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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88] 상하이, 중국과 세계를 움직이다


중국 6개월 발품취재 중 상하이(上海)를 두 번 갔다. 물론 전에도 출장으로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늘 엄청난 성장 속도에 감탄하게 된다. 9월 15일 오후 난징루(南京路)는 주말이어서인지 더욱 붐볐다. 19세기 중엽 외국 열강이 상하이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래 가장 번성한 상업 거리로 '따마루(大马路)'라 불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에서 현대적(摩登)인 백화점인 셴스(先施), 융안(永安), 신신(新新), 따신(大新) 등 4곳이 상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지금도 패션 문화거리로 외국인들이 단골로 방문하는 곳으로 마치 우리나라 명동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세계인들이 활보하는 거리답게 외국인들이 참 많다. 사람들도 모두 활기차고 패션 감각도 화사하고 멋지다. 배낭 메고 발품으로 취재 다니는 사람들은 약간 소외감을 느낄 정도다.


  
상하이 난징루 차 없는 보행거리 초입에 있는 동상 앞에서
ⓒ 최종명
상하이

마침 투어 페스티벌인 상하이 뤼여우제(旅游节)가 시작되는 날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각종 문화 및 여행 관련 행사가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다.


난징루 보행거리 입구에 사람들이 이 유명한 거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풍선을 들고 아빠 등을 타고 엄마랑 함께 웃고 있는 동상이 난징루를 활짝 웃음으로 열어주는 듯하다.


사실 상하이는 기원전 춘추시대 때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의 봉읍지에 불과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작은 어촌마을로 지금도 상하이의 약칭을 '후(沪)'라 하는 것은 진(晋)나라 시대에 고기 잡는 도구라는 뜻의 후(扈)와 도랑이라는 뜻의 두(渎)를 합쳐 후두라고 불렸는데 이 후가 변해서 된 것이다.


명나라 시대 뛰어난 학자이며 과학자인 서광계(徐光启)가 중앙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상하이는 그저 변방의 한 어촌에 불과했다. 또한, 아편전쟁 이후 통상 개항지로 문호가 열리기 전까지는 중국 내에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던 곳이다.


지금은 그야말로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가 됐으니 여행 축제 역시 중국적인 문화 행사를 다 모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사 안내 책자를 보니 연(风筝), 옛고을(古镇), 수향(水乡), 죽(竹), 만두(小笼), 호박(南瓜), 장미(玫瑰), 북(鼓), 채선(彩船), 불꽃(烟花), 아동(儿童) 등 다양한 주제의 전시회와 문화 행사가 예정돼 있다. 



  
상하이 상업거리의 상징 난징루
ⓒ 최종명
상하이


길거리에 학생들이 잔뜩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아 하니 팬클럽 회원들이지 싶다. 저녁에는 개막식이 열리는데 그때 참여하는 가수인 짱뎬페이(张殿菲)를 응원하러 나왔다고 한다. 상하이 유력방송국인 둥팡웨이스(东方卫视)의 남자 가수 등용문을 통해 알려진 신인가수인데 팬들이 외치는 성화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정도로 대단했다. '왕자전하가 상하이에서 가장 사랑스럽다(王子殿下上海最爱)'는 팻말이 특이해 물어보니 그의 별명이라고 한다.


  
상하이 난징루, 여행페스티벌 행사 개막식에 참여한 가수 팬클럽 회원들
ⓒ 최종명
상하이


동서로 뻗은 난징루를 지나면 와이탄(外滩)인데 저녁 약속 때문에 다시 되돌아왔다. 지하철을 타고 푸단(复旦) 대학 부근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난징루 입구에 오니 예쁜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사람들이 많아서 미처 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상하이 서남부에 있는 문화 고을인 펑징진(枫泾镇)을 소개하는 곳이었다. 상하이 부근에 유명한 수향인 주자쟈오(朱家角)는 알고 있었는데 이곳은 처음 보는 곳이라 관심 있게 살펴봤다.


