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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 81] 황산시 툰시 라오제, 홍춘, 시디

 

9월 22일 아침, 천천히 일어나서 짐을 차곡차곡 챙겼다.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늘 짐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뒤숭숭하다. 오늘 낮 12시 버스를 예매했고 여유도 있으니 배낭 대청소를 한 것이다.


버스는 2시간 30분 만에 툰시(屯溪)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곳은 황산(黄山)을 여행하는 중간 기착지로서 유명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춘추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됐으며 기원전 208년 삼국시대 손권(孙权)이 당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툰(屯)을 배치하고 이양현(犁阳县)을 설치한 이래 각 왕조를 거치면서 수운과 상업이 발달한 안후이(安徽) 남부의 중심지였다.


신안장(新安江), 헝장(横江), 솨이쉐이(率水)의 3개 강이 서로 만나는 곳으로 20세기에 들어서도 활발한 상업 활동으로 대규모로 상인들이 몰려들고 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샤오상하이(小上海)라 불리기도 했다. 1976년에 툰시라는 이름을 회복했다가 1987년에 주변 4개 현 및 툰시구(区), 후이저우(徽州)구, 황산구 3개 구를 통합하는 황산시로 개명됐다. 시 정부는 툰시에 있다.


'샤오상하이'라 불리는 곳, 툰시


단골 호텔에 방을 잡았다. 황산을 가는 길에 굳이 툰시에 머문 것은 어쩌면 황산보다 더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던 완난(皖南) 고촌락(古村落) 때문이다. '완'은 안후이의 별칭이니 안후이 성 남부 황산 남쪽에 형성된 마을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빈장중루(滨江中路)에 있는 여행사 하나를 찾아서 내일 여행을 예약했다. 그리고 바로 뒤편 골목길은 라오제(老街)라 부르는 문화풍물거리이니 오후 내내 눈요기하기 좋을 듯하다.


툰시라오제는 핑야고성(平遥古城), 양숴시제(阳朔西街), 샹쳐우고성(商丘古城)이나 따리와 리장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풍물이 즐거운 곳이다. 샤오싱, 항저우, 쑤저우와 같은 강남풍경과도 다르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거리이지만 세계적 명산인 황산이 바로 옆이라 그런지 옛 골목 안이 갖가지 가게들로 넘쳐나고 있으니 아마도 외국여행객들에게는 보이는 것마다 관심일 듯하다.


후이상(徽商)들의 터전이기도 했던 라오제. 큰 돌 패방을 따라 공예품, 토산품, 먹거리가 즐비하고 문방사보(文房四宝), 대나무 죽편(竹编)과 죽기(竹器), 칠기(漆器), 도자기(陶瓷)도 곳곳에 눈에 띈다.


더양러우(德阳楼)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다. 모두 줄을 서서 길거리 음식을 사려고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훈둔(馄饨)이다. 훈둔이야 늘 보던 것이라 여겼는데 이 주인이 참 재미있다. 왕이탸오(汪一挑)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유명해진 사람으로 방송에도 출연했고 신문에도 났다고 자랑한다.


게다가 자기 블로그까지 있다고 한다. 즉석 훈둔인데 그 자리에서 반죽에다가 고기를 아주 빠르게 집어넣더니 직접 나무통에 넣고 익힌다. 5분 정도 기다리면 요리를 완성해 예쁘게 디자인된 종이그릇에 담아준다. 작은 그릇 하나에 5위엔이니 싸고 맛있다.


