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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39 저장1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서관에 잠입한 책 도둑



저장 성은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와 월나라가 영토 분쟁을 하던 곳이며 삼국시대 손권 정권의 기반이었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지금처럼 성의 경계가 만들어졌으며 청나라 강희제에 이르러 저장 성이 됐다.


저장은 신안장(新安江)과 쳰탕장(錢塘江)을 비롯 많은 강들이 구비구비 흘러가는 지리적 특성에 빗대어 지어진 이름으로 약칭으로 저(浙)라고 한다.


수나라 때 지명인 위항(余杭)의 이름을 딴 항저우는 남송의 수도이었으며 중국 어느 곳보다 애향심이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호수인 시후(西湖)가 있으며 샤오싱은 중국 20세기 초 민족주의자이며 문학가인 루쉰이 태어난 고향이다.


저장상인들은 수완이 뛰어난데 특히 ‘돈이 있는 곳에 반드시 있다’는 원저우 상인과 ‘사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간다’는 닝보 상인이 유명하다.


저장 성의 이름난 도시들인 항저우, 샤오싱, 원저우, 닝보로 떠나보자.


1) 닝보 寧波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된 도서관에 잠입한 책 도둑


저장 성 동쪽 도시 닝보에 있는 톈이거(天一閣)를 찾았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설도서관이라니 궁금했다. 마침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고 있다. 위에후(月湖) 위로 작은 점처럼 빗물이 쏟아지고 있다.


호반 길을 따라 골목을 들어서니 3층 높이는 돼 보이는 담벼락이 나타났다. 담까지 닿을 정도로 키 큰 나무들이 많다. 몇 집 건너 하나씩 마름모꼴 2개가 서로 붙은 모습, 마치 중위 계급장처럼 생긴 현판에 각각 천(天)과 일(一)이라고 써 있는 것이 재미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사설도서관이라는 남국서청(南國書城) 톈이거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가로세로 5미터의 장방형 마당에 명나라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을 역임한 범흠(范欽, 1506-1585)의 동상이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수집하는 것을 즐겨 책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도 마다 않고 두루 찾아 다녔다.


책 모양의 돌에 그의 생애가 기록돼 있으며 푸른 나무들이 동상을 보필하듯 안으로 기울어져 있다. 벽에는 말 8마리가 계곡과 산에서 뛰어 노는 <계산일마도(溪山逸馬圖)>가 새겨져 있어 분위기 있는 앙상블이다. 물이 고여 있고 붉은 낙엽이 소복하게 떨어져 있으니 아주 멋지다.


1566년 6년의 공사 끝에 도서관을 건축했다. 범흠이 책을 읽던 동명초당(東明草堂) 안에는 책장마다 책들이 꽂혀 있고 걸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맞은 쪽 벽에는 전설 속의 영물인 용과 기린(麒麟)을 섞은 듯한 동물이 각인돼 있는데 용이라 하기에는 묵직하고 기린이라 하기에는 날렵해 보인다.


초당 옆에는 범흠 후예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고거가 있다. 장서 도서관과 떨어져 공간을 분리한 것은 그만큼 책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범흠 집안은 대대로 장서를 잘 관리하라는 유언에 따라 진정으로 책에 애정을 가진 후손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텐이거 바오슈러우(왼쪽), '남국서성' 입구(오른쪽 위), 범흠(오른쪽 가운데), 도서관 자리(오른쪽 아래)


장서를 보관하던 바오슈러우(寶書樓)에도 책장이 놓여 있는데 금빛으로 쓴 글자 아래에 있는 책장은 자물쇠가 잠겨 있고 두 마리의 금빛 용이 불타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범흠의 저택이 쓰마디(司馬第)인 것은 병부우시랑보다 더 높은 사마 벼슬인 병부상서(兵部尚書)로 추증(追贈)됐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만들어진 후 외부에 일체 공개하지 않던 범씨 후손들은 청나라 초기에 사상가이자 학자인 황종희(黃宗羲)에게 장서를 개방한다. 이를 계기로 유명해지자 건륭제는 중국 문헌 총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한 후 톈이거의 구조를 따라서 국가도서관을 만들어 보관했다.


