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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41 안후이1 와호장룡처럼 등장하는 낭만적인 옛 촌락 속으로



안후이 성은 춘추전국시대 오월초(吳越楚) 세 나라의 부용(附庸), 즉 속국이었는데 원래 상(商)나라 후예들이 세운 환(皖)나라의 근거지였다. 그래서 안후이의 약칭은 완(皖)이다.


청나라 강희에 이르러 강남성(江南省)이 장쑤(江蘇)와 안후이(安徽)로 분리된다. 이때 창장 북쪽의 안칭(安慶)과 후이저우(徽州)의 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당송 시대를 거쳐 명나라에 이르러 휘상(徽商)은 중국 3대 상방으로 성장한다. 청나라 말기에는 호설암과 성선회를 비롯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등장하는 화폐이론가이자 상인인 왕무음(王茂蔭), 중앙 정치권력을 장악한 좌종당, 이홍장 등 안후이 출신들이 득세한다.


안후이의 수도는 창장 북쪽의 허페이(合肥)이고 오악을 합친 듯 멋진 황산은 세계적 관광지로 손색이 없으며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안후이 고촌락인 훙춘(宏村)과 시디(西遞)는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1)  툰시屯溪 게 껍데기처럼 생긴 황산의 명물과자가 있는 거리


황산 시 툰시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곳은 황산을 여행하는 중간 기착지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춘추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됐으며 서기 208년 삼국시대 손권이 당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군대가 주둔한 이래 각 왕조를 거치면서 수운과 상업이 발달한 안후이 남부 중심지였다.


신안장(新安江), 헝장(橫江), 솨이쉐이(率水)가 서로 만나는 곳으로 20세기에 들어서도 활발한 상업 활동으로 상인들이 몰려들고 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샤오상하이(小上海)라 불리기도 했다. 1987년에 주변 4개 현 및 툰시 구, 후이저우 구, 황산 구를 통합해 황산 시가 됐으며 시 정부는 툰시에 있다.


신안장 강변 북쪽 빈장시루(濱江西路) 바로 뒷골목은 라오제(老街)라 부르는 문화풍물거리이다. 툰시 라오제는 핑야고성(平遙古城), 양숴시제(陽朔西街), 샹츄(商丘), 다리(大理)와 리장(麗江) 고성거리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볼거리가 많다.


근거리에 있는 샤오싱, 항저우, 쑤저우와 같은 강남 풍경과도 달리 평범해 보이는 거리이지만 세계적 명산인 황산이 바로 옆이라 옛 골목이 외국인들을 위한 갖가지 가게들로 넘쳐 나고 있다.


라오제 가옥들은 대체로 2층 구조로 돼 있으며 회백색 담장과 검은색 기와가 어우러진 모습이다. 나무로 된 문들은 붉은 단청 색감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거리의 찻집이나 공예품가게, 약방들은 2층 누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새로 단장한 모습으로 고급스런 나무로 창살에는 문양들을 새긴 모습이다.


멋진 분위기가 풍기는 커잔(客棧)이 있고 고풍스런 건축물이 볼수록 정이 가는 거리다. 더양러우(德陽樓) 앞 사거리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다. 모두 줄을 서서 길거리 음식을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바로 훈툰(餛飩)으로 아주 흔한 음식인데도 왜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지 궁금했다. 그 해답은 재미있는 주인 때문. 왕이탸오(汪一挑)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유명해진 사람으로 방송에도 출연했고 신문에도 났다고 자랑한다.


게다가 자기 블로그까지 있다고 한다.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훈툰인데 그 자리에서 반죽해 아주 빠르게 고기를 집어넣더니 직접 나무통에 넣고 익힌다. 5분 정도 기다리면 요리가 완성되고 예쁘게 디자인된 종이그릇에 담아준다. 작은 그릇 하나에 5위엔이니 싸고 맛있다. ‘이 왕이탸오를 먹지 않으면, 라오제를 헛걸음하는 것(不吃汪一挑,白走老街這一遭)’이라는 소문이 났을 정도다.


한 아가씨가 직접 손으로 대나무로 동물들을 엮어 만든 공예품을 팔고 있다. 토산품, 먹거리가 즐비하고 문방사보도 파는데 커다란 부채가 있는 곳에서는 부채에 그림을 그려서 팔기도 한다.


