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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공산당 정치국상무위원, 13억과 세계를 주무르는 중앙 중의 중앙

공산당 중심의 국가 중국의 권력은 '당 중앙'에서 분출한다. 현 17기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9명으로 운영된다. 계파 사이의 합의 조정으로 상임위원이 선출되며 중대 사안의 경우 다수결도 도입되는 시스템이다. 서열1위 후진타오도 1표의 역할이라는데 당 중앙이 지닌 묘미이다. 물론 1표의 힘의 차이는 존재할 것이다.

후진타오와 시진핑을 제외한 현 상무위원 7명의 프로필을 살펴보자.

(사진설명 : 우방궈와 원자바오)

우방궈 

중화인민공화국의 입법권을 가지는 최고 기관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전국 각 성, 자치구, 직할시, 특별 행정구, 군대 등의 인민 대표로 구성된다. 헌법의 수정과 헌법 질서를 감독, 수호하고 각종 법률의 제정과 수정하며 국가 주석과 부주석을 선출한다. 당 정치국 상무위원 우방궈는 전인대 상설 기구인 상무위원회 위원장이다.

1941년 7월 출생, 안후이 북부 페이둥(肥东) 사람으로 칭화대학에서 무선전기전자공학을 전공했다. 1964년 입당 후 상하이전자관(上海电子管)에서 엔지니어로 사회 생활을 시작해 10년여 만에 공장장이 된다.

기업 경영 능력을 인정 받아 상하이시 측량, 전자 통신, 과학 기술 분야의 정치 담당 서기로 순항해 1985년 당시 상하이 서기이던 천궈둥(陈国栋)[1]에 의해 발탁돼 부서기가 된다. 상하이방의 장쩌민과 주룽지[2]에 이어 1991년 상하이 서기가 된 후 당 정치국 위원으로 중앙 무대에 등장한다.

1995년부터 국무원 부총리로 베이징 무대에서 활약했지만 2003년 이래 원자바오 총리에 비해 서열은 앞서나 실권은 약한 전인대 위원장을 맡고 있다. 후진타오 총서기와 칭화대학 동문이자 엔지니어 출신 상하이방으로 중국 정치권을 풍미하고 있으며 2012년 퇴임 예정이다.

원자바오 

중국 국무원, 즉 중앙 인민정부는 국가권력의 집행기관이자 행정기관이다. 총리와 부총리, 국무위원 및 산하 각 행정부 및 특별 위원회 등으로 구성된다. 당 정치국 상무위원 원자바오는 국무원 전체회의와 상무회의를 주관하는 국무원 총리이다.

1942년 9월 출생, 텐진(天津) 사람으로 베이징 지질대학 지질광산학을 전공했다. 1965년 입당 후 간쑤 지질국에 근무하던 1978년 당시, 당산대지진[3]으로 인해 지진 전문가를 찾던 중앙 정부의 요청으로 쑹핑(宋平) 간쑤성 서기에 의해 발탁된다.

지질광산부 부부장을 거쳐 1986년 출세 가도 요직인 당 중앙판공청 주임이 된다.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과 장쩌민 등 3명의 총서기 밑에서 7년 동안 근무하며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 받는다. 중앙서기처 서기와 국무원 부총리를 거쳐 2003년 주룽지에 이어 국무원 총리가 된다.

덩샤오핑의 보호 아래 천안문사태[4]로 인한 실각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온화하고 서민적인 총리로서 무리 없이 국가를 관리하고 있다. 당 내에서 후진타오 계열로 분류되며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노선을 걷고 있으며 2012년 총리 자리를 리커창 부총리에게 물려줄 예정이다.

(사진설명 : 자칭린과 리창춘)

자칭린 贾庆

당 정치국 상무위원 자칭린은 당, 민족, 사회단체, 종교 등 단체와의 통일전선 조직체인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이다.

1940년 3월 출생, 허베이(河北) 보터우(泊头) 사람으로 스자좡 공업관리대학에서 공업기업기획, 허베이 공학원에서 전기기계 설비를 전공했다. 1959년 입당 후 기계공업부 기술자로 근무하며 문화대혁명 기간 하방 당해 노동을 하기도 한다. 기계 설비의 수입을 관리하는 기업체 사장을 거쳐 1985년 푸젠 성 부서기를 맡으며 정치 행정가로 성장한다.