  
황산시 툰시 라오제 거리에서 파는 먹거리 훈둔과 화로에 구운 과자를 파는 가게
ⓒ 최종명
황산

 

안후이 남부의 유명한 차가 거래되는 곳


가장 오래된 중의 약국인 스이농(石翼农)도 있고 라오제에서 가장 크다는 통더런(同德仁)도 있다. 진맥도 해주고 약도 조제해 주겠지만 살짝 들어가 보니 커다랗고 때 묻은 약장이 그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곳은 또한 안후이 남부의 유명한 차가 거래되는 곳이기도 하다. 황산 부근에서 나는 이름난 차는 아주 많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고 차 물을 우려내면 정말 맑고 붉은 빛깔에 소름이 돋기도 하는 10대 명차 치먼홍자(祁门红茶)를 파는 곳도 보인다. 역시 10대 명차에 속하는 녹차 황산마오펑(黄山毛峰)도 보이고 툰뤼(屯绿), 죽엽 차로 '다이어트의 제왕'이라 불리는 딩구따팡(顶谷大方), 해발 천 미터 높이에서 생산되는 화차(花茶)인 뤼무단(绿牡丹)도 있다.


그러나 눈길을 가장 끄는 것은 바로 타이핑허우쿠이(太平猴魁)를 직판한다는 즈쒀추(直锁处)로 곳곳에 많다. 이 차는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것으로 20세기 초 파나마 세계박람회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박람회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의 명주, 명차가 세계 각국에 소개됐는데 그 중 하나다.


  
황산시 툰시 라오제 거리. 특산 명차인 타이핑허우쿠이를 직판하는 곳과 체 게바라 얼굴에 '남자아이를 파는 성냥'이란 이름을 새긴 성냥가게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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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 마시고 거리를 나오니 저녁이 지나 약간 어두워졌다. 저녁을 먹을까 생각하는데 골목길에 있는 씨에커황(蟹壳黄)이라는 구운 과자(烧饼)를 파는 곳이 보였다. 한 아주머니가 화로를 열어 한 봉지 싸준다. 게 껍데기처럼 생겼다고 해 이름이 붙은 이 전통 과자는 아쉽게도 아무런 맛도 없이 밋밋했다. 화로 속에서 골고루 잘 익혀 태운 것이 정말 누렇고 붉은 게를 먹는 듯한데 이것만 한번 경험할 일인 듯하다. 결국 요기로 하기에는 실패였다.


'화차이천당'(火柴天堂)이란 상호가 보여 무엇일까 궁금해 자세히 보니 성냥 파는 가게다. 화차이는 바로 성냥인 것이다. 갖가지 모양과 디자인의 성냥을 여전히 팔고 있다. 도무지 팔릴까 싶은데 가만 보니 성냥 표지에 마오쩌둥과 쑨원, 게다가 체 게바라까지 등장한다. 정말 불꽃처럼 살다간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일까.


체 게바라 사진 옆에 ‘남자 아이를 파는 작은 성냥(卖男孩的小火柴)’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의아했다. 알고 보니 라오제에는 두 곳의 성냥가게가 있는데 다른 한곳은 ‘성냥을 파는 남자아이(卖火柴的小男孩)’라는 이름이어서 거꾸로 익살스럽게 했다고 한다. 정말 ‘아이를 파는’ 가게는 아닌 것이다.


라오제 끝을 벗어나는 곳에서 아이들 둘이 제기차기를 하고 있다. 밤이 깊어가는데 가게를 보면서 지루함을 달래고 있는 중이다. 거리를 벗어나 강변 조명을 바라보며 산책로를 따라 걸어 숙소 근처로 돌아왔다. 라오제 근처에서 양고기 꼬치라도 먹으려고 한글로 쓴 한 식당으로 들어가니 중국동포가 하는 식당이다.


한국 관광객들도 몇 팀이 보인다. 문제는 메뉴에 10위엔이라 해서 몇 개냐고 물으니 하나에 그렇다고 한다. 10배, 20배 장사를 하는 것이다. 너무 하다 싶어 5분 정도 시내 쪽 재래시장으로 걸어가니 1개에 1위엔한다. 20개를 사서 맥주도 사서 방에서 신나게 먹다가 잤다.


<와호장룡> 촬영지기도 한 다리를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


9월 23일 아침,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기고 버스를 탔다. 오랜만에 중국사람들이랑 함께 여행을 간다. 별스러울 것은 없지만 정말 꼭 보고 싶던 곳으로의 여행이니 아침부터 즐겁다.


