아이가 없던 사장과 그 부인은 동의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조건으로 거래를 하게 된다.



중국에서 미인 배우로 알려진 판빙빙(范冰冰)이 타이틀롤인 핑궈(苹果)를 열연했으며 남편 안쿤 역에는 <홍분세가(红粉世家)>로 인기를 끈 통따웨이(佟大为), 사장 역에는 역시 인기배우인 량지아후이(梁家辉)가 출연했다. 이 영화 역시 판빙빙의 과감한 노출 연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고 무삭제 버전이 인터넷에 확산되기도 했다.



2007년 <색계>와 <핑궈> 두 영화는 중국 최대의 화제작들이다. 노출 장면이 비교됐고 인기 측면에서도 그랬다. 공교롭게도 중국 영화팬들은 두 영화를 각각 '여자'와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코멘트로 각각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위 두 영화가 다소 여성 관객 취향의 영화라면 최근에 개봉된 두 영화인 <터우밍좡>과 <지지에하오>는 매우 남성 관객 취향 영화로서 모두 전쟁을 소재로 해 화제가 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에 대한 영화팬들의 반응 역시 '형제'와 '조직'을 믿을 수 없다는 씨니컬한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형제도 믿지 마라 - 投名状


중국의 4대 소설 중 하나인 <수호지>로부터 알려진 터우밍좡(投名状). 이 목숨을 담보로 한 계약을 모티브로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이 한창이던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 감독은 <첨밀밀(甜蜜蜜)>과 <루궈아이(如果爱)의 천커씬(陈可辛)이다.


제작비 400억원, 그 중 캐스팅 비용이 거의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화려하다. 동양 최고의 캐스팅 배우인 리렌지에(李连杰)을 비롯 류더화(刘德华), 진청우(金城武) 그리고 배우이면서 여성감독으로도 유명한 쉬징레이(徐静蕾)가 출연한다.



팡칭윈(庞青云, 이연걸)은 청나라 말기의 군관으로 전투에서 혼자 살아남은 후 도적이던 차오얼후(赵二虎, 유덕화)와 장우양(姜午阳, 금성무)와 터우밍좡(投名状)으로 의형제를 맺고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전쟁에 참가한다. 쑤저우(?州)와 난징(南京)을 공략해 성을 탈환한 후 팡칭윈은 서태후로부터 공로를 인정 받게 된다.


차오얼후의 정인이던 리엔셩(莲生, 서정뢰)은 팡칭윈과도 사랑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장우양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실제로는 팡칭윈을 시기한 권력층이 세 형제를 이반하고 출세를 위해 팡칭윈은 차오얼후를 죽이게 된다. 지방행정관인 장쑤쉰푸(江苏巡抚)를 봉하는 축포를 쏘는 와중에서 장우양은 '형제가 내 형제를 죽인 자를 반드시 죽인다'(兄弟杀我兄弟者,必杀之)는 '터우밍좡'을 외치며 팡칭윈을 죽이려 한다. 축포와 함께 팡칭원은 보이지 않는 자객의 총탄을 맞게 되고 동시에 장우양의 칼을 맞고 죽게 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사실 청나라 말기 4대 불가사의 사건이라 일컫는 '츠마(刺马)' 사건의 실제 인물인 마신이(马新贻)를 중심에 놓고 있다. 그를 살해한 장문양(张汶祥)을 의형제로 설정한 것은 영화적이다. 또한, '태평천국의 난'을 통해 이홍장(李鸿章)의 쑤저우 성 및 증국번(曾国藩)의 동생인 증국전(曾国荃)의 난징 성 공략을 차용하기도 했다.


하여간, 천커씬 감독의 <터우밍좡>은 새해 첫 주에 퍄오팡(票房) 누계기록으로 2억6천만위엔(약330억원)을 넘어섰다. (중국은 관객 수가 아닌 표 판매 액수로 집계한다) 이 기록은 <색계>의 아시아 기록인 2억5천만 위엔을 넘어선 기록이다. 개봉한 지 2주 만에 기록 갱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될 예정이라 하는데, 흥행이 예상된다. 영화를 본 느낌은 개인적으로 대작이라 했던 짱이머우(张艺谋)의 <황진지아(黄金甲)>에 비해 훨씬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작품이라 생각이 든다.


