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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중국영화캐기-02] 제작금지 감독 러우예의 <쑤저우허>

▲ <쑤저우허> 영화 포스터. 중국 상영 DVD 버전 ⓒ 에센셜 필름프로덕션


쑤저우(苏州)를 떠올리면 고즈넉한 강남의 정원과 바다처럼 푸른 타이후(太湖)를 떠올린다. 항저우(杭州)와 더불어 중국 미인의 산실이라는 '깨끗한'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영화 <쑤저우허(苏州河)>는 낭만적인 쑤저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쑤저우 남단에서 시작돼 상하이(上海)로 흘러 드는 쑤저우허. 칙칙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하천 주변에는 고단한 현실을 지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다. 기존 중국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적나라한 카메라 앵글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쑤저우허를 따라 상하이를 거쳐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배를 따라 영화는 시작된다. 쑤저우허의 회색빛 강물이 화면에 드러나기 전에, 더 정확하게 말해 자막도 화면도 없는 남녀 주인공 대화로부터 시작한다.

<쑤저우허>의 한 장면. 메이메이가 연인인 촬영기사와 이야기하고 있다.

여자: 훗날 내가 사라지면, 마다(马达)가 한 것처럼 날 찾을 거야?
남자: 어
여자: 끝까지 찾을 거야?
남자: 어
여자: 죽어도 찾을 거야?
남자: 어
여자: 거짓말!

여자 목소리는 메이메이(梅梅)이고 남자 목소리는 영화 내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한 남자이다.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화면은 쑤저우허를 담아낸다. 수면 위에 떠오르듯 쑤저우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 그대로를 카메라는 빠르게 또는 슬쩍슬쩍 보여준다. 흔들리면서도 빠른 이 커팅은 카메라 시점이 배 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딘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남자는 카메라를 들고 메이메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고 있다. 돈만 주면 무엇이든 찍어주는 비디오 촬영기사다. 쑤저우허 곳곳에 '촬영업무(摄影服务)'라는 글자와 호출번호를 새기는 그는 호출을 받고 허름한 술집으로 간다. 그곳에는 수조 속에서 금발 머리와 인어로 분장하고 손님의 시선을 끄는 일로 살아가는 메이메이가 있다. 

둘은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된다. 영화 <화양연화>에 나오는 노래 <예상하이(夜上海)>를 배경으로 둘은 쑤저우허 부근을 배회한다. 그러나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메이메이에게 마다(马达)가 찾아온다. 그를 사랑했던 연인 무단(牡丹)으로 착각한 것이다.

똑같이 닮았지만 자신이 찾는 무단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한 마다는 매일같이 메이메이를 찾아와 무단과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메이메이는 자신의 연인에게 마다의 사랑이야기를 전달하게 된다. 그리고 '죽어도 자신을 찾을 거야?'라고 묻게 된 것이다.

영화 속 카메라는 메이메이가 자신의 집으로 오는 모습을 시작으로 쑤저우허의 평범한 사람들의 오토바이나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 베란다에서 밖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비추다가 다시 슬쩍 메이메이를 등장시킨다.

그런데 메이메이와는 옷차림과 머리 모양이 다르다. 그렇게 마다의 연인 무단의 시점으로 진입한다. 메이메이와 무단을 1인 2역으로 연기하는 중국 최고의 연기파 여배우 저우쉰(周迅)이 왜 <쑤저우허>의 주인공이어야 하는지를 관객들이 공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쑤저우허>의 여주인공으로 1인2역을 잘 소화한 저우쉰. ⓒ 큐큐닷컴 (qq.com)
 
저우쉰은 중국에서도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저장(浙江)성의 서북부 취저우(衢州) 출신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라는 공리(巩俐)나 장쯔이(章子怡)보다 배우로서의 자질은 훨씬 뛰어나다.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들이 5세대 감독군의 현란한 테크닉에 잠식되지 않고 6세대 젊은 감독들의 거칠면서도 진지한 마인드와 호흡을 잘 맞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펑샤오강(冯小刚) 감독의 <야연(夜宴)>과 천커신(陈可辛) 감독의 <루궈아이(如果爱)>으로 알려졌지만 1991년에 데뷔한 베테랑이다. 최근 2008년 <리미의 차이샹(李米的猜想)>, <화피(画皮)>와 쉬커(徐克) 감독의 <뉘런부화이(女人不坏)> 등 화제작에 모두 출연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쑤저우허>의 여주인공으로 1인2역을 잘 소화한 저우쉰. ⓒ 큐큐닷컴 (qq.com)

<쑤저우허>를 통해 파리국제영화제(巴黎国际电影节)에서 최우수여배우상(最佳女主角奖)을 수상하는 등 각종 영화제에서 연기력을 검증 받았다.