뒷마당 정원에는 연못이 있다. 비가 내려 진흙탕처럼 혼탁해 보이지만 주위로 물푸레나무가 생생하게 뿌리박고 있다. 장서각을 지하에 만들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의지가 엿보인다.


톈이거의 ‘천일(天一)’은 <역경(易經)>에 나오는 “천일생수(天一生水)”에서 따왔다고 한다. ‘우주는 물로부터 생겨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범흠에게는 화재로부터 책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리라. 불에 타는 것만 아니라면 누가 가지고 있던 지 남아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톈이거는 건륭제의 인정을 받아 가문의 영광이 됐지만 신해혁명 이후 상인과 결탁한 한 도둑에 의해 불명예를 안게 된다. 상하이의 책방 주인들이 대도 쉬에지웨이(薛繼渭)에게 도서목록을 적어주고 책을 훔쳐오라고 했다. 몰래 잠입해 낮에는 죽은 듯 잠을 자고 밤이 되면 촛불을 켜고 목록에 있는 책을 수색했으며 배가 고프면 대추로 허기를 채우며 거의 반달이나 시간을 보냈다.


여러 차례에 걸쳐 훔친 책이 무려 6만권이나 된다고 한다. 책 도둑은 결국 9년 형을 선고 받고 옥사한다. 돈에 광분한 상인과 단순 무식한 도둑이 연상된다. 중국정부가 거액을 들여 회수한 후 상하이의 동방도서관(東方圖書館)에 보관했으나 일본군이 침입해 잿더미로 변했다.


세상 만물이 물로부터 태어났으니 책 역시 그럴 것이다. 도서관 이름으로 정말 제 격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도둑과 제국주의자들에게 잃어버렸지만 책이 간직한 정신까지 훔쳐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톈이거를 찾아 비 속에서 책에 대해 생각해본 시간이었다.


2) 닝보 寧波 중국 일본 영국 대표와 함께 마작 대결이나 할까


닝보 톈이거 안에 진씨(秦氏) 집안의 사당이 한 채 있다. 1925년 닝보의 금융거부이던 친지한(秦際瀚)이 세운 것이다. 거부의 집에 걸맞게 벽과 대청, 무대, 누각, 그리고 곁채로 구성된 우아한 목조건물이다.


무대 난간과 처마에는 금빛으로 된 조각과 그림이 아로새겨져 있으니 무대공연을 보면서 여유 자작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집 내부는 문턱을 넘을 때마다 둥근 원형의 칸막이가 동선을 열어주고 있으며 화분과 책장이 가지런하다. 기하학적인 무늬를 지닌 창살이 햇살을 가르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책과 돈의 연결이 조금 낯설었는데 또 하나 재미난 곳이 나타났다. 바로 마작(麻將)박물관이다. 마작의 표준을 정하고 널리 보급했던 진정약(陳政鑰)을 모시는 사당이기도 하다. 그가 마작을 발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 수 천년 전부터 있어 왔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도 나오니 과장이며 지방마다 서로 다른 복잡한 규칙을 하나로 통일해 전국적으로 보급한 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닝보 사람으로 청나라 말기 영국 외교관들에게 마작을 알려주고 함께 즐기기도 했다. 닝보는 영국과의 아편전쟁 후 맺은 난징조약(1842년)으로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한 다섯 도시 중 하나다.


마작은 놀이할 때 쓰는 말이나 방법이 새를 잡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성패(成牌)가 되는 것을 ‘후(糊)’라고 하는데 새를 잡아서 기른 매인 ‘후(鶻)’와 발음이 같다. 부딪친다는 ‘펑(碰)’, 먹는다는 ‘츠(吃)’도 다 그렇다. 그는 동서남북의 풍패(風牌)와 춘하추동 및 매난국죽의 화패(花牌) 등을 정리해 현대 마작의 136개 패로 정착시켰다.


어느 날 골패로 놀이를 하던 중 생겨난 패의 모습을 마작(麻雀)이라 썼는데 이 글자의 닝보 방언이 ‘마장(麻將)’이다. 중국에서는 마작을 마장이라 하는 이유다. 일본으로 건너간 ‘마작’이 다시 우리나라로 옮겨와 우리는 마작이라고 부른다.


