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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33] 션양, 황타이지 무덤과 동북군벌의 장솨이푸

5월 27일 새벽 5시 션양베이(沈阳北) 역에 내렸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속이 불편했다. 화장실을 찾아야 한다. 기차에서 볼일을 보지 않은 것이 영 아쉽다. 짐을 맡기는데 8위엔이나 달라고 한다. 이거 참 급한 거 알았나.

기차 역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서 볼일을 보고 나오니 바로 옆에 패스트푸드 코너가 있다. 급할 때는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인가 보다.

이른 아침이라 숙소 구하기가 애매하다. 일정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2004년도에 왔던 기억이 났다. 당시에 랴오닝(辽宁) 방송국 미팅을 하러 왔었는데, 그때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씨타(西塔)에 왔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우선 움직이자. 다시 짐을 찾았다. 아마도 가장 단기간 짐 맡기고 가장 비싼 비용을 지불한 기록이 될 듯.

씨타는 한국인 동네라 할만하다. 중국어 한마디 못해도 살아갈 수 있는 곳. 그래서 정겹기도 하면서 약간 지겹기도 하다. 여러 가지 편리하지만 때로는 노래방, 술집, 옷 가게 등 소비를 조장하는 거리의 모습이 낯 뜨거울 때도 많다.

PC방에 가서 민박집을 찾았다. 따렌(大连), 딴동(丹东), 지안(集安)을 거쳐오면서 민박집에서 계속 머물렀더니 다소 지겨워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다. 북한식당이 있는 호텔. 예전에 왔을 때 기분 좋게 묵었던 곳이었다. 새벽에 도착하느라 계획을 바꾼 것이다. 한국인 또는 조선족동포가 운영하는 민박집은 입실시간에 별로 구애를 받지 않으니. 한곳을 찾아 연락했더니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잠을 좀 잘 생각이었는데 밤새 편하게 잠을 자면서 와서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곧장 밖으로 나왔다.

베이링꽁위엔(北陵公园) 내에 있는 짜오링(昭陵)으로 갔다. 청나라 태종인 황타이지(皇太极)와 황후의 능이다. 태조인 누루하치(努尔哈赤)와 황후의 능원인 똥링꽁위엔(东陵公园)인 푸링(福陵)과 누루하치의 아버지를 비롯해 조부, 증조부, 고조부, 백부 등 친족 능원인 용링(永陵)과 함께 관와이싼링(山外三陵)이라 불린다. 관와이라 함은 산하이관(山海关) 바깥이겠다.

  
▲ 황태극 동상 .
ⓒ 최종명
황태극

공원에 들어서 쭉 뻗은 길을 따라 시선을 따라가면 황타이지의 동상이 정면에 들어온다. 동상 오른쪽은 호수가 펼쳐져 있고 왼편은 중일(中日) 우호를 상징하는 몇 개의 자그마한 정원들이 있다. 중화민국 시절인 1927년에 조성된 공원이니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다.

여느 지방 호수와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 마침 조선족 동포들 한 가족이 환갑잔치 겸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독특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아들 등에 업혀 웃는 화기애애한 장면을 보니 기분이 좋다.

1651년에 만들어진 짜오링을 들어서니 고궁의 분위기가 확 풍긴다. 산시(陕西) 씨엔양(咸阳)에 있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능묘를 탕짜오링(唐昭陵), 베이징(北京) 밍스싼링(明十三陵)에 있는 명나라 12번째 황제인 목종(穆宗) 주재후(朱载垕)의 능묘를 밍짜오링(明昭陵)이라 하니 이곳은 칭짜오링(清昭陵)인 것이다.

  
▲ 정홍문과 주홍색의 벽 .
ⓒ 최종명
정홍문

멋진 아치인 파이러우(牌楼)와 쩡홍먼(正红门) 양 옆으로 용 무늬가 새겨져 있는 벽이 반갑게 시선을 붙잡는다. 역시 용은 황제의 상징이다. 주홍색 벽에 짙은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녹색의 용이 좌우로 대칭으로 새겨져 있으니 은근하게 어울리는 그 색의 조화도 그렇지만 웅비하는 듯한 자태가 볼수록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 깊게 보지 않으면 그저 그런 용으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 서배전 내 모습 .
ⓒ 최종명
서배전

쩡홍먼을 지나 길게 뻗은 션다오(神道)를 따라 걸어가면 바로 정면에 베이팅(碑亭)이 보이고 그 뒤로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팡청(方城)에 둘러쌓인 능묘가 나타난다. 팡청을 지나면 양 옆으로 부속 건물이라 할 러우(楼)와 뎬(殿)이 각각 2개씩 동서(东西)를 나눠 이름을 걸고 있다. 두 개의 뎬은 제례용품들이 보관되고 관리되던 곳이다.

롱언뎬(隆恩殿) 안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품격이 느껴진다. 궁궐의 또 다른 표현이다 보니 능묘의 건물도 그것과 사뭇 닮았다.

짜오링의 묘를 둘러보려면 팡청 위로 올라가야 한다. 성곽 위에 오르니 시야가 넓어지면서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성곽 길을 따라가면 초승달 형상으로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서 있는 위에야청(月牙城)이 보이고 바로 그 뒤가 빠오청(宝城)이고 그 중심에 빠오띵(宝顶)이 있고, 당연하겠지만 그 아래에는 띠꿍(地宫)이 있다.

성곽 위 길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독특한 구조로 이뤄진 자오링의 모습을 봤다. 빠오띵 위에 오롯이 자란 나무 한 그루는 왜 그렇게 동그란지. 무덤 위에서 자라서인지, 원과 원으로 서로 묶고 묶여 있으면서 평화로운 분위기를 보인다.