오늘 가는 곳은 홍춘(宏村)과 시띠(西递) 마을 두 곳이다. 먼저 도착한 곳은 이현(黟县)에서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홍춘이다. 입구를 지나 걸어가니 난후(南湖)가 나오고 사진에서나 보던 멋진 다리가 나타났다.


리안(李安) 감독의 <와호장룡(卧虎藏龙)>의 촬영지이기도 한 다리를 보는 순간 정말 이런 이미지를 도대체 어떻게 연출할 수 있을까 하는 탄성이 나왔다. 봉긋한 돌다리와 수련, 오래된 집들과 먼산 위의 구름과 하늘까지 다 집어삼킨 듯 호반 위에는 환상이라 말해도 어색하지 않은 장면이 펼쳐져 있어 숨을 멈출 수밖에 없다.


  
황산시 홍춘 마을 입구, 영화 '와호장룡'의 첫장면을 촬영한 장소이다
ⓒ 최종명
황산

 

다리를 넘어가는 여행객들의 서로 다른 옷 색깔조차 그야말로 ‘그림’이 된다. ‘화가들의 고향’이라는 이름답게 호수 부근에는 열심히 붓과 물감으로 도저히 연출하기 어려운 장면을 화폭에 담고 있는 화가들이 보인다.


다리를 넘어가는데 나 역시 학생들의 붓으로 그려질 화폭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몸이 저려온다. 작은 호수와 밀접하게 붙어 있는 난후서원으로 들어섰다. 1814년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서원으로 또 다른 이름인 이문가숙(以文家塾) 글자가 휘날리듯 걸려 있다.


골목길을 접어들었다. 이 크지 않은 마을은 원래 왕(汪)씨 집성촌으로 마을 전체가 우(牛)자형으로 된 골목길을 따라 개천을 흐르게 하는 수리(水利) 체계를 갖춘 독특한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골목길을 따라 여행객들과 함께 마치 소 걸음 하듯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다.


골목길을 따라 개천이 흐르는 독특한 마을


왕다시에(汪大燮) 옛집 안을 관람하는 사람들로 잔뜩 줄이 서있다. 좁은 길은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돌 4개가 사람들의 통로이고 한쪽 끝에 있는 수로인 개천은 대충 1개 반 정도되는 크기일 듯하다. 길 양 옆은 단층이지만 꽤 높은 담장으로 가려진 집들이다.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자 홍춘, 아니 중국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해야 할 위에자오(月沼)가 드러났다. 이 연못을 빙 둘러 고풍스런 연한 색깔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연못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골목길 만큼의 길이로 길이 형성돼 있다.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서 저마다 하나씩 캔버스를 걸어놓고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


이 연못은 명나라 영락(永乐) 시대에 이곳 주민들의 요청으로 한 지리학자가 오랫동안 탐사(勘测)한 끝에 마을 한가운데 있는 샘 하나를 넓혀서 만들었다고 한다. 산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이 연못에 모였다가 수로를 따라 전 마을을 돌아나가는 구조라 하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완벽한 수리 계산을 한 것도 그렇지만 골고루 물을 나눠 쓰는 공동체 마음씨도 생각해보면 정말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아니던가.


  
황산시 홍춘 마을 중심에 있는 위에짜오 연못의 낭만적인 풍경, 토막난 고추가 익어가고 있는 바구니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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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달의 모양을 연상하면서 공사를 시작했던가 보다. ‘꽃이 피면 곧 지고, 달이 차면 곧 기운다(花开则落,月满则亏)는 말뜻에 따라 작업을 했는데 다 만들고 나니 그 모양이 반달을 닮게 됐다. 그래서, ‘꽃은 꽃이나 피지 않고, 달은 달이나 차지 않다(花未开、月未圆)’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마치 모태마냥 마을 한가운데 움푹 샘처럼 솟는 물들을 담아내는 연못을 보노라니 눈이 부시다. 반원형을 다 둘러 돌아봐도 어디에서도 그 풍경은 탄성이다. 지루할 만도 한데 볼수록 떠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수많은 미술학도들이 하루 종일 앉아 바라보고 또 바라봐도 화폭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스케치만 보일 뿐인가 보다.