대낮에 내리는 빗물 사이로 홍등이 무심하게 걸려 있다. 핑허탕(平和堂)에는 매란국죽 패가 걸려 있고 중국, 일본 사람과 아마도 영국 사람으로 보이는 서양인이 마작을 하는 모형이 있다.


금융거부의 무대(왼쪽 위), 마작 판(왼쪽 아래), 마작 박물관의 핑허탕(오른쪽)


이 조각상을 싼취에이(三缺一)라고 부른다. 원래는 4명이 함께 마작 하던 일을 3명만 있고 1명이 모자란다(缺)는 뜻. 마작은 4명이 되어야 성원이 되는데 3명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자만 있는 빈자리가 있다.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누구라도 빈 곳에 앉아 마작을 같이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마당에는 대리석으로 위에 마작 패가 새겨져 있다. 젠파이(箭牌)라는 중(中), 파(發), 바이(白)가 있는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들다. 옛날에 어부는 동서남북 방향이 중요하고 상인은 춘하추동이 중요할 뿐 아니라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해 ‘돈을 번다’는 파차이(發財)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더허탕(德和堂)은 세계 각국의 마작 패 전시관이다. 대나무, 뼈, 돌, 흙으로 만든 다양한 모양의 패들이 진열돼 있다. 유리 속에 나라별 패의 형태를 볼 수 있으며 소재에 서로 따른 패들도 보이는데 중국어와 영어, 일본어로 설명돼 있다.


마작을 더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를 가지고 하는 훌라라는 게임과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다. 길거리마다 중국 사람들이 마작을 하고 있을 때 다가가서 몇 번 봤지만 초보 수준인데다가 볼수록 어렵다. 중국 친구들이랑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시간이 넉넉하고 마작 노는 방법을 안다면 비 맞지 않고 차라리 저 3사람과 함께 빈 자리에 앉아 마작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3) 샤오싱 紹興 루쉰의 책갈피를 보니 고개가 숙연해진다


저장성 샤오싱은 민족주의자이자 문학가인 루쉰(魯迅)의 고향이다. 담벼락에 왼손에 들고 있는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나는 모습의 루쉰(1881~1936)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여느 다른 곳의 휘황찬란한 모습과 달리 흑백 판화 같은 분위기가 대문호의 고향답다.


원래 루쉰의 이름은 저우장셔우(周樟壽)이고 나중에 다시 저우슈런(周樹人)으로 개명했다. 1919년 5·4운동 이후 작품활동을 하면서 어머니의 성을 따서 루쉰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먼저 초입에 있는 조거(祖居)를 찾았다. 한림원에서 공직 생활을 한 할아버지 주복청(周福清)이 살던 집으로 한림(翰林)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문을 지나면 더셔우탕(德壽堂)이 나온다. 손님을 접객하는 대청으로 나란히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원래는 닝셔우탕(甯壽堂)이었는데 청나라 도광제가 연호를 민닝(旻甯)이라 하자 곧바로 바꾼 것이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던 샹훠탕(香火堂)이 나온다. 청색 기와와 흰색 담장 색깔이 고풍스러운데 보슬비가 내리니 운치가 그윽하다. 예법을 중시하는 곳인지 모르는 한 꼬마아이가 우산을 들고 장난을 치고 있다.


가운데에 할아버지 초상화가 있고 양 옆에는 두 명의 할머니인 손(孫)씨와 장(蔣)씨가 앉아있다. 덕행과 행운이 오래가라는 뜻의 덕지영형(德祉永馨) 편액이 있고 가훈인 항훈(恒訓)도 보인다. 배움을 통해 관인의 길을 걷거나 삶 속에서 지식을 쌓으라는 뜻이니 학자 집안답게 적절하고도 간명하다.


긴 복도를 따라 침실과 서화실도 있고 규방도 있습니다. 침실 외에도 수를 놓는 수방과 악기를 연주하는 금실도 있다. 실제 모형의 아가씨가 전통 옷을 입고 연주하고 있다. 넓은 주방에는 갖가지 도구들이 많이 전시돼 있다. 큼직한 아궁이와 항아리로 봐서 식구가 꽤 많았던가 보다.


밖으로 나와 루쉰이 살던 집(魯迅故居)으로 갔다. 할아버지 집 서쪽에 있는 집을 사서 건축했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두 집은 구조가 엇비슷하다.