게다가 농민화(农民画) 마을에 단청인가(丹青人家)라는 멋진 이름도 곁들여 있으니 가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난징부터 양저우, 창저우, 수저우를 거쳐오면서 질리도록 수향을 거칠 예정이라 주자쟈오를 비롯해 상하이 부근 옛 마을은 이번 여행에서는 일정에 잡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나중에 꼭 이 펑징의 단청마을을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만 머릿속에 남겼다.


  
상하이 난징루, 여행페스티벌 중 농촌화촌을 홍보하는 펑징 마을 홍보물과 벽화
ⓒ 최종명
상하이


지하철을 타고 푸단 대학 부근에 도착했다. 내가 활동하는 중국 포럼의 소모임인 상해탄 회원들과 모였다. 오월인가(吴越人家)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춘추시대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오나라와 월나라가 차례로 상하이를 지배했으니 그 이름만으로도 상해요리인 것을 알 수 있겠다. 담백하고 약간 단맛이 도는 싱싱한 요리가 나올 때마다 뜻밖에 맛 있는 식당 하나를 찾았다는 감탄이 이어졌다. 비싸지도 않고 채소와 생선, 고기에 상하이식 소스에 듬뿍 담긴 맛이 한결 입안도 개운하게 한다.


푸단 대학 앞에서 학생들과 2차로 술을 마시고 직장인 회원들만 따로 술 한잔을 더 했다. 부글부글 양고기가 익는 가운데 중국 직장 생활의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중국, 그것도 가장 부유한 동네 상하이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참 버거우면서도 부러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하이 한인타운에서 먹은 양고기 꼬치
ⓒ 최종명
상하이


그렇게 짧은 상하이에서의 며칠을 보내고 20여일 동안 닝보, 샤오싱을 거쳐 항저우, 황산과 난징과 수저우를 거쳐 다시 10월 4일 상하이를 찾았다. 수저우에 있는데 옌지(延吉) 연변과학기술대학의 김성준 교수님이 사모님과 함께 상하이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아 서둘러 간 것이다.


상하이 한인타운 우중루(吴中路)에서 쌈밥으로 점심을 먹고 교수님과 쇼핑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교수님들이 황산 여행을 오셨다가 시간을 내 상하이에서 지난 6월 초 백두산 여행에서 뵙고 5개월 만에 다시 만났으니 정말 반가웠다. 조선족의 교육을 위해 봉사하는 열정이 새록새록 다시 떠올라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상하이 한인타운 우중루에서 만난 연변과기대 교수님 부부와 포럼 회원
ⓒ 홍영기
상하이


사실 상하이를 두 번씩이나 온 것은 이유가 있다. 지난번에는 원래 일정에 없었는데 서울에서 동생들이 출장을 온다고 해서 상하이에 갔다가 급한 일이 생겨 바람을 맞은 셈이 됐고 이번에는 원래 일정이었다. 6개월 여행의 마지막을 상하이와 베이징으로 정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난번 라싸 여행에서 만났던 리아씨가 상하이에 있는 외국계 회사에서 새로 일을 시작한다고 해서 약속이 잡혀 있었던 것도 있다. 인도에서 한국으로 갔다가 비자를 만들어서 예정보다 이틀 늦게 온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번에 가지 못했던 와이탄을 갔다. 10월 5일 오후에 버스를 타고 상하이 곳곳을 빙 둘러 둥팡밍주(东方明珠)가 바라다보이는 와이탄에 도착했다. 황푸(黄浦) 강을 사이에 두고 푸둥(浦东)의 상징, 중국 개방과 성장의 이정표처럼 우뚝 선 탑이 늠름하게 서 있다. 468미터의 뾰족한 탑 꼭대기를 바라보니 파란 하늘 사이로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상하이 둥팡밍주가 보이는 와이탄
ⓒ 최종명
중국


와이(外)는 강의 하류를 뜻하니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을 거슬러 영국을 비롯 서양 열강은 이곳에 조계(租界)를 조성했다. 강변 길인 와이마루(外马路)의 많은 사람들은 강 너머 푸동을 보면서 상하이의 발전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 활기찬 미소들이 넘치고 있다. 하지만, 와이탄의 볼거리는 강변도로를 따라 늘어선 옛 건물들이 아닐까.