라오제에서 가장 크다는 통더런(同德仁) 약방에는 진맥도 해주고 약도 조제해 주겠지만 살짝 들어가 보니 커다랗고 때 묻은 약장이 오랜 세월 이곳에서 성업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올림픽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자리잡고 있는데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골목길에 있는 세커황(蟹殼黃)이라는 별명을 가진 황산 샤오빙(燒餅)을 파는 곳이 보인다. 한 아주머니가 화로 벽에 밀가루반죽을 하나씩 다닥다닥 붙여서 굽고 있다. 10위엔에 한 열 개 정도 준다. 게 껍데기처럼 생겼다고 해 이름이 붙은 이 전통 과자는 아쉽게도 아무런 맛도 없이 밋밋하다. 화로 속에서 골고루 잘 익혀 태운 것이 정말 누렇고 붉은 게를 먹는 듯하다.



라오제 차 시장(왼쪽), 라오제 거리(오른쪽 위), 샤오빙(오른쪽 가운데), 이핀거 식당(오른쪽 아래)


샤오싱에서도 사 먹었던 룽쉬탕(龍鬚糖)이 보인다. 황제가 먹던 간식으로 수염처럼 가늘고 백발처럼 생겨서 민간에서는 인쓰탕(銀絲糖)이라고 부르는 룽수이탕을 직접 만드는 모습이다.


이곳은 뭐니뭐니해도 안후이 남부의 유명한 차 시장이다. 황산 부근에는 이름난 차가 아주 많다. 맑고 붉은 빛깔에 소름이 돋는 10대 명차 치먼홍차(祁門紅茶)를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한다. 예쁜 찻집들이 많으니 홍차를 한잔 마시고 싶어진다.


라오제 동쪽 끝자락에 조그만 광장이 나온다. 광장 한가운데 라오제 패방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패방이 라오제의 밤 분위기를 더욱 낭만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핀거(一品閣) 건물에 빨간색 바탕에 쓴 차러우(茶樓)라고 쓴 등이 아주 예쁘다. 옆에는 라오제디이러우(老街第一楼)가 있는데 전형적인 안후이 요리를 파는 식당이다. 유리 창문으로 돼 있어 식당 안에서 맛있게 요리를 먹고 있는 사람들 모습이 훤히 다 보인다.


라오제를 벗어나는 곳에서 꼬마아이 둘이 제기차기를 하고 있다. 밤이 깊어가는데 가게를 보면서 지루함을 달래고 있는 중인가 보다. 거리를 벗어나 강변 조명을 바라보며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강변 산책로는 아주 조용하다. 강을 따라 호텔마다 화려한 조명이 빛나고 있다. 오후부터 밤 늦도록 이리저리 라오제를 돌아다녔더니 피곤한다. 라오제에 가면 좋은 차를 골라 사면 좋을 듯하다. 황산공항에 내려 바로 산으로 가지 말고 하루 정도 라오제에서 싸고 맛 좋은 차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2)  훙춘 宏村 와호장룡처럼 등장하는 낭만적인 옛 촌락 속으로 


황산을 가는 길에 굳이 툰시에 머문 것은 황산보다도 더 가고 싶었던 완난(皖南) 고촌락 때문이다. '완'은 안후이의 별칭이니 안후이 성 남부에 형성된 옛 마을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별스러울 것은 없지만 정말 꼭 보고 싶던 곳으로의 여행이니 아침부터 즐겁다. 오늘 가는 곳 중 먼저 도착한 곳은 이현(黟縣)에서 1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훙춘이다. 이현은 기원전에 형성된 마을인데 중국에서 외자로 된 현 이름은 대체로 2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고 보면 된다.


매표소 입구를 지나 10여 분 걸어가면 자그마한 호수인 난후(南湖)가 나온다. 맑고 잔잔한 호수를 따라 나뭇가지들이 흔들거리는 모습이 정겹다. 호수에 비친 건물들이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니 학생들이 캔버스를 놓고 연필로 열심히 데생을 하고 있다.


난후 옆으로 호수 위에 멋진 아치형 다리가 나타났다. 리안(李安) 감독의 <와호장룡(臥虎藏龍)> 첫 장면에 스틸 컷처럼 나오는 촬영지다. 다리를 보는 순간 도저히 쉽게 연출할 수 없는 멋진 모습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봉긋한 돌다리와 수련이 어우러지고 있으며 천 년의 역사를 담은 집들과 먼산 구름과 하늘까지 차례로 드러나는 환상적인 장면. 잠시 숨을 멈추고 그저 바라볼 뿐이다.