그녀의 연기는 날이 갈수록 더 물이 오르고 있지만, <쑤저우허>에서의 순수하면서도 애절한 캐릭터와 퇴폐적이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캐릭터를 동시에 1인 2역으로 멋지게 소화했다. 중국 내에는 저우쉰을 빼고 이 배역을 논할 배우는 아무도 없을 듯하다.

<쑤저우허>를 이끌어 가는 이야기의 주체는 마다이며, 마다는 메이메이에게 그리고 다시 이 영화의 나레이터 역할을 하는 촬영기사인 연인으로 이어진다.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손과 다리를 통해서, 간혹 뿜어내는 담배연기, 혼자 거푸 마시는 보드카로서만 메시지를 전달할 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화자(活者)이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남성상, 또는 권위적인 힘을 은근히 폭로하고 싶었던 감독의 배치일지도 모른다.

이제 영화는 본격적으로 애절한 사랑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살다가 우연히 훔친 오토바이로 배달하는 일이 주업인 마다. 그의 오토바이를 타게 되는 무단. 막 사랑에 눈 뜬 소녀 같은 무단은 잘 생긴 외모에 솔직하고 착한 성격의 마다에 이끌려 사랑하게 된다.

<쑤저우허>의 한 장면. 처음 만난 마다와 무단. ⓒ 에센셜 필름프로덕션

무단의 운동화 끈이 풀린 것을 세심하게 묶어주는 마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끈을 서로 연결하게 된다. 그리고 무단은 사랑의 시작과 동시에 아픔을 암시하듯 술병과 인어인형을 들고 마다의 오토바이를 탄다. 둘은 그 이전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애틋한 감성으로 향해 간다.

하지만 마다는 무단을 납치해 돈을 갈취하려는 음모에 어쩔 수 없이 가담하게 된다. 마다에게 납치된 무단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보드카를 들이킨 채 도망친다. 마다가 쫓아오지만 '쑤저우허'에 자신의 몸을 던져 버리고 만다. '인어로 변해 돌아와 다시 널 찾을 거야(我会变成一只美人鱼回来找你的)'라는 말을 남기고 인어인형과 함께. 무단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건에 연루된 마다는 체포된다. 이후 쑤저우허에 인어가 나타난 것을 봤다는 소문이 난다.

<쑤저우허>의 한 장면. 메이메이는 무단과 마다의 죽음 앞에서 오열한다. ⓒ 에센셜 필름프로덕션

그리고 감옥에 갔던 마다가 출옥해 돌아온다. 그녀가 살아있다고 믿고, 인어가 되어 돌아올 거라 믿고 찾아 다닌다. 어느 날 무단과 똑같이 생긴 메이메이와 우연히 부딪히게 된다. 금빛 가발을 쓰고 수조 속에서 인어로 분장한 메이메이를 무단으로 착각한 것이다. 메이메이 뒤를 밟던 마다는 그녀의 연인인 촬영기사와 만나기도 한다.

메이메이는 자신은 무단이 아니라고 거듭 이야기하지만 마다의 슬픈 사연을 들을수록 그들의 못다 이룬 사랑이자 마치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자신이 마다가 찾는 그 무단이 아니라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메이메이에게는 사랑의 가치, 그 소중함을 깨우치는 계기라는 것을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메이메이는 연인을 떠난다. 아니 사랑을 찾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쫓아가는 촬영기사, 카메라 속의 메이메이의 표정은 마치 이 세상 모든 남성, 그들의 거짓말에 대한 증오를 담은 눈빛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진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모든 게 돌아갔다. 보통 사람들은 사랑하고 결혼하고 즐겁게 피로연도 한다. 마다는 촬영기사를 다시 찾아와 무단을 찾으러 떠난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마다는 촬영기사에게 소포를 보낸다. 부근 소도시 편의점에서 무단을 찾았다는 편지와 함께 보드카를 선물로 보내온다.