1990년 푸젠 성 대리성장을 거쳐 1993년 서기와 성장을 겸하며 푸젠 성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낸다. 60년대 기계공업부에서 함께 근무한 장쩌민 주석과의 인연으로 베이징 시장으로 전격 발탁돼 중앙 무대로 올라온다. 상하이방의 최대 걸림돌이던 전 베이징 서기 천시퉁(陈希同)[5]의 실각은 자칭린에게는 도약의 발판이다.

2002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 2003년 정협 주석으로 장쩌민의 권력을 유지하고 상하이방을 대표한다. 하지만 푸젠의 레이카이싱 사건에 연루됐다는 문제로 인해 강력한 후진타오 반대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2년 권력 이양을 앞둔 시점에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 어떤 역할을 이어 갈지와 관련해 후진타오 주석의 공청단파와의 치열한 경쟁이 진행 중이다.

리창춘 

당 정치국 상무위원 리창춘은 당내 이데올로기와 선전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중앙정신문명건설지도위원회(中央精神文明建设指导委员会) 주임을 겸임하고 있다.

1944년 2월 출생, 랴오닝(辽宁) 다롄(大连) 사람으로 하얼빈 공업대학에서 산업자동화를 전공했다. 1965년 입당 후 선양(沈阳)시 기술자로 사회에 진출한 후 전기제어설비 부문 기업체 사장과 시 공업국을 거쳐 1983년 시장 및 서기로 정치 행정가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1987년 랴오닝 성장, 1991년 허난 성장을 거쳐 1992년 허난성 서기가 되며 1997년 당 정치국위원으로 중앙 무대에 올라온 후 1998년부터 5년 동안 광둥 성 서기를 역임한다. 2002년 장쩌민의 향후 입지를 도모하기 위해 16기 최연소 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입성한다.

허난, 랴오닝, 광둥을 두루 거친 리창춘을 의식해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촉망 받는 리커창이 허난 성과 랴오닝 성을 관리한 것과 후진타오 계열의 왕양이 광둥 성을 이어받은 것은 정치적 견제와 관련된다. 건강 이상 등으로 실각 소문이 있었지만 연임 후 굳건히 상무위원 자리를 유지하며 당의 이데올로기와 선전 부문,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사진설명 : 리커창, 허궈창, 저우융캉)

리커창 李克强

당 정치국 상무위원 리커창은 국무원 4인의 부총리 중 개혁·발전, 물가, 재정, 통계 등 거시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차기 총리가 유력한 상무 부총리이다.

1955년 7월 출생, 안후이(安徽) 딩위안(定远) 사람으로 베이징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박사)을 전공했다. 1976년 입당 후 정치적 기반이 된 공청단의 핵심 요직을 거친다. 1983년 공청단 중앙학교부부장, 서기처 서기를 거쳐 후진타오의 추천으로 1993년 38살의 나이에 공청단 제1서기가 된다.

1999년 허난 성 부서기 및 대리성장, 성장을 거쳐 2002년 40대 초반의 나이에 일약 허난 성 서기가 돼 성장을 겸임하며 농업 중흥의 책임을 맡는다. 2004년에는 공업 지방 랴오닝으로 옮겨 성 서기가 돼 농공을 두루 섭렵한 후계 지도자로 주목 받는다.

200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했지만 상하이방과 태자당 연합 세력과의 경쟁 결과 시진핑보다 서열에서 밀린다. 사망한 황쥐(黄菊)[6]를 이어 국무원 상무 부총리로서 총리 수업을 받으며 국가에너지위원회 부주임, 국무원식품안전위원회 주임을 겸임하고 있다.

허궈창 贺国

당 정치국 상무위원 허궈창은 중앙기율검사위원회(中央纪律检查委员会, 이하 중기위) 서기이다.

1943년 10월 출생, 후난(湖南) 샹샹(湘乡) 사람으로 베이징 화공대학에서 무기물공학을 전공했다. 1966년 입당 후 산둥 텅저우(滕州)의 화학비료공장에서 현장 기술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산둥성 화학석유공업청(化学石油工业厅) 청장에까지 오른다.

산둥 성 위윈회 상무위원과 지난 시 서기를 맡고 있던 1991년, 국무원 화학공업부 부부장이 돼 중앙 무대로 진출한다.

