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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20] 명나라 멸망과 이자성의 민란 ①


1620년 명나라 황제 중 가장 무능하고 어리석은 암군(暗君)으로 평가되는 희종이 즉위한 후 무사안일과 쾌락에만 몰두하자 환관 위충현(魏忠贤)은 세도정치로 전횡을 일삼으니 사회는 문란하고 정치는 부패했다. 위충현은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사대부 집단인 동림당(东林党)을 탄압했으며 감찰과 특무를 전담하는 명 왕조의 비밀경찰조직 동창(東廠)을 장악하고 중앙 관료 사회는 물론 지방의 행정과 군사 조직까지 쥐락펴락하는 공포정치를 조장하니 농민을 비롯한 일반 백성의 삶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암울했다.


1622년 문향교도(闻香教徒) 서홍유(徐鸿儒), 왕호현(王好贤), 우홍지(于弘志) 세 사람은 중추절에 산동 운성(郓城), 하북 계주(蓟州, 현 계현蓟县), 경주(景州(현 경현景县)에서 동시에 궐기하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밀고자가 발생해 봉기를 준비하던 골간들이 체포되자 서홍유는 6월에 단독으로 봉기를 일으켰으며 산동 조주(曹州, 현 하택菏泽) 일대의 백련교도와 압제에 허덕이던 운성 지역의 농민들과 함께 피의 맹세를 하고 머리에는 홍건을 묶고 손에는 칼과 창을 움켜쥐고 주변 촌락을 차례로 점령한 후 민란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기반한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온 후 선종과 정토종 등 실천을 중시하고 중생 구원까지 염원하는 대승불교(大乘佛教) 사상이 전파되자 민간의 다양한 욕구를 받아들여 질적으로 변모해온 백련교 역시 민란의 역사와 함께 부침을 계속했다.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득도하는 소승불교보다 중생 구원 사상인 대승불교의 교의는 어쩌면 민란 지도자의 정치적 목적이나 추구하는 이상에 더욱 적합했다.


여우 꼬리에서 향기가 나다


▲ 백련교 일파인 문향교는 함정에 빠진 여우를 구해주고 얻은 꼬리에서 향기가 났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하북 난주에서 창립됐다. 사진은 난주고성의 입구. ⓒ 최종명


백련교의 일파인 문향교는 대승교라고도 불리는데 북경 동쪽 지방인 하북 난주(滦州, 현 난현滦县)에서 왕삼(王森)이 창립한 민간종교로 비밀리에 교도를 조직하고 하북, 산동, 산서, 하남, 섬서, 사천 등으로 신도를 확장해나갔다. 북경 서쪽 보명사에서 여우(吕牛)가 개창한 서대승교(西大乘教)와 함께 동대승교라 불렸다. 특히 자신이 우연하게 함정에 빠진 여우 한 마리를 구해줬는데 그 보답으로 야릇한 향기가 풍기는 꼬리를 남겨두고 떠났다는 말로 신도들을 규합했기에 문향교라고 불렸다.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를 혼합하고 연등불, 석가불, 미래불을 신봉하면서 세계의 종말과 창세의 신을 주장하며 미륵의 도래를 갈구하는 구세주 사상을 설파했다.


왕삼은 신도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와중에 분쟁에 휘말려 체포됐다가 뇌물을 주고 방면된 후 수도 북경을 무대로 선교하다가 또다시 체포된 후 옥사했다. 교주의 권위를 이어받은 셋째 아들 왕호현과 제자 서홍유와 우홍지는 신도의 세력을 믿고 봉기를 통해 말세를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며 민란을 조직했던 것이다.


서홍유는 봉기 후 곧바로 중흥복렬제(中兴福烈帝)로 옹립됐으며 대승흥승(大乘兴胜)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관직을 두는 등 새로운 정권의 출범을 선포했다. 당시 농민들의 환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부녀자들이 나팔꽃을 꺾어 민란군의 마차에 장식했으며 곡식과 음식을 던져줬으며 다투어 환호하는 모습이 마치 극락세계인 듯 하다.'고 지방 현지에 적혀 있을 정도였다. 운성과 거야(钜野)를 점령한 후 백련교 수령들을 파견해 산동 남부 일대로 진공해 운하가 지나가는 마을을 장악하고 관군의 조운(漕运)을 통제했다.