오리 두 마리가 꽥꽥거리며 연못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 옆에 한 남학생은 우산을 쓰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햇살이 내려 쬐는 곳에 자리를 잡았으니 고생이다. 하지만 햇살을 맞으며 그리고 싶은 장면이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입구로 돌아오니 바구니 가득 빨간 고추가 담겨있다. 조금 전에는 황홀한 연못 풍경에 시선을 잡혀 미처 이렇게 무방비로 햇볕에 노출된 고추색깔을 보지 못했나 보다. 고추를 말리는 것인가 본데 우리처럼 통째가 아니라 고추를 토막토막 낸 채로 말린다.


연못 주변은 ‘탕(堂)’자가 들어간 이름의 집들이 많다. 일일이 다 찾아 다니기도 그래서 입구에 적힌 이름을 살폈다. 징쎠우탕(敬修堂)을 둘러본 후 골목으로 무턱대고 들어가니 청나라 말기 염상(盐商)인 왕딩꾸이(汪定贵)의 저택인 청즈탕(承志堂)이 나온다.


청즈탕 문을 들어서니 좁은 마당 한가운데 가로 세로 3미터 정도의 우물이 있고 그 속에 유영하는 물고기 몇 마리 옆으로 하늘이 비친다. 위를 쳐다보니 뻥 뚫린 곳으로 하늘이 보이는데 이렇게 집 안에 있는 것을 톈징(天井)이라 한다.


손님을 맞는 따팅(大厅)에 청즈탕이란 편액이 걸려있고 뒤를 돌아보면 입구 문으로 마름모 꼴 안 파란 바탕에 ‘복(福)’자가 걸려 있는데 참 중국답지 않은 색감이어서 참신했다. 이곳에는 우물 대신에 1미터가 채 안 되는 높이의 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놓여있다. 이곳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어서 화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황산시 홍춘 마을의 저택마다 창문이나 대들보, 처마 밑에는 아름답게 나무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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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머우 초기 작품 <국두>를 촬영한 골목길


이 집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문과 처마, 대들보마다 조각된 그림들이 있다는 점이다. 연회를 하는 관리의 모습, 낚시를 하는 모습도 있다. 목조건물로 건축된 것이라 오밀조밀하게 집 구석구석 문양들이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장이머우(张艺谋) 초기 작품인 <국두(菊豆)> 역시 이 골목길을 무대로 촬영한 곳이라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牛’자의 첫 획이 지나는 자리 즈음에는 시장이 있다. 간단한 먹거리가 있어 요기를 할 수 있고 공예품과 토산품을 흥정해 살 수도 있다. 역시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지방이라 죽간(竹简)으로 만든 물건들이 많다.


대나무를 몇 십 개씩 연결해 ‘매난국죽’ 글씨와 그림이 함께 들어간 것, 호랑이가 달을 등지고 울부짖는 모습, 말 8필이 힘차게 뛰어가는 모습 등이 탐이 났다. 들고 다닐 수만 있다면 하나 사서 집에 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산시 홍춘 마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지망생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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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과 호수에서만 그림을 그리는 줄 알았는데 한 좁은 골목을 응시하며 앉아 있는 여학생 뒷모습이 굉장히 ‘그림 같아’서 말을 걸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들 유명한 곳에서 그리는데 여기서 무얼 그리느냐'고 물으니 ‘골목’ 한마디다. 묻는 게 잘못이지 골목에 앉아 골목을 응시하니 당연히 ‘골목’을 그리는 것이겠지. 언제부터 그리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어제부터’라고 한다. 참 궁금했다 무얼 그릴 것인지. 제목이 ‘골목’일까.


