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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 2012 - 3] 500년 전 명나라 역참 흔적 그대로 남은 지밍이

 

허베이 위현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동북쪽으로 1시간 30분가면 줘루(涿鹿)가 나온다. 치우(蚩尤)'탁록대전' 신화로 유명하지만 역사적 근거는 없다. 황제의 성이니 샘이니 포장해 명승지가 있지만 허망한 발길이 되기 십상이다. 오히려 베이징을 떠나 서쪽으로 가는 첫 역참 마을이 있어 발걸음이 가볍다.

 

현에서 다시 30분 가량 가면 지밍산(雞鳴山)이 나타나는데 역참은 이 산자락 아래 있다.울퉁불퉁하게 바위들이 솟았고 나무 한 그루 없이 민둥산이 길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닭 울음' 우는 산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하다.

 

 북위 시대 지리서 <수경주(水經注)>에 따르면 기원전 춘추시대 조(赵)나라를 세운 조양자(趙襄子)의 고사가 나온다. 조양자는 당시 통치자이자 매형이기도 한 대(代)나라 왕을 만찬으로 유인해 살해하고 나라를 멸망시킨다. 누이이자 대왕의 부인은 돌에 날카롭게비녀를 갈아서 자살한다. 사람들이 넋을 위로해 산에 사당을 지었다. 비녀를 갈아 만든 산이라는 마계산(磨笄山)이라 불렀는데 사당 위에 매일 꿩(山雞)이 울었다고 해 계명산(雞鳴山)이라 개명했다. 지금의 지밍산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지밍이촌(雞鳴驛村)이다.

 


▲ 지밍이 역참의 동쪽 대문. 역참이자 성곽인 역성!

 

지밍이는 산 아래 마을에 형성된 역참이자 성곽인 역성(驛城)이다. 칭기스칸이 서역을 정벌할 때 이곳을 처음 역참으로사용했지만 지금의 역성 형태는 명나라 시대인 15세기 초엽 조성됐다. 우편 전달과 숙박, 군사 시설을 두루 갖춘 독특한 구조로 보존 가치가 높다. 현존하는 전국 최대 역참이자 유네스코의 '세계위험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전국', '세계'라니 입장료(30위안)가 비싸다는 이야기다.

 

매표소를 지나 벽돌 성곽에 새겨 놓은 지밍산역(雞鳴山驛) 4글자가 또렷한 대문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동쪽 문으로 옹성(甕城)구조의 좁은 공간이다. 웅성웅성 몰려 있던 사람들이 가이드를 해 주겠다고 달라붙는다.물론 공짜일 리 없다. 혼자 다니면 마을 구석구석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마을 사람 중 힘깨나 좀 쓰는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며 푼돈이나 벌자고 따라오는 게 영 귀찮다. 큰길을 따라 30여 미터를 줄기차게 쫓아온다.

 


역참 지휘서와 서태후, 광서제가 하루 머문 허씨 집


마을 지도를 보면 얼추 돌아다니기 쉽다. 큰길이 약 4~500미터이니 반대쪽 대문까지 한눈에 보일 정도로 길지도 않다. 가까운 곳에 역참 최고 관리가 머물며업무를 보던 사무실인 역승서(驛丞署)가 보인다. 청나라 강희 35년부터 사용했던 곳으로 문위로 거창한 기와를 둬 위엄을 세웠다.

 

몇 걸음 더 가면 지휘서(指揮署)가 나온다. 이곳은 역승서 이전에 사용하던 관공서였으며 사합원 형태의 목조 건물로 오진연환(五进连环) 구조였다. 문을 다섯 번 넘어가며 건물이 서로 붙어 있는 형태였다. 앞쪽은 관공서로 사용하고 그 뒤쪽으로 주거 공간이 있는 형태였는데. 지금은 각각 독립 가옥으로변해 있다

 


1900년 서태후와 광서제는 황궁을 떠나 시안까지 도피했다.
지밍이 역참에서 하루 머문 흔적인데 초상화의 글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써 있다.

 

강아지랑 놀고 있던 아가씨가 입장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왜 또 보자는 거냐고 했더니 입장권 한쪽을 찢으며 입장료에서 일부를 배분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 역시 재밌고 합리적인 나라다. 

 

두 번째 독립 가옥은 하()씨 일가가 살던 곳으로 1900년 청나라 서태후와 광서제가 하룻밤을 묵은 곳이다.건물 옆 좁은 협벽(夾壁)'하룻밤의 행궁(一夜行宮)'이라는 간판이 선명하다. 안으로 들어서니 벽돌 벽에 '홍희접복(鴻禧接福)' 4글자가 양각돼 있다. '자희태후의 큰 덕으로 복을 이어받다'는 뜻이니 분명 서태후의 흔적이다.