사전에 수립한 면밀한 계획대로 민란에 참여한 가족들을 송나라 시대 민란 근거지였던 양산(梁山)에 안치하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민란군은 군기를 엄중하게 유지하며 투쟁의 예봉이 미치는 지방마다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했고 아버지와 남편의 복수를 하려는 남녀노소가 분연히 일어나 수만 명의 세력으로 불어나니 각 지방의 경공만상(惊恐万状)한 관료와 지주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기 바빴다.


서홍유는 다시 운하를 건너 조운의 요충지인 추현(邹县, 현 추성邹城)과 등현(滕县, 현 등주滕州)를 점령해 물자 공급의 명맥을 끊어버리자 명 조정은 '이곳을 잃었으니 국가 진로가 궁핍해졌다.'고 한탄했다. 전군 동원령을 내렸으나 만주족과의 요동전쟁으로 인해 여력이 없었기에 지방의 무장조직인 향용(乡勇)까지 가세해 민란군 진압에 나섰다. 이때 맹자의 고향 추성에 위치한 맹부(孟府)의 주인으로 66대 직계자손 맹승광(孟承光)도 진압에 나섰다가 참패를 당했으며 민란군에 의해 일가족이 살해 당했다.


서홍유는 추현을 근거지로 삼고 연주(兖州), 곡부(曲阜), 패현(沛县), 일조(日照), 담성(郯城, 현 임기临沂)의 운하들을 차례로 장악해 산동 남부를 종횡무진으로 내달렸다. 명 조정은 동원 가능한 산동의 관군과 향용에게 민란군을 포위하라고 거듭 명령을 내려 연합작전으로 민란군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다. 6월말 형세가 불리해지자 서홍유는 사태를 총체적으로 관망해 냉정하게 분석한 후 침착하게 대응했으며 적극적으로 전세를 뒤집고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킨 다음 용감하게 전진했다. 6월 말 관군이 공격해오자 거야와 운성을 버리고 동쪽으로 군사를 이동시킨 후 운하를 세 번 건너 관군의 후방을 습격하니 관민 연합군은 추현에 대한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7월에는 관군의 위치를 정찰해 강한 부분을 피하고 약한 고리를 향해 군사를 이동시켜 경항운하(京杭运河)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군량미 공급 통로 휘산(微山)의 하전(夏镇) 나루터를 장악했다. 이곳을 통과하던 양식 선박 40척을 중간에 탈취해 관군의 병력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했으며 곡부를 함락시켜 대량의 군량미와 병기를 손에 넣었다.


전국 각지에서 서홍유의 민란에 자극을 받은 봉기가 급속히 확산됐는데 문향교 동지 우홍지가 봉추회(棒棰会)를 조직한 후 하북 백가둔(白家屯), 조다(赵大)와 유영명(刘永明)도 애산(艾山)에서 봉기했다. 9월까지 산동, 하북, 하남과 멀리 사천의 백련교도들도 서홍유를 본보기 삼아 봉기했으니 봉화가 만천소기(漫天烧起)하듯 전국적인 기세로 불타올랐다. 민란의 주모 그룹인 교주 왕호현과 서홍유, 우홍지와 함께 유영명은 문향교 민란의 사대금강(四大金刚)으로 불렸다. 유영명은 안민왕(安民王)으로 추대됐는데 서홍유와 연계해 전투를 벌렸다.


서홍유 민란은 위세가 하늘을 찔렀지만 그 활동 범위는 산동 남부 일대에 머물렀고 계획대로 각 현과 운하를 장악했지만 승리의 여세를 몰아 보다 넓은 투쟁 전략을 설정하지 못했다. 관군의 토벌에 맞서 각 성을 고수하는 소극적인 작전으로 일관했다. 9월에 이르러 연주를 잃어버린 후 추현을 고수하는 전술로 관군과 맞서느라 3개월을 포위 당하고 있었으며 11월에 이르러 양식이 소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성과 운명을 함께 할 결심으로 맞섰지만 적장의 귀순 심리전에 말렸으며 뜻밖에도 서홍유는 배신자의 간계에 빠져 생포됐으며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 일가친척 18명과 함께 북경으로 압송돼 목숨을 잃었다.


