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이저우고성 팔각패방의 주인공은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허국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휘주 문화 ③ 정감, 웅촌과 후이저우고성 남송의 유학자 주희가 ‘정감쌍현리(呈坎双贤里), 강남제일촌(江南第一村)’이라 극찬했다. 장쑤, 안후이, 저장, 장시, 푸젠 일대 강남에 얼마나 마을이 많을지 상상조차 쉽지 않다. ‘최고의 마을’이란 찬사를 받은 정감은 황산 남쪽 40km 지점에 있다. 안내판에 건괘(乾卦)인 관음산을 비롯해 팔괘를 뜻하는 8개의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팔괘촌(八卦村)이라고 부른다. 홍등이 무수히 걸렸고 ‘워먼더중궈멍(我们的中国梦)’ 아래 풍년을 뜻하는 펑(丰)이 보인다. 가을이면 고추나 옥수수, 호박 등을 말리는 쇄추(晒秋) 행사가 열리는 광장이 있다. {계속}
무이산 고촌의 설인귀 사당…장사만 잘하면 되지[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푸젠 고촌 ④ 무이산과 샤메이고촌 중국은 유네스코 등재 유산이 55개다. 현재 이탈리아와 함께 공동 1위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으로 나눠 보호하는데 '문화'와 '자연' 모두 인정하는 복합유산도 있다. 중국은 쌍중유산(双重遗产)이라 부르는데 모두 4곳이다. 황산, 태산, 아미산과 함께 푸젠 서북부의 무이산(武夷山)이 포함된다. {계속}
'이십사효'가 새겨진 고촌… '튼튼하게만 자라다오'야말로 유물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푸젠 고촌 ③ 구이펑고촌과 타이닝고성 푸젠 중부의 여우시(尤溪)는 사상가 주희의 출생지다. 공묘 대성전에는 열두 명의 제자 십이철(十二哲)이 협시하고 있다. 천년도 훨씬 더 지나 유교를 새로이 집대성한 주희만이 직계제자가 아니다. 그는 관직에 올랐지만 남송 정권의 세태를 비판하며 집필과 후학 양성에 힘쓴다. 부친 주송이 현위로 근무하던 때 태어난 주희는 어린 시절부터 사숙에서 공부했다. 사숙은 주희 사후 사당으로 변했으며 황제는 남계서원 편액을 하사했다. {계속}
유교와 상인이 만나 지혜와 인심이 풍부한 휘주마을[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강서 휘주문화 우위엔 ② 리컹에서 옌촌까지 이학명촌(理學名村)으로 알려진 리컹(理坑)은 1206년 여경양(餘景陽)이 처음 이주했다. 여씨 집성촌이다. 진사 16명, 7품 이상 관원 36명, 문인 학사 92명이나 배출했다. 산골마을에서 많은 인재가 나왔으니 예부터 자칭 '서향(書鄕)'이었다. 시조인 여도잠(餘道潜)은 1118년에 주희(朱熹) 아버지 주송(朱松)과 함께 진사에 등과한다. 두 사람은 모두 우위엔이 고향이다. 푸젠성 여우시(尤溪) 현위로 재직할 때 태어난 주희는 사당이 있는 우위엔(婺源)을 자주 찾았으며 큰 발자취를 남겼다. {계속}
여행은 의식주를 별다르게 해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옷은 챙겨가고 호텔에서 매일 잠을 잔다. 여행이 이어지고 힘도 생기려면 먹어야 한다. 혼자 배낭을 메고 여행을 가면 ‘식(食)’ 때문에 가장 난감하다. 더구나 중국은 여럿이서 요리를 나눠 먹는 원탁에 익숙하다. 최근 중국 민란의 흔적을 찾아 ‘나 홀로’ 취재여행을 다녀왔다. 주희(朱熹)는 『집주(集注)』에 ‘아침은 옹, 저녁은 손(朝曰饔, 夕曰飧)’이라 남겼다. 옹손(饔飧)마다 수저의 친구는 풍부한 국수였다. (계속)
휘주문화 마을이자 주자를 신봉하는 리컹李坑에서는 7품 이상 관리가 36명이나 배출됐다. 16명이나 진사에 급제했다. 마을 가운데 장원부状元府를 들어가 보기도 했다. 휘황찬란한 유교문화의 보고와도 같은 마을답게 문인의 향기가 난다. 하얀 담장에 검은 기와의 분장대와粉墙黛瓦에 비첨飞檐과 창각戗角이 멋진 지붕이 건축의 위상이 반듯하다. 석조, 목조, 전조의 삼조三雕가 집의 품격을 가일층 돋보이게 한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주는 돌로 집의 중심 자리를 잡고 있는 마을이다. 아이들과 어른, 노인 모두 평화로운 표정이다.
휘주문화가 남아있는 우위엔婺源 리컹李坑을 찾았다. 리컹은 주자朱子를 숭상하는 품격 있는 마을이자 학자가 많이 배출된 것으로 유명하다. 명나라 시대 이부상서吏部尚书를 역임한 여무형余懋衡, 청나라 시대 사마司马를 역임한 여유추余维枢을 비롯 유명한 역사인물이 많다. 마을로 들어서면 평화로운 문화 마을의 풍광을 담는 학생이 많다. 조그만 하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라 쪽배를 타고 들어가도 된다. 운치를 살려보려고 배를 탔다. 하천을 따라 조성된 마을은 여행객이 꽤 있어서 조금 번잡한 느낌이 든다. 배를 타고 마을을 오고가는 사람들 모습이 평화롭게 보인다.
오악보다 아름답다는 황산 가는 길에 있는 정감呈坎은 팔괘촌八卦村으로 유명하다. 주희朱熹가 '강남제일촌'으로 칭찬한 마을이다. 에 따르면 '음은 감이고 양은 정'이라는 이기통일, 천인합일의 팔괘풍수에 따라 마을이 구성됐다. 미로처럼 생겨 미혼진迷魂阵으로 조성됐다고도 한다. 당나라 말기에 거주하기 시작한 나씨罗氏 집성촌으로 천년 세월을 지니고 있다. 팔괘에서 감坎은 물을 상징하는데 마을에 들어서면 수량이 풍부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한, 정감 마을은 정呈 글자처럼 아흔아홉개의 골목으로 이뤄진데다 많은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서민들이 올망졸망 모여 산다. 마을로 들어서니 영흥호 호수를 지나 좁은 골목을 따라 13세대 조상 라동서罗东舒 선생의 사당에 이른다. 석조石雕와 채회彩绘도 강남제일사당에 어울리는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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