천천히 돌다리를 넘어가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옷 색깔조차 그야말로 그림이 된다. ‘중국 그림의 고향’이라는 이름답게 훙춘의 첫인상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역시 화폭에 담으려는 학생들이 곳곳에 많다. 다리를 넘어가는 나 역시 학생들의 붓 칠로 화폭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호수를 건너가면 바로 붙어 있는 난후서원이 나온다. 1814년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서원으로 모두 여섯 채의 사숙이 호수에 접해 있다고 해서 의호육원(依湖六院)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다가 다시 하나의 커다란 서원으로 통합해 이문가숙(以文家塾)이라 부르기도 한다.


목조 건물로 건축된 회벽 색 담장에 홍등이 걸려 있다. 사람들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려는 입구는 쇠창살을 설치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다 보니 복잡하기도 하고 서로 부딪힌다.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도 있고 공자에게 예를 올리는 곳도 있다.


다시 호수 쪽으로 빠져 나와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이 마을은 원래 왕(汪)씨 집성 촌이다. 마을 전체가 소 우(牛)자형으로 된 골목길을 따라 인공 하천이 흐르는 수리 시설을 갖춘 독특한 곳이다. 골목길을 따라 졸졸 흐르는 하천이 있는데 아주 작아서 물 도랑이라는 뜻으로 수천(水圳)이라고 한다.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돌 4개가 사람들의 통로이고 한쪽 끝에 있는 수천은 겨우 1개 반 정도다.


길 양 옆은 단층이지만 꽤 높은 담장으로 가려진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청나라 말기 주영공사와 국무총리를 역임한 왕다시에(汪大燮)의 옛집을 관람하는 사람들로 복잡한다. 붓글씨가 가지런한 징더탕(敬德堂)을 지나 다시 거리로 나왔다.


천천히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동감할만한 작은 연못 위에자오(月沼)이 보입니다. 연못을 빙 둘러 역사의 빛깔로 연하게 퇴색된 고풍스런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곳 역시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와호장룡의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장쯔이가 호수 위 물살을 밟으며 사뿐히 날아오르고 뒤이어 저우룬파가 뒤따르는 장면. 둘은 이 연못을 벗어나 대나무 숲에서의 멋진 칼 싸움을 벌인다.


이 연못은 명나라 영락제 시대에 주민들의 요청으로 한 지리학자가 오랫동안 탐사한 끝에 마을 한가운데 있는 샘을 넓혀서 만들었다. 산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연못에 모였다가 수로를 따라 마을을 돌아 나가도록 한 구조다. 완벽한 수리 계산을 한 것도 그렇지만 골고루 물을 나눠 쓰는 공동체 마음씨도 담았다. 생각해 보면 정말 역사의 흔적은 살필수록 감동의 물결이라 할만하다.


처음에 달의 모양을 연상하면서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꽃이 피면 곧 지고, 달이 차면 곧 기운다(花開則落, 月滿則虧)’는 말뜻에 따라 작업을 했다는데 다 만들고 나니 그 모양이 반달을 닮게 됐다. 그래서, ‘꽃은 꽃이나 피지 않고, 달은 달이나 차지 않는다(花未開, 月未圓)’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소 우 자의 형태로 마을이 꾸며 졌는데 이 연못은 소의 위장에 해당한다. 마치 엄마의 뱃속 모태마냥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연못을 보노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반원형 모양의 연못 테두리를 따라 다 둘러 빙 돌아봐도 보는 곳마다 풍경은 모두 탄성을 자아낸다. 오래 있으면 지루할 만도 한데 보면 볼수록 떠나고 싶지 않다.


거리에는 샤오빙을 팔기도 하고 나무로 만든 주전자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여러 가지 곡식을 넣고 둥글게 돌려가며 만드는 위산빙(禦膳餅)이 신기하다. 골목을 따라 가며 훙춘의 이름 난 집들을 차례로 들어가 본다. 타오위엔쥐(桃源居)과 슈런탕(樹人堂)도 있다.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니 청나라 말기 염상(鹽商)인 왕딩구이(汪定貴)의 저택인 청즈탕(承志堂)이 나온다. 문을 들어서니 좁은 마당 한가운데 가로 세로 3미터 정도의 우물이 있고 그 속에 물고기 몇 마리가 노닐고 있다. 위를 쳐다보니 뻥 뚫린 곳으로 하늘이 드러나는데 이렇게 집 마당 안에 우물이 있는 것을 톈징(天井)이라 한다.