▲ 문향교도 서홍유은 운하가 지나는 산동 일대를 무대로 벌어진 민란으로 명나라 농민투쟁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은 경항운하가 지나는 양주 부근 운하 유람선과 야경. ⓒ 최종명


서홍유의 희생 이후에도 산동 일대의 민란군은 항복하지 않고 교전을 이어갔지만 차츰 관군에게 희생되는 숫자가 늘었다. 6개월에 걸친 서홍유의 문향교 민란이 불꽃을 피우지 못하고 끝났지만 불과 7년도 지나지 않아 명나라 말기 농민투쟁의 점화를 초래한 명나라의 고상종(敲丧钟)이라 평가할 만 하다. 


백련교를 모태로 발전한 문향교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시기 다시 소생했다가 청나라 건국 후 당시 교주 왕가(王可)가 정부에 투항해 고위 관직을 얻기도 했으며 사후에 강희제로부터 원훈을 받기도 했다. 이에 고무된 각 지역의 교도들이 친목모임을 명분으로 종교활동을 열었다가 잔혹하게 진압됐으며 다시 포교 금지령을 당한 후에 청차문교(清茶门教)로 개명했다. 건륭제 이후 제2의 전성기가 도래해 가경제 때 발생한 천리교 민란에 합세한 후 자금성 공격에 참여했다가 왕씨 집안이 와해되는 등 큰 곤욕을 당했다. 청차문교는 점차 쇠락했지만 동대승교의 교의 사상은 기층 농민들 사이에서 계속 전승돼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시기에 일관도(一贯道) 조직으로 부활했으며 지금도 대만과 홍콩 등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명나라의 종말을 외치기 시작하다


명 희종 말년 섬서 지역은 기근에 시달려 가뭄과 병충해가 난무했고 전답은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굶어 죽는 백성이 도처에 널린 아표편야(饿殍遍野)의 지옥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풍부한 남방의 대규모 전답은 당시 활발했던 해외와의 교역 때문에 북방으로 공급되지 못해 양식이 더욱 궁핍한 처지였으니 그에 상응해 곡물가격이 끊임없이 오르고 있었다. 조정의 재정 수입도 급격하게 줄어 옹색한 판국이라 백성에 대한 구휼은 말 뿐이었니 살아갈 방도가 전혀 없어진 농민들은 막판에 몰려 이판사판 정이주험(铤而走险), 봉기 밖에 살아갈 돌파구가 없었다.


섬서 부곡(府谷)에서 왕가윤(王嘉胤)이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후 사망했고 왕자용(王自用)이 뒤를 이었다가 병사하자 고영상(高迎祥), 장헌충(张献忠), 나여재(罗汝才)가 연이어 민란 지도자로 떠올랐다. 민란 각 부대를 전전하며 걸출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이자성(李自成)은 북경을 점령해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1628년 왕가윤의 봉기 이후 1644년까지 중원을 휘젓고 다닌 강호의 영웅들이 벌린 치열한 '민란 무협'은 결국 동북의 만주족에게 권좌를 내놓는 계기가 됐다.


▲ 명나라 말기 황토고원의 척박한 섬서 북부에서 많은 민란영웅이 등장해 봉기를 주도했다. 사진은 섬서 북부도시 유림의 홍석협. ⓒ 최종명


왕가윤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작은 탄광에서 광부로도 사는 등 주거 부정의 깡패나 다름 없이 살다가 변방 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와 봉기를 일으켰다. 목숨만 겨우 붙어 있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농민들은 물론 군량 배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하급 병사들, 거리를 떠돌던 부랑아들까지 몰려들어 갈수록 세력이 불어났다. 수덕(绥德)에서 봉기한 후 합류한 왕자용(王自用)과 함께 황용산(黄龙山)을 점령해 근거지를 확보했다. 1년 전 섬서 백수(白水)에서 봉기한 농민 왕이(王二)가 1628년 겨울 귀순해 합류하자 명실상부한 민란군의 모습을 갖추고 명나라 말기 민란의 서막을 열었다.