<쑤저우허>의 한 장면. 무단과 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스스로 함께 쑤저우허에 몸을 던지기 전, 마지막으로 노을을 받으며 서로 기대고 앉아있다. ⓒ 에센셜 필름프로덕션 


다시 만난 마다와 무단은 보드카를 함께 마시고 노을 빛에 물든 얼굴을 서로 기대고 아주 평화롭게 상하이의 명물 둥팡밍주(东方明珠)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날, 그들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시체로 발견됐다. 시체 확인을 위해 강가로 간 촬영기사는 무단이 메이메이와 정말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메이메이를 찾는다.

메이메이 역시 그들의 시체를 확인한 뒤 충격에 휩싸인다. '거짓말인줄 알았다. 무단은 마다가 지어낸 사람인 줄 알았다. 날 속인 게 아니었네'라며 눈물 짓는다.

메이메이는 다시 예전처럼 연인과 사랑을 나누지만 '내가 사라지면 날 찾겠냐'고, '죽을 때까지 찾을 수 있냐'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 다음날 촬영기사가 그 동안 서로에 대해 나누지 않았던 진심을 이야기하려고 그녀의 집을 찾지만 그녀는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날 찾아봐(来找我吧)'라는 쪽지만 남긴 채. 보드카를 마시며 독백처럼 사랑에 대해 읊조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미 지나갔으니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겠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 여전히 흔들리며.

<쑤저우허>의 한국 상영 포스터. <수쥬>라는 이상한 이름의 제목으로 바뀌었음. SUZHOU를 수쥬로 한 듯한데, 어떤 사정이 있었는 지 모르나 너무나도 이상한 번역 네이밍이다! ⓒ CNP엔터테인먼트

'쑤저우허'에 빠지면 인어가 되어 돌아온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비극적 사랑이야기 <쑤저우허>를 거칠지만 색다르게 그린 감독은 러우예(娄烨)이다.

2006년에 영화 <이허위엔(颐和园)>을 중국 정부의 허가 없이 유럽영화제에 출품해 상영금지 및 5년간 영화제작 금지 조치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얻은 감독이다.

작가주의 계보를 잇는 6세대 대표 감독으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자신은 세대 구분으로서의 6세대 속에 편입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6세대라는 구분 또는 범주라는 것이 영화 세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개념일 수도 있으니 일견 이해가 된다.

하지만, 카메라 워킹이나 영화 주제의식은 <중경삼림(重庆森林)>이나 <화양연화(花样年华)>의 왕자웨이(王家卫)와 닮아 있다는 비판 또는 질시도 있다.

비극을 미학으로 표현해 내는 느낌이 그렇게 보인다. 아마도 암울하면서도 슬프고 비극적인 사랑을 통해 중국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스크린 위에 우아하게 드러내려는 중국 감독들의 고민이 묻어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쑤저우허>의 흔들리는 카메라, 생략과 속도감 있는 편집 속에 담아내려는 리얼리티는 영화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했고 유럽과 일본, 동남아 등에서 개봉됐다. 2000년 우리나라에서도 <수쥬>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다.

영화 <쑤저우허>를 한번 보면 그저 그런 영화이거나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영화일 수도 있다. 평범하지 않은 스토리전개 때문이며 지극히 흔들리는 카메라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두 번 세 번 보면 볼수록 더욱 재미있는 영화이다. 10년 전 영화치고는 현실과 비극에 관한 슬픈 사랑이야기로는 드문 수작임을 느낄 것이다.  
    

중국의 젊은 감독 러우예. <쑤저우허>를 비롯해 수준 높은 작품을 많이 연출했는데 최근 상영금지, 제작금지 등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영화제작 중이라는 소식이다. ⓒ 예술과투자



수쥬 (2001)

Suzhou River 
8
감독
로우 예
출연
주신, 화종카이, 야오안리엔, 가굉성, 나이 안
정보
드라마 | 중국, 홍콩 | 83 분 | 2001-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