국무원 석유산업 부서 및 석유대학 출신 그룹인 석유방 선배 쩡칭홍에 의해 발탁돼 1996년 푸젠 성으로 내려간 후 1997년 푸젠성 성장에 올랐으며 1999년 충칭 시 서기가 된다. 2002년 당 정치국위원이 되면서 당 서기처 서기와 함께 쩡칭홍의 당 조직부장 자리를 이어받는다.

200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허궈창은 당 간부의 부패 감시를 책임지는 기율검사위원회를 장악한다. 장쩌민의 상하이방을 타격한 상하이 서기 천량위 사건을 진두지휘한 우관정(吴官正)[7]이 후진타오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것을 고려하면 쩡칭홍 심복 허궈창의 상무위원 진입은 정치적 배치로 평가된다.

저우융캉 周永康

당 정치국 상무위원 저우융캉은 공안, 국가안전, 사법을 총괄하는 중앙정법위(中央政法委) 서기 및 사회 치안을 관리하는 중앙사회치안종합치리위(中央社会治安综合治理委) 주임을 겸임하고 있다.

1942년 12월 출생, 장쑤(江苏) 우시(无锡) 사람으로 베이징 석유대학에서 지구물리탐사를 전공했다. 1964년 입당 후 석유 산지인 헤이룽장 다칭(大庆)에서 기술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부터 15년 동안 랴오닝의 랴오허(辽河) 석유탐사국에서 근무하며 국장까지 오르고 탐사국이 있는 판진(盘锦) 시장을 맡기도 한다. 1985년 중앙 국무원 석유공업부 부부장, 1996년 중국석유천연가스총공사(中国石油天然气总公司) 사장, 1998년 국무원 국토자원부 부장이 된다.

1999년 쓰촨 성 서기를 거쳐 2002년 당 정치국위원이자 중앙서기처 서기, 정법위 부서기와 공안부장이 된다. 2007년 석유방 인맥이자 태자당 쩡칭홍의 추천으로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며 뤄간(罗干)[8]의 자리를 이어받아 공안과 사법, 사회기강을 총괄하는 정법위를 맡는다.

당 정치국 상무위원은 서열 순이지만 일정한 직책과 순위가 유지된다. 후보 군의 배경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대략 18기의 상무위원 라인업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최근 보시라이 충칭 시 서기 사건으로 인해 변수가 발생했다. 각 계파의 우선 순위가 요동치고 있으며 2명을 줄여 7명으로 상무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안도 추측되는 등 한치 앞을 바라보기 힘들다.

보시라이가 상무위원회 진입에 실패한 가운데 물러나는 사람을 제외한 정치국위원 25명 중 누가 향후 당 중앙을 구축할 것인지 갈수록 흥미진진하다.


참고-------------------------------------------------------------------------------------

[1] 1911년 출생, 1932년 공산당에 입당, 혁명운동에 참가하며 신중국 수립 후 중앙인민정부 각 부분에서 부장 등을 거쳐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상하이 제1서기를 역임, 2005년 사망.

[2] 1928년 출생, 1949년 공산당에 입당, 중국인민은행장 출신으로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상하이 서기를 역임한 후 우방궈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원자바오 이전 국무원 총리를 역임.

[3] 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42분 리터 7.8의 지진으로 공식 사망자 24만 명, 중상자 16만 명에 이르는 20세기 최악의 재앙 중 하나.

[4] 천안문은 1976년 4월과 1989년 6월 4일 각각 민주화를 요구하는 군중 집회의 장소이자 상징으로, 여기서는 2차 천안문사태를 말하며 '6.4사건'이라고도 함.

[5] 1930년 출생해 베이징을 무대로 활동하며 제2차 천안문사태 당시 베이징 시장과 국무위원, 당 정치국위원, 베이징서기를 역임하던 1995년, 거액의 횡령사건으로 구속, 징역 16년 형을 선고 받음.

[6] 1938년 출생, 1966년 공산당 입당, 우방궈에 이어 상하이 시 서기, 국무원 상무 부총리와 16기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했으며 천량위 사건의 여파로 추문에 얽힌 2007년 베이징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남.

[7] 1938년 출생, 1962년 공산당 입당, 장시 성 서기를 거쳐 16기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중기위 서기를 역임.

[8] 1935년 출생, 1960년 공산당 입당, 16기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중앙정법위 서기를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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