왕가윤은 3만 명에 이르는 조직이 갖춰지자 왕을 자칭하며 명 조정의 병부상서 홍승주(洪承畴)가 통솔하는 관군 주력부대를 격퇴시키자 섬서, 산서, 감숙 일대에 널리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다. 왕가윤의 성공을 눈 여겨 본 섬서 지역의 청년 장수들이 앞다투어 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이자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처음 참가한 왕좌괘(王左挂) 부대가 의천(宜川)에서 봉기했으며 두 번째 의탁했던 장존맹(张存孟) 부대는 낙천(洛川), 세 번째 주인 고양상은 안새(安塞)를 무대로 민란 역사에 등장했다. 그 밖에도 왕대량(王大梁)은 한남(汉南, 현 한중汉中 남부), 나여재는 연안(延安)에서 봉기한 민란지도자였으며 이자성과 라이벌이던 장헌충도 1630년 고향 정변(定边)에서 등장하는 등 수많은 맹장들이 출현했는데 대부분 왕가윤 민란군 휘하에 합류했다.


1630년에 이르러 왕가윤이 주도하는 민란군은 수만 명의 군사와 병마가 집결했으며 휘하 장군만해도 백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군 조직을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각각 통솔하는 승상 관직을 도입했다. 그런데 왕가윤이 고향의 요묘촌(尧峁村) 마을의 명문세가인 장씨 집안의 규수를 빼앗아 혼례를 올렸는데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계기가 됐다. 장씨 집안은 자기 딸이 도적떼에게 강제로 뺏긴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복수를 다짐했다.


1631년 여름 토벌군 대장 조문소(曹文绍)는 격전을 치를 때마다 매번 패퇴하자 왕가윤의 처남 장입위(张立位)가 토벌군 병사로 근무하는 것을 알고 거짓으로 투항하는 계책을 꾸몄다. 민란군에 투항한 후 누나의 도움으로 왕가윤의 신임을 얻어 호위 무사가 된 장입위는 왕가윤과 동향이자 민란군 병사 왕국충(王国忠)과 공모해 기회를 엿보다가 만취해 장막에서 잠을 자는 왕가윤을 살해하고 도주했다. 왕가윤의 나이가 40세 정도였다고 하니 한참 꽃을 피울 시기에 희대의 맹장들을 두루 거느린 민란 주모자가 허망하게 사라져버렸다.


배신자들은 명 조정에서 봉록을 먹으며 살았는데 장입위는 청나라 군대와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 왕국충은 이자성 민란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한 후 면직 처분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수덕(绥德)을 지키고 있다가 이자성의 조카 이과(李过)에 의해 생포됐다. 이자성은 즉시 흉수이자 배신자를 취지정법(就地正法)으로 다스리라 명령했으니 체포 현장에서 바로 극형에 처해졌다.


왕가윤의 사망 후 당시 36개 군영의 장수들은 20여 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민란군 맹주로 왕자용을 옹립했다. 왕자용은 이듬해 1632년 하남 북부로 진출해 산서 심수(沁水)를 포위했으며 다시 북쪽으로 진격해 유차(榆次), 수양(寿阳)을 거쳐 태원(太原)을 공략했지만 토벌군에 가로막혔다. 하남으로 후퇴한 후 하북 무안(武安)에서 전투 중 중상을 당해 은신처에서 병사했다.


왕자용 뒤를 이어 민란 연합군의 맹주가 된 고영상은 말 판매상을 했기에 말을 탄 채 화살을 잘 쐈으며 힘이 장사였고 전투 중에 흰 옷과 흰 두건을 둘렀으며 늘 선두에 서서 병사를 이끌었다. 왕가윤의 근거지 황용산에 합류한 후 민란군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왕자용을 옹립한 36개 군영 회의 당시 이자성, 나여재, 장헌충 부대를 휘하로 둔 세력을 기반으로 틈왕(闯王)이란 호칭으로 불렸다. 왕조를 멸망으로 몰며 직접 황궁을 장악한 희대의 민란 주인공 이자성이 바야흐로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 명나라 말기 초기 민란군 지도자 왕가윤의 뒤를 이은 왕자용은 20여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산서 유차, 수양, 태원까지 진출했다. 사진은 유차고성 앞 광장. ⓒ 최종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