 

청나라 말기 부청멸양(扶清滅洋)을 천명한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군하자 황급히 황궁을 떠났다.서태후와 광서제는 이곳 역참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시안(西安)까지 도피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마당에는 빨래가 널려 있고 문 앞에는 검은 개 한 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다. 두 개의 연하늘색 쪽문과 창문이 한낮의 오후마냥 여유롭다. 방으로 들어서니 벽에 서태후와 광서제의초상화가 걸려 있다. 청나라 황실 초상화가 그렇듯 의관을 갖추고 의젓하게 앉은 모습이 익숙하다.

 

서태후 초상화에는 문종자희황후(文宗慈禧皇后)라고 적혀 있는데 보통 태후라고 부르지 황후라고는 하지않는 것도 이상하지만 길거리에서 사 온 초상화라는 냄새가 너무 풍긴다. 재미있는 것은 강희제 초상화의 덕종광서황제(德宗光緒皇帝)라는 글자의 방향이다. 서태후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광서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간 것이다. 그렇게 세인들은 서태후와 광서제의 등을 돌려놓고있다.

 

초상화를 다른 곳에서 산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조카이자 양자인 광서제는 자립하고 자강하려 했지만 서태후의 권력에 밀려 숨조차 쉴 수 없던 시절이다. 게다가 총애하던 진비(珍妃)는 황궁을 떠나기 전 서태후의 명령에 의해 우물에 투신해 자살하지 않았던가.피난 중 하룻밤 함께 숙박했지만 광서제의 슬픔을 짐작해 글자의 방향을 달리한 것은 아닐까? 몸은 아니어도 글자만이라도 반대로 세워 억울한 심정을 이입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태후와 광서제가 묵었던 역참 내 집. 지금도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방 양쪽 끝으로 칸막이 없는 침실이 있다. 두 모자가 하룻밤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침실 서너 발자국 거리가 꽤나 멀어 보인다. 침실 아래는 아궁이가 있어 불을 뗄 수 있는 구조다.당시 피난 당시는 여름이라 아궁이를 지피지는 않았을 것이다. 겉창을 여닫는 문이있긴 하지만 3면이 막혀 있는 답답한 공간이라 꽤나 더웠을 듯하다.

 

방안을 두루 돌아보고 있는데 이 집 아주머니가 아는 척을 한다. 태후와 황제 초상화 옆에 걸려 있는 액자 사진 속주인공이다. 가족 사진을 걸어 두는 마음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여기서사는데 불편하지 않은가 물었더니 아무 문제 없다고 한다. 낡은 TV와시계, 거울이 있고 항아리 몇 개와 차 담는 통과 함께 있는 전기 밥통이 너무 현대적이라 어색했다.

 

아궁이 대신에 방 가운데 난로가 놓여 있고 주전자에는 물이 끓고 있다. 땔감이 마땅하지 않아 군불을 때지 못하는 듯하다. 역참에 아궁이에 불 때는 숙소가 있느냐고물어 봤다. 예상대로 아마 없을 것이지만 가능도 할 것이라고 한다. 한겨울 눈 내리는 역참에서 군불에 하룻밤을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참에서 바라본 민둥산인 지밍산. 춘추시대의 조양자의 배신와 관련된다.

 


지밍이 역참의 오래된 이발소

 

다시 밖으로 나와 이청커잔(驛城客棧)앞에서 지밍산을 바라보니 민둥산이 허허벌판에 불쑥 솟은 모습이다. 큰길을 따라 걸어가는데하얀 가운을 입고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길래 하는데 창문 옆에 이발(理髮)이라 써 있는 이발소다. 파란 하늘 아래 낡은 흰색 벽, 나무로 만든 지붕 처마와 창틀과 복을 비는 붉은 글씨가 포근한 느낌이다. 한가한 마을 늦은오후의 여유가 풍긴다.

 

마당 가득 옥수수를 말리고 있는 집으로 들어섰다. 사람들 인기척 없는 집이건만 하늘색과 조화를 이룬누런 옥수수만이 해바라기처럼 햇살을 머금고 있다.

 

천천히 반대쪽 대문인 서문까지 걸었다. 흰 수염이 난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볼일을 보러 가는 걸음도 반갑다. 담벼락에 옹기종기 앉아 햇볕을 쪼고 있는 사람들도 한 없이 여유롭다. 역참 광장 에는 그림자 벽인 잉비(影壁)가 있고 커다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뭇가지가 그늘을 지어 햇살 받고 있는 할아버지의 움푹 패인 주름을 가리고 있다.