'형제를 믿지 마라'는 중국 영화팬들의 코멘트가 오히려 약간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고 현 사회의 세태를 은근히 조소하는 듯하기도 하다.


조직조차도 믿지 마라 - 集结号


지난 연말(12.24) 베이징칭녠빠오(北京青年报)는 <터우밍좡>과 <지지에하오> 두 영화를 비교하며 격렬한 승부(短兵相接)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지에하오> 개봉 첫날 1500만위엔(약 28억원)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최근 2억위엔(약 500억원)을 넘었으며 최대 7억위엔(약900억원)까지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2003년 <셔우지(手机)>, 2005년 <천하무적(天下无?)>, 2006년 <야연(夜宴)>의 감독인 펑샤오깡(冯小刚)의 2007년 최신작이다.



<지지에하오>는 '집결 명령' 즉 퇴각 명령을 기다리는 한 부대의 고립된 상황을 통해 인간의 고뇌와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영화이다. 중국 영화들이 대체로 캐스팅으로 승부를 거는 경향인데 비해 조연 및 신입급 배우들을 동원해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출해내고 있다. 중국 언론이 평가하듯 '한 명의 대스타도 없이' '상영 후 지금까지 3주에 이르렀으며' '적수가 없을 정도로 그 호응이 대단'하다.


 

펑샤오깡 감독의 <천하무적>과 <셔우지>에서 조연급 '파오룽타오'(跑龙套, 단역)으로 출연했던 짱한위(张涵予)는 포스터에서 보듯 '룽위'(荣誉 영예)와 "쉬엔밍'(悬命, 생명집착)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부대장 꾸즈띠(谷子地) 역으로 호평을 받았다.


덩차오(邓超)는 젊은 군관이며 애국군인 캐릭터인 차오얼떠우(赵二斗)를 연기했는데 그 역시 <소년천자(少年天子)>와 같은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영화에는 처음 출연했다.


전쟁 경험이 많은 부대의 지도원으로 꾸즈띠와 의견이 서로 엇갈려 진공하다가 적의 매복으로 장렬히 전사하는 역할을 한 런취엔(任泉)은 드라마 <샤오리페이다오(小李飞刀)>와 <소년포청천(少年包青天)> 등에서 열연한 조연급 배우이다.


지극히 평범한 성품이나 전쟁과 죽음의 공포에 괴로워하지만 부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 삶을 마감하는 역할을 하는 후보 지도원(指导员)인 왕진춘(王金存) 역할은 위엔원캉(袁文康)이 맡아 그동안의 무명 생활을 벗게 됐다.


낙관적이고 유머러스한 폭파수인 뤼콴거우(吕宽沟) 역은 리나이원(李乃文)은 <사랑의 치아(爱情的牙齿)>에서 주목 받은 배우이다.


부대장 꾸즈띠의 보좌역으로 성격이 불 같으면서도 부대원들을 잘 이해해주는 쟈오따펑(焦大鹏) 역을 맡은 랴오판(廖凡)은 드라마 <비에러,원꺼화(别了, 温哥华)>에서 조연으로 겨우 이름을 알리는 정도였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염원을 어눌한 말투에 담은 저격수 역의 쟝마오차이(姜茂财)는 드라마 <안쑤안(暗算)>과 영화 <천하무적>의 조연급 배우 왕빠오치앙(王宝强)이 맡았다.


영화 내에서 가장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물로 등장해 최후의 7인이 생존했을 때 선의의 거짓말로 이미 '퇴각명령'이 울렸다고 한 라오츠웨이(老刺猬, 고슴도치) 역에는 차오샤오캉(赵少康)이 맡았다.


탕옌(汤嬿)은 전쟁의 상흔을 더욱 깊게 하는 역할로 등장하는데 꾸즈띠는 그녀를 차오얼떠우에게 소개하게 되는데 시골처녀 역할을 잘 소화한 여배우는 쑨꾸이친(孙桂琴)으로 그녀를 캐스팅한 펑샤오깡 감독은 그녀의 자연스런 연기를 높이 샀다고 한다.