뒤를 돌아보면 입구 문으로 마름모 꼴로 파란 바탕색에 ‘복(福)’자가 걸려 있는데 참 중국답지 않은 색감이어서 오히려 참신하다. 이곳에는 1미터가 채 안 되는 높이의 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놓여 있다. 대부분 나무로 만든 건물이어서 화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문과 처마, 대들보마다 조각된 그림들이 아주 화려하다. 연회를 하는 관리의 모습, 낚시를 하는 모습도 있다. 목조 건물이라 그런지 오밀조밀하게 집 구석구석 문양들이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와호장룡 촬영지(왼쪽 위), 훙춘 고가 조각(왼쪽 가운데), 캔버스(왼쪽 아래), 고추와 연못(오른쪽)


마을 중심부에 시장이 있다. 간단한 먹거리로 요기도 할 수 있고 공예품과 토산품을 흥정해 살 수도 있다. 역시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지방이라 죽간(竹簡)으로 만든 물건들이 많다.


대나무를 몇 십 개씩 연결해 ‘매난국죽’ 글씨와 그림이 함께 들어간 것, 호랑이가 달을 등지고 울부짖는 모습, 말 8필이 힘차게 뛰어가는 것이 탐이 난다. 들고 다닐 수만 있다면 하나 사서 집에 걸어 놓고 싶다는 생각이다.


좁은 골목을 응시하며 그림을 그리는 여학생 뒷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서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 그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제부터’라고 한다. 홍등 3개가 걸려 있는 골목을 그리고 있다. 연필로 데생을 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골목을 걸어간다.


다시 위에자오로 돌아왔다. 연못을 한 바퀴 돌아보니 길을 따라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수많은 미술학도들이 하루 종일 앉아 바라보고 또 바라봐도 화폭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스케치만 보일 뿐이다. 아마도 볼수록 그림에 욕심이 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리 두 마리가 꽥꽥거리며 연못 주위를 맴돌고 있다. 한 남학생은 우산을 쓰고 있다. 햇살이 내려 쬐는 곳에 자리를 잡았으니 고생이다. 하지만 굳이 햇살을 맞으면서도 그려내고 싶은 장면이 있을 듯하다.


바구니 가득 빨간 고추가 담겨있다. 조금 전에는 황홀한 연못 풍경에 시선이 사로잡혀 이렇게 햇볕에 노출된 고추의 붉디붉은 색깔을 보지 못했다. 고추를 말리는 모습이 정겹다. 우리처럼 통째가 아니라 고추를 토막토막 낸 채로 말리는 것이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골목을 벗어나니 집 담장도 조금 낮아지고 밭도 보이고 꽃도 피었고 담장도 쓰러져가며 벽으로 넝쿨도 넘어가고 있다. 집 마당에서 넘어온 감나무에는 노란 감이 열렸다. 처마 밑에 주렁주렁 호박도 달렸으며 샛노란 호박꽃도 피었다. 우리나라 시골 풍경과도 비슷해 보인다.


공터 밭 옆 커다란 바위 옆에 파랗고 하얀 꽃 한 잎이 살짝 피었다. 이건 후디에화(蝴蝶花)라고 하는 나비꽃으로 우리나라 봄철에 피는 개나리만큼 온 산천에 흐드러지게 피고 진다.


또다시 난후로 왔다. 뒤돌아보니 홍춘 위에자오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인다. 저 좁은 입구 속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옛스럽고 인상적인 촌락이 숨어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다리를 다 건너가면 다시 문이 닫혀 버리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난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천천히 돌다리를 건너는데 호수에 떠 있는 수련이 발목을 잡는 듯하다.


3)  시디 西遞 당나라 세자가 성까지 바꾸고 이주한 촌락 속으로


홍춘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시디로 갔다. 입구에 들어서면 교주자사(膠州刺史)라는 글씨가 연하게 새겨진 돌 패방이 우뚝 서 있다. 12미터가 넘는 이 패방은 명나라 시대 호문광(胡文光)의 업적을 기려 직위를 그대로 써서 만든 공덕 탑이다. 이곳 시디는 후씨 집성 촌으로 당나라 황제의 후손이 성을 바꾼 후 이곳에 정착했다.