골목을 벗어나니 집들의 담장도 조금 낮아지고 밭도 보이고 꽃도 피었고 담장도 쓰러져가며 벽으로 넝쿨도 자라고 있다. 아! 집 마당에서 넘어온 감나무에 노란 감이 열린 집도 보인다. 처마 밑에 주렁주렁 호박도 열리고 있으며 샛노란 호박꽃도 피었다. 아! 우리나라 시골 풍경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곳에서 그저 한 일주일 푹 쉬었다 가면 어떨까.


공터 밭 옆 커다란 바위 옆에 파랗고 하얀 꽃 한 잎이 살짝 피어 올랐다. 이건 후디에화(蝴蝶花)가 아닌가. 우리나라 봄철에 피는 개나리만큼 안후이에서 장시, 후난까지 온 산천에 흐드러지게 피는 이 나비꽃을 만났다. 산과 들에 피는 꽃인데 아마도 홍춘 마을 중심에서 약간 벗어났더니 만나게 됐나 보다.


  
황산시 홍춘 마을 입구. 호수의 돌다리 위에서 본 모습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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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난후로 왔다. 돌다리를 건너 돌아가야 한다. 문득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천천히 다리로 발걸음을 디뎠는데 호수에 떠 있는 수련이 발목을 잡는다. 뒤돌아보니 홍춘 위에자오 연못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인다. 저 좁은 입구 속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옛스럽고 인상적인 촌락이 숨어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할까. 이 다리를 다 건너가면 다시 문이 닫혀 버리는 것은 아닐까.


관료들이 많이 산 마을, '시띠'


홍춘에서 버스를 타고 이번에는 남쪽으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시띠로 갔다. 입구에 들어서면 교주자사(胶州刺史)라는 글씨가 연하게 새겨진 돌 패방이 하나 우뚝 서 있다. 12미터가 넘는 이 패방은 명나라 시대 호문광(胡文光)의 업적을 기려 그의 직위를 그대로 써서 만든 공탑이라 할 수 있다. 홍춘이 왕씨 집성촌이듯이 이곳은 후씨 집성촌으로 당나라 황제의 후손으로 성을 바꾼 후 이곳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황산시 시띠 마을 입구의 '교주자사' 패방
ⓒ 최종명
황산

패방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골목길이 홍춘과는 달랐다. 조금 더 넓은 대신 졸졸 흐르는 개천은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것은 훨씬 담장이 높고 저택도 더 웅장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들 설명이 홍춘은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민들이, 이곳 시띠는 관료들이 많이 산 마을이라 한다.


3칸 2층 건물인 쾅구짜이(矿古斋) 안에 있는 물 항아리에 동전이 많이 떨어져 있다. 나름대로 큰 항아리라 뚫린 천정으로 햇빛이 비치지 않았다면 아마 수많은 동전들을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문 밖으로 나와서 다시 보니 간판에 한글로 써놓은 것은 고마운데 ‘광고제’라 잘못 쓴 것은 안타깝다. 원래 백화문 번체로 ‘재(齋)’인데 ‘짜이(斋)’라 써놓은 것이니 ‘제’라고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그대로 ‘제’라 믿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게다가 영어로 ‘KUANG GU ROOM’이니 어색하다.


꽃무늬가 조각된 문이 정교한 루이위팅(瑞玉庭)을 지나 오른쪽 골목을 돌아 탸오리위엔(桃李园)으로 들어갔다. 후이상(徽商)인 호원희(胡元熙)의 저택으로 ‘수(壽)’자가 도안으로 새겨진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자세히 보니 그림 안에는 ‘복(福)’자 몇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구름과 신선, 동자, 꽃과 나무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다. 매우 공을 들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책방도 있는데 유교적인 선비이면서 또한 상업에 종사한 후이저우 상인들의 이루이상(一儒一商)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좁은 골목 안에 시위엔(西园)과 둥위엔(东园) 저택이 서로 대칭을 하고 있다. 길을 빠져나오니 약간 넓은 공간이 나왔다. 개천 하나가 흐르고 있고 백가(百家)라 할 만큼 많은 저택들의 높은 담벼락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한쪽 귀퉁이에 학생들이 마음에 드는 동선을 찾아 이리저리 붓칠을 하고 있다.