꾸이즈띠에게 저격 작전을 명령하고 동시에 퇴각 명령, 즉 '지지에하오'를 내리겠다고 약속하는 단장인 류저쉐이(刘泽水) 역에는 드라마 <천룡팔부>에서 챠오펑(乔峰) 역으로 유명한 후쥔(胡军)이 출연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양진위엔(杨金远)의  <관쓰(官司)>다. '관쓰'는 '소송'(lawsuit)을 뜻하는 말이다. 중국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결국 '지지에하오'로 인해 자기의 부대원 46명을 모두 잃은 부대장 꾸즈띠는 부대원들이 실종처리된 사실을 알고 결국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한다.


전쟁의 상처, 그 속에 담긴 휴머니즘이야말로 영화의 오래된 주제가 아닐까. 다만, 중국영화의 수준이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예술적으로 훨씬 향상된 수준으로 발전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조만간 우리나라에도 개봉될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 지금 중국은 온통 두 영화 <터우밍좡>과 <지지에하오>의 대결이 초미의 관심사이다. 무려 400억원의 제작비, 화려한 캐스팅으로 주목 받고 있는 <터우밍좡>인가, 1/4의 제작비와 무명 캐스팅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지지에하오>인가.


작년 하반기 <색계>와 <핑궈>가 '섹스어필'로 온통 주목을 받았는데, 그래서 영화를 본 중국인들은 '여자'도 '남자'도 믿지 말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했다면, 올해 초부터 중국 영화 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두 편의 영화는 전쟁을 소재로 원대한 스케일과 남성 취향으로 '형제도' '조직도' 믿지 말라는 우스개 소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자', '남자', '형제', '조직'을 못 믿겠다는 것이 과연 흥행 영화에 대한 냉소일 뿐일까. 빠른 성장과 분배의 불균형 속에서 갈수록 서민생활이 어려워지는데, 한쪽에서는 '포르노'에 육박하는 영화가 스크린에 걸리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수백억대의 제작비가 투자된 대작 영화가 출연하는 것을 은근히 비꼬는 것은 아닐까.


이렇듯 최근 영화에 대한 시니컬한 평가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최근에 개봉한 저우씽츠(周星驰) 주연의 <장강7호(长江7号)>에 이르러 이제는 '지구인도 못 믿겠다'로 번지고 있으며 <밍윈후자오촨이(命运呼叫转移)>라는 영화에 대해서는 역설적으로 '중국이동통신이야말로 가장 믿을 만하다'고 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신문이나 방송, 인터넷 매체들도 온통 이러한 '부커카오(不可靠)' 현상을 기사화하고 있다. '징화스빠오'(京华时报), '파즈완빠오'(法制晚报), 신민완빠오(新民晚报) 등을 비롯 각 지방 성 단위 신문들도 이를 보도하고 있다.


광둥지역 유력 언론인 진양왕(金羊网)은 2007년 12월 27일자 '연말 대작영화 약간 냉냉하다(年底大片有点“冷”)를 제하의 기사에서 이런 '부커카오' 현상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주류영화는 당연히 주류의 가치를 담아야 하는데 최근 중국 영화는 과도하게 기술적 일면만을 중시하고 있으며 도덕적인 방향은 소홀히 하고 있다" (主流电影还是应该表现主流价值,而现在的中国电影过多地注重了技术的一面,忽视了道德取向)고 꼬집고 있다.  


그래서일까. 관객들은 더욱 재미있게 중국의 주류영화들을 꼬집으려 하는 것인가. 4편의 영화를 봤음직한 팬들은 <색계>에는 '적의 여자와 놀지 마라‘, <핑궈>에는 '사장의 여자와 놀지 마라' <터우밍좡>에는 '형제의 여자와 놀지 마라', <지지에하오>에는 '여자가 없으니 더 이상 놀지 마라'라는 꼬리표를 하나씩 또 붙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