패방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골목길이 홍춘과는 조금 다르다. 조금 더 넓은 편이고 졸졸 흐르는 개천은 보이지 않는다. 담장이 훨씬 높고 저택도 더 웅장해 보인다. 홍춘은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민들이 많이 살았고, 이곳 시디는 관료들이 많이 살던 마을이다.


2층 건물인 쾅구자이(礦古齋) 안에 있는 물 항아리에 동전이 많이 떨어져 있다. 깊고 큰 항아리라 뚫린 천정에서 햇빛이 비치지 않으면 동전들을 보기 힘들다. 간판에 한글로 써놓은 것은 고마운데 ‘광고제’라 잘못 써 놓았다. (광고재가 맞음)


꽃무늬가 조각된 문이 정교한 루이위팅(瑞玉庭)을 지나 골목을 돌아서 탸오리위엔(桃李園)으로 들어갔다. 후이상인 호원희(胡元熙)의 저택으로 ‘수(壽)’자가 도안으로 새겨진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자세히 보니 그림 안에는 ‘복(福)’자가 새겨져 있으며 구름과 신선, 동자, 꽃과 나무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다. 매우 공을 들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책방도 있는데 유교적인 선비이면서도 상업에 종사한 이루이상(一儒一商)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좁은 골목 안에 시위엔(西園)과 둥위엔(東園) 저택이 서로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길을 빠져나오니 약간 넓은 공간이 나왔다. 개천 하나가 흐르고 있고 백가(百家)라고 불릴 만큼 많은 저택들이 높은 담벼락으로 줄줄이 이어져 있다. 한쪽 귀퉁이에 학생들이 마음에 드는 동선을 찾아 이리저리 붓 칠을 하고 있다.


시디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은 징아이탕(敬愛堂)이 아닐까 싶다. 처음으로 정착한 호씨의 조상을 모시는 종사(宗祠)다. 성조영준(盛朝英俊)과 사세승은(四世承恩) 편액 아래 각각 ‘효(孝)’와 ‘절(節)’, ‘충(忠)’과 ‘렴(廉)’이 호방한 필체로 적혀 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예를 올리던 곳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백대증상(百代蒸嘗)’ 편액 아래 조종(祖宗)의 신위(神位)가 있다. 정교하고 담백하게 그려진 초상화인데 빨간 옷을 걸친 할머니가 인상적이다.



조종 초상화(왼쪽), 물항아리(오른쪽 위), 시디 거리(오른쪽 가운데), 당 태종과 재상(오른쪽 아래)


다시 2미터가 채 안 되는 골목길을 따라 가면 다시 넓은 공간이 나오고 주이무탕(追慕堂)이 있다. 당 태종 이세민의 13대손인 당 소종(昭宗) 이엽(李曄)이 후량(後梁)을 건국한 주온(朱溫)에게 살해 당하게 되자 갓 태어난 세자는 유모를 따라 궁을 빠져나가 시랑이던 장시 사람인 호청(胡清)의 보호 아래 성장한다. 세자는 성까지 바꿔 호창익(胡昌翼)이라 했으며 일가를 이뤄 지금 후씨의 시조가 됐다. 그의 5대손 호사량(胡士良)이 처음 이곳 시디에 자리를 잡았다고 전한다.


본당 앞에 호창익, 호사량과 함께 호청의 신위까지 모셔져 있으며 뒤쪽에는 용 벽화와 용 무늬 의자에 앉은 이세민과 함께 두 재상인 위징(魏徵)과 이정(李靖) 모형도 있다.


목조건물 벽에는 수많은 장수들과 문관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어 마치 당나라 사당과도 같은 분위기다. 용 무늬 의자가 하나 놓여 있는데 1998년에 기증한 사람 이름이 적혀 있다. 한 명은 이씨, 또 한 명은 호씨다.


‘명청 시대 민가인 시디 촌에 당나라 조상의 후예들이 대를 이어 살았으니 이 용의(龍椅)를 기증한다’며 ‘이씨와 호씨는 오래오래 한 가족(李胡千秋一家人)’이라고 적은 팻말이 있다.


학생들은 가는 곳마다 고독한 모습으로 화폭과 씨름하고 있다. 흰색 벽에 창문을 열어젖힌 가게도 보인다. 한가롭게 이리저리 골목을 거닐기 참 좋은 동네다. 온전하게 마을이 잘 보존된 것도 좋지만 민가와 저택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서로 아름다운 동선을 보여주고 있다. 정말 두고두고 가슴 깊이 새기고 싶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