여섯 친족들이 함께 모여 살았는데 루쉰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입구에 들어서니 4미터 정도 너비로 미로 같은 길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당시 사용하던 우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그 모습이 구멍이 뚫린 주사위 모양 같다.


복도를 따라 나오니 '한여소게(閑余小憩)'라고 새겨진 연못이 나타났다. 산뜻한 예서체로 조그맣게 적혀 있는데 앞에는 연못이고 주위는 나무들로 무성하다. 사각형으로 된 연못에 나무들과 햇살이 반사돼 비치며 그 위로 떨어진 낙엽들이 빗물에 젖는다.


넝쿨이 엉켜 붙은 담벼락이 멋진 정원이 펼쳐졌다. 루쉰이 어린 시절 뛰어 놀던 정원인 바이차오위엔(百草園)이다. 장자였던 아버지 주백의(周伯宜)와 어머니 노서(魯瑞) 사이에서 태어난 루쉰은 할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부유했다. 수재였던 아버지가 번번이 시험에 낙방하자 관원에게 손을 쓰다가 들통 나 할아버지는 투옥되고 아버지는 병으로 사망하니 급기야 가세가 기울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쉰은 여름에는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피했고 겨울이면 눈밭에서 새를 잡기도 했다. 귀뚜라미도 잡고 뽕나무오디를 캐고 복분자를 따고 하수오(何首烏)를 뽑고 놀았다고 회고한다.


루쉰은 회고에서 바이차오위엔에서 놀다가 삼미서옥(三味書屋)으로 공부하러 가는 길을 회고하기도 했다. 거리로 나와 길 옆에 졸졸 흐르는 개천에 돌다리가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검은색이 변색돼 대나무 색깔이 드러나는 문이 나타난다.


돌 위에 쓰는 붓글씨(왼쪽), 루쉰(오른쪽 위), 삼미서옥(오른쪽 가운데), 책갈피(오른쪽 아래)


대문을 지나니 대청인 쓰런탕(思仁堂)이 나오고 복도 앞에 높은 담장 벽이 나타난다. 담장 사이로 난 문을 따라 들어가니 별채가 하나 나오는데 한가운데 삼미서옥 편액이 보인다. 훈장이던 수경오(壽鏡吾, 1849-1930) 선생의 초상화가 놓여 있고 그 아래 책상과 걸상 하나가 놓여있다. 왼쪽 구석에 루쉰이 앉았던 자리가 있다.


서옥 안에 종지와 붓이 있고 평평한 마당벽돌(地坪磚)이 자리잡고 있다. 학생들에게 이 장치를 이용해 글 쓰는 서법을 익히도록 훈련시켰다고 한다. 엄하기로 유명했던 이 사숙에서 루쉰은 학문을 익혔다.


루쉰이 책을 읽을 때 스스로 만들었다는 싼다오슈쳰(三到書簽)가 인상적이다. 세 손가락처럼 생긴 이 책갈피는 손가락마다 '책 읽을 때는 마음과 눈과 입이 닿아야 한다(讀書三到心到眼到口到)'는 글씨가 써 있다. 송나라 학자 주희(朱熹)가 <훈학재규(訓學齋規)>라는 책에서 쓴 말이다.


루쉰이 살던 집과 공부하던 사숙을 두루 살펴봤다. 20세기 초 문학을 무기로 민족의 계몽과 혁명을 꿈 꾸던 루쉰의 향기를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책을 읽고 붓글씨를 쓰는 어린 루쉰을 마음에 담는 시간이었다.


4) 샤오싱 绍兴 딸 때문에 빚은 술이 천지를 진동한다


샤오싱 루쉰 고거 뒤편에 있는 비샤펑징위엔(筆下風情園)으로 갔다. 물 위에 마련된 누각 두 개가 나란히 서서 물 속으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하늘이 비친 연못으로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니 마치 하늘을 향해 비가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수상무대 뒤편에 야릇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박혀있다. 뒤로는 반듯한 원형 문이 있고 반려(磐廬)라는 글자가 써 있다. '너럭바위'와 '오두막집'이라는 뜻인데 아주 어려운 한자다.