시띠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은 아마 징아이탕(敬爱堂)이 아닐까 싶다. 이곳은 처음으로 정착한 토박이 후씨 조상을 모시는 종사(宗祠)이다. ‘성조영준(盛朝英俊)’과 사세승은(四世承恩)의 편액 아래 각각 ‘효(孝)’와 ‘절(節)’, ‘충(忠)’과 ‘렴(廉)’이 호방한 필체로 적혀 있다. 바로 전 마을사람들이 엎드려 예를 올리는 곳인 것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백대증상(百代蒸嘗)’이란 편액 아래 조종(祖宗)의 부부 신위(神位)가 있다. 참 정교하고 담백하게 그린 초상화인데 빨간 옷을 걸친 할머니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


  
황산시 시띠 마을 후씨 조상 신위를 모시는 사당인 징아이탕(왼쪽)과 주이무탕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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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의 13대 손, 소종의 세자가 일가를 이룬 곳


다시 2미터가 채 안 되는 골목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역시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에 주이무탕(追慕堂)이 있다. 누구를 추모한 것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시띠는 후씨의 집성촌이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13대손인 당 소종(昭宗)인 이엽(李晔)이 오대(五代) 후량(後梁)을 건국한 주온(朱温)에게 살해 당하자 갓 태어난 세자는 유모를 따라 궁을 빠져나가 당시 시랑이던 장시 사람인 호청(胡清)의 보호 아래 성장하게 된다. 이때 성을 바꿔 호창익(胡昌翼)이라 했으며 새로이 일가를 이뤄 후씨의 시조가 된다. 그의 5대손 호사량(胡士良)은 이곳에 터전을 잡은 것이다.


그래서 본당 앞에는 호창익, 호사량과 함께 호청의 신위까지 모셔져 있으며 뒤쪽 편에는 용 벽화와 용 무늬 의자에 앉은 이세민과 함께 두 재상(宰相)인 위징(魏徵)과 이정(李靖)의 모형이 갖춰 있는 것이다.


목조건물 벽에는 수많은 장수들과 문관들의 초상화가 벽화로 그려져 있어 마치 당나라 사당과도 같다. 입구에 용 무늬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그 아래 1998년에 기증한 사람 이름이 적혀 있는데 두 사람이다. 한 명은 이씨, 또 한 명은 후씨이다. 그리고 ‘명청 시대 민가인 시띠촌에 당나라 조상의 후예들이 대를 이어 살았으니 이 용의(龙椅)를 기증한다’고 하고 ‘이씨와 후씨는 오래오래 한가족(李胡千秋一家人)’이라 적힌 팻말이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황산 시띠 마을 안에 있는 민가 창문을 열고 개조한 골동품 가게
ⓒ 최종명
황산

 

마을 곳곳 골목마다 인상적이지 않은 곳이 없다. 학생들은 가는 곳마다 즐겁게 또는 고독하게 화폭과 씨름하고 있다. 창문을 열어젖힌 가게를 구경하며 마을을 빠져 나왔다. 먼 역사로의 시간 여행을 마쳤다. 하나의 마을이 이토록 온전히 보존된 것도 좋지만 민가와 저택이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동선을 장식하고 있으니 정말 ‘그림 속의 고향’이라 할 만하다.


패방 앞으로 흐르는 하천에 수련이 잔뜩 물을 머금고 있다. 빨갛게 연꽃 한 송이가 물 위로 피어났다. 나무 잎들이 무수히 떨어져 물결을 잔잔하게 뒤덮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