지금은 중국은행과 공상은행이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1893년 지어진 일본 요코하마 은행이었고 유명 식당인 허핑판뎬(和平饭店)이 있는 샤쉰빌딩(沙逊大厦)는 1872년 영국자본이 건축했다. 특히, 1885년부터 영국황실건축사협회 주도로 모리슨양행(玛礼逊洋行)이라는 건축설계사무소까지 설립해 서양식 건축 거리로 탈바꿈시켰다 한다.


  
상하이 와이탄 샤쉰빌딩, 19세기말 영국자본으로 건축됐다
ⓒ 최종명
상하이


와이탄은 외국계 회사들의 업무 공간으로도 손색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상하이푸둥발전은행(上海浦东发展银行)이 있는 와이탄12호 건물을 살펴보니 세계 각국의 회사가 입주해 있다. 영국계 펀드 회사와 독일계 우유회사를 비롯 스페인과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상하이 영사관 등의 간판이 보인다. 각 건물마다 세계 유수의 회사와 관공서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다.


상하이의 발전은 곧 중국의 성장을 상징할 정도다. 게다가,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마오쩌둥 사후 중국 공산당 중앙을 장악하면서 '상하이방(上海帮)'이라는 그룹이 등장했다. 보통 상방(商帮)은 상인들의 지역적 연합을 뜻하는데 근대 청나라 말기 이후 관상(官商)의 등장으로 정경유착의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특히, 호설암(胡雪岩)과 성선회(盛宣懷)는 각각 좌종당(左宗棠)과 이홍장(李鴻章)의 비호 아래 관상의 극치를 이루기도 했다.



  
상하이 와이탄 다마루 강변에서 둥팡밍주를 바라보는 사람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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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의 상하이방은 중앙집권적 체제 아래 경제력을 기반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상징적인 사례가 됐다. 천안문사태 진압을 적극 지지한 당시 장쩌민(江澤民) 상하이 시 서기가 국가주석이 되면서 상하이방은 정치전면에 나서게 됐다.


당 내 상하이방 견제를 위해 안후이(安徽) 출신이며 공산주의청년단(共青团)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후진타오(胡锦涛) 주석이 그 뒤를 이었다. 향후 차기와 관련해 궁칭퇀이 지지하는 리커챵(李克强)과 고위관료 2세 그룹인 타이즈당(太子党), 또 상하이방이 지지하는 시진핑(习近平) 중 누가 차기 주석이 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초나라 춘신군의 봉읍지인 션청(申城) 상하이를 상징하는 동팡밍주의 높이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중국을 떠올리면서 대부분은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가 있는 고대 도시의 상징물들을 연상한다. 하지만 상하이를 흐르는 강물을 따라 서구열강이 열어 놓은 어촌 동네가 불과 1세기 만에 세계적인 도시, 중국을 대표하고 중앙정치를 좌우하는 도시로 성장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하이 와이탄, 신중국 최초 상하이시장이던 천이의 동상과 중국은행, 공상은행 건물
ⓒ 최종명
상하이


사람들이 오고 가는 광장 한편에 동상 하나가 조용히 서 있다. 신중국 성립 후 최초의 상하이 시장이며 외교부장을 역임한 천이(陈毅)를 기념하는 동상이 꽤나 어색해 보인다.


베이징 행 기차표를 예매하고 상하이로 온 리아씨에게 상해탄 모임 사람들을 소개했다. 부디 상하이에서 중국시장 마케팅에 대해 많이 배우길 당부하기도 했다. 비가 몹시 내렸다. 이틀 동안 꼼짝 없이 태풍 속에 숨었다가 9일 베이징을 향했다. 9시간 59분 걸린다는 D열차. 정말 신기한 것은 단 1분도 틀리지 않게 딱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 철저한 대중교통수단의 진보가 진정 '중국적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합리적이며 독특한 문화를 지닌 중국이기에 단 한마디 말로 평가할 수 없다. 베이징 역에 도착해 숙소로 가는 내내 이제 6개월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해야 할 시점인데도 한마디로 중국을 다 말하기 어렵구나 하는 생각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