훈슈팅(婚俗廳)에는 결혼풍습 모형이 전시돼 있고 옆 건물로 들어서니 뉘쥬(女酒)와 뉘얼쥬(女兒酒)라는 팻말이 보인다. 꽃을 새긴 화댜오쥬(花雕酒)라고도 부르는 황쥬(黃酒)를 말한다. 샤오싱을 대표하는 술로 딸이라는 뜻의 뉘얼이 붙은 유래가 재미있다.


옛날에 재봉사가 있었는데 아들을 낳으면 지인들과 축하하려고 항아리에 술을 담근다. 공교롭게 딸이 태어나자 실망한 재봉사는 계수나무 밑에 항아리를 묻어버린다. 총명한 딸은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재봉기술을 배우는데 기술이 빼어나 날로 번창한다.


드디어 이 신통한 딸이 자신의 제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날 그 동안 까맣게 잊었던 항아리가 생각난다. 술을 퍼내 접대하니 술 빛깔이 짙고 향기가 코를 찌르며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그래서 이 술을 뉘얼홍(女兒紅) 또는 뉘얼쥬라 불렀다. 이것이 소문이 나 너도나도 딸을 낳으면 술을 담그게 됐는데 바로 황쥬인 것이다.


전시된 화병이 너무 예쁘다. 알록달록한 문양이 정말 중국스럽기도 하거니와 그 색깔도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보기 좋다. 맛 좋은 술이 멋진 술병에 담긴다면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이다. 황쥬야말로 샤오싱 지방의 대표적인 특산품이다.


보행거리로 나오니 골동품과 특산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비에 약간 젖은 듯한 거리가 상큼해 보인다. 한가로이 루쉰 고향마을을 거닐어 본다. 황쥬를 담은 오색찬란한 항아리가 아주 많다.


황제가 먹던 간식으로 수염처럼 가늘다 해서 이름 붙은 룽쉬탕(龍鬚糖)도 보인다. 마치 백발처럼 생겨서 민간에서는 인쓰탕(銀絲糖)이라고도 한다. 룽쉬탕을 파는 가게마다 맛을 보라고 조금씩 떼어준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으며 달콤하고 부드럽기가 솜사탕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유리 수정으로 만든 노리개나 장식품을 파는 공예품 가게 하나가 눈에 반짝거린다. 보석 같이 아름다워 영상으로 담고 있는데 한 꼬마아이가 쳐다보고 있다. 아이의 눈빛이 초롱초롱 하다.


수상무대(왼쪽 위), 수정 가게(왼쪽 가운데), 우펑선(왼쪽 아래), 뉘얼홍 담은 항아리(오른쪽)


루쉰 고향마을을 벗어나 거리를 걷다가 창챠오즈제(倉橋直街)로 갔다. 이곳은 2003년 유네스코의 아시아 지역 ‘문화유산보호 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강남 수향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약 1킬로미터 정도의 좁은 길이다. 홍등이 걸려 있고 상호가 적힌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다. 촉촉하게 젖은 거리를 알록달록한 비옷을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다닌다. 삼륜차를 타고 다니기도 한다.


좁은 골목으로 접어드니 하천이 흐르고 있다. 대쪽을 엮어 흑색을 칠한 덮개가 있는 우펑선(烏篷船)을 타고 노를 저으며 오가고 있다. 물이 많은 샤오싱의 교통수단이자 관광상품이기도 하다. 우산을 하나씩 들고 찰랑거리며 떠다니는 우펑선을 타고 물 위에 떠있는 집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겠다.


하천 변을 따라 수상가옥이 빽빽하다. 빨래 하는 아주머니도 있고 베란다에서 노인네들이 하천을 바라보며 마늘을 까고 있다. 아이는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으며 강아지도 덩달아 비 구경을 한다.


하천 위에는 돌로 만든 구름다리가 있다. 다리 위에서 보니 더욱 풍광이 멋지다. 비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찻집 하나가 보인다. 찻집으로 갔더니 구름다리가 더욱 봉긋한 것이 보름달처럼 둥글다. 옌위(雁雨)라는 이름의 찻집인데 기러기와 비라니 정말 낭만적인 조합이다.


우펑선을 타는 곳에 이르렀다.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들이 많지 않다. 딸을 위해 만든 술, 황쥬 한 병 들고 배 위에 올라 빗물을 안주 삼아 떠다니고 싶어진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