 


지밍이 역참의 그림자 벽인 잉비 앞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

 


지밍이 역참에 있는 문창궁. 파란 하늘 아래 햇살을 받고 앉은 할아버지 할머니

 

골목골목 돌아가 문창궁(文昌宮)에 이르니 거기에도 할머니 한 분이 빵모자를 쓰고 앉아 있다. 보통 문창궁은 '문화창성(文化昌盛)'을 지향하는 공자 사당이거나 유교 학원이다.역참 자제들의 책방이었으며 해방 이후 초등학교로 사용하고 있다.

 

골목 하나를 돌아가니 무대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지금은 한가한 마을에 별스런 공연이라고는 없어 보지만가무승평(歌舞升平)이라는 현판만은 또렷하다. 노래와 춤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뜻이니 한때 역참에 온 사람들의 한밤의 오락 시간이 떠오르기도 한다

 

바로 맞은 편 태산행궁(泰山行宫)앞으로 가니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시는 사당이라고 적혀 있다. '짙푸른 노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동악대제(東嶽大帝)의 딸이다. 음양설에서 동악은 해가 떠오르는 곳, 바로태산을 말하며 생과 사를 주관하는 신의 딸이니 태산을 옮겨 온 행궁이라 할만하다. 태산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로불리며 도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신이다. 태산묘라고도 부르는 행궁은 벽하원군을 공봉(供奉)하는 사당으로 멋진 '태산 여신'에 관한 벽화가 있다고하는데 문이 잠겨 있어 아쉬웠다.

 


지밍이 역참에 있는 도교 사당 태산행궁. 동악대제의 딸이자 여신인 벽하원군을 공봉하는 사당이다

 

중국의 여느 고성처럼 지밍이 역시 불교, 도교, 유교가복합적으로 융합돼 있다. 불교 사원인 영녕사(永寧寺)와 보도사(普渡寺), 도교 사원인 태산행궁과 성황묘(城隍廟), 재신묘(財神廟),용신묘(龍神廟)가 있으며 유교 사원인 문창궁과 성벽 위에는 '문장의 신'을 상징하는 괴성루(魁星楼)가 있다. 동쪽과 서쪽에는 대문을 짓고 남쪽과 북쪽에는 성곽 위에 각각 수성묘(壽星廟)와 옥황묘(玉皇廟)가 세워 있다. 장수의 신과 신의 왕을 각각 배치해 역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역참의 중심부인 지휘부를 기준으로 동북쪽에는 역창(驛倉)이 있고 서북쪽에는 대마(大馬)가 있다. 대마는 역참에 함께 오는 말이 쉬는 곳이다. 대마가 민간인들이 타고 오는 말 마구간이라면 아래에 있는 서마(西馬)는 군용 마구간이다. 동문에서 대마로 가는 길은 말이 주로 다니는 마도(馬道)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 옆과 뒤쪽으로 별도의 말 통로가 있던 셈이니 역참 마을이아니면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일 것이다.

 

큰길에 앉아서 타이머로 사진을 찍었다. 저 멀리 동문이 훤히 보인다. 동쪽으로 와서 서쪽으로 떠나가거나 그 반대이거나 그 옛날 역참으로 번성했을 때는 왁자지껄하는 사람들로 넘쳤을 것이다.말발굽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밍이 역참은 그저 옛 모습 그대로의 '활화석'처럼 남았다고 홍보하는 관광지일 뿐이다. 서태후와 광서제 덕분에 '하룻밤의 행궁'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의 인기척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지밍이 역참의 긴 성곽

 

대문을 빠져 나와 성곽을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역사와 문화의 이해는 들어설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깊이 빠져들수록 그 느낌도 더욱 새삼스럽다. 높이 11미터에 이르는 성곽의 동서남북 사방의 길이는 2킬로미터에 이른다.  

 

성곽을 따라 걸었다.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가며 힐긋거린다. 그 사이 오토바이를 탄 사내가 후다닥 지나간다. 세월을 담고 무심하게 서 있는 성곽 너머로 유난히 맑은 하늘이 펼쳐있다. 성곽을 다 벗어나면 지밍산 자태가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그 앞으로 화물 트럭 하나가 쏜살같이 지나친다. 아무리 굉음 질주라 해도 역참의 역사를 담아 가는 기억을 짓누르기는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