  
▲ 잔디가 깔린 보청과 나무 한 그루 솟아 있는 보정 .
ⓒ 최종명
보청

그리고, 중국 어느 곳 황제의 무덤보다 더 인간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무덤과 이렇게 가깝게 열려있으면서 두루 다 둘러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니 말이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왕조에 치욕을 안겨준 황타이지의 무덤.

더 넓게 본다면 아마도 만주벌판을 같이 달리던 우리 민족의 정서와 큰 원으로 잇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했던 것 역시 그 옛날 옛적 우리와 역사와 문화, 전통을 공유한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아직 여름이 오지 않았는데도 꽤 덥다. 두루 둘러봤더니 땀이 솟는다. 길거리에 관광객들이 꽤 많다. 한 꼬마 아이가 아빠랑 즐겁게 노는 모습이 참 귀엽다.

  
▲ 꽃이 만발한 북릉공원 입구 .
ⓒ 최종명
북릉공원

공원 문을 나와 시끄러운 소음 앞에 섰다. 그리고 붉은 꽃잎 뒤에 선 짜오링에 대한 기억을 깊이 담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밤새 기차를 탔더니 역시 피곤하다. 게다가 짜오링도 다녀왔더니 더 그렇다. 하루 쉬었다. 저녁 무렵 션양(沈阳) 씨타(西塔) 거리를 나가볼까 생각했는데, 한국인들 많은 유흥가에 별 볼만 한 게 있을까 싶어 그만뒀다. 방에서 곧 있을 '장춘연길비즈니스포럼' 취재를 위해 자료조사를 했다. 게다가 날씨도 비가 뿌리는 게 심상치 않다.

다음날(5월 28일), 점심 먹고 오후 2시 지나 밖으로 나왔다. 날씨가 시원해서 좋았다. 오후에 취재를 한 후 저녁에는 션양에 있는 후배 여자친구를 만나볼 생각으로 전화를 했다.

베이징(北京)에서 중국어 공부할 때 통우(同屋)인 대구 후배가 결혼할 여자친구이다. 몇 번 같이 보고 둘이 친해지더니 어느덧 결혼한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중국여자와 한국남자가 결혼해서 사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좀 말해주고 싶기도 했고.

하여간 베이징에 있을 때 같이 놀러도 다니고 둘이 친해지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고 거들었으며 충고도 했던 터라 일말의 책임도 느끼기도 했으니 션양에 온 김에 만나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약속이 있다고 한다. 친구들이랑 선약이. 물론 늦게 연락한 것도 있긴 하지만 아쉬웠다. 하여간 둘이 10월에 결혼한다니 평생 사이 좋게 잘 살길 바란다. 그때 가기 힘들 거 같으니 미리 축하한다.

버스를 타고 시내 중심에 있는 짱스솨이푸(张氏帅府)로 갔다. 마침 길거리에 물붓으로 글씨를 쓰는 아저씨랑 한참을 놀았다. MBC 취재진이 자신이 쓴 글씨를 취재해 갔다고 자랑하기도 하고 온 동네 나라 관광객들에게 다 관심을 보이는 재미난 사람이었다.

짱스솨이푸는 동북군벌 짱줘린(张作霖, 1875~1928)의 따솨이푸(大帅府)와 그의 장자인 짱쉬에량(张学良,1901~2001)의 쌰오솨이푸(小帅府)로 나뉜다. 관저이기도 하고 사택이기도 한 이 옛 건물들은 당시 군벌의 힘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장씨수부 입구 .
ⓒ 최종명
장씨수부

쓰허위엔(四合院) 형식을 띤 자택과 왕푸(王府)의 위상까지 갖춘 관저로 나뉘어 있다. 용마루와 처마가 가지런한 벽면에는 홍씨(鸿禧)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기러기처럼 다정하게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는 뜻이니 흥미로운 의미라 하겠다. 인상적인 입구를 지나 쓰허위엔으로 들어가니 아담하면서도 포근한 집의 모습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문을 들어선다. 즉 싼진(三进) 쓰허위엔이다. 전통양식과 민속적인 풍모를 조화한 건축물로 각광받을 만하다.

곧게 뻗고 수령이 꽤 됐을 법한 나무들이 마당에 한두 그루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실내는 짱줘린의 가계도가 있고 당시 군벌의 위상에 대한 안내도 있다. 복잡한 가계도를 지닌 짱줘린을 보면서 예전에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인 <안개비연가>가 생각났다.

동북군벌인 아버지와 8번째 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핑(依萍) 역할을 한 짜오웨이(赵薇)를 중심으로 슬픈 가족사를 그린 드라마. 의협심 강하고 다감한 신문기자 슈환(书桓) 역할을 한 구쥐지(古居基), 재치 있고 다소 덤벙대지만 착한 사진기자 두페이(杜飞) 역할의 쑤여우펑(苏有朋), 마음씨 착한 루핑(如萍) 역할의 린씬루(林心如) 등이 출연한 드라마, 아마 기억날 것이다. 원 제목은 '칭션션위멍멍(情深深雨蒙蒙)'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짜오웨이의 슬프면서도 귀여운 모습이 떠올랐다.

  
▲ 대청루 .
ⓒ 최종명
대청루

이곳의 백미는 따칭루(大青楼)이다. 관저이어서 업무를 보는 곳도 있고, 사택이어서 주거공간이기도 하다. 짱줘린이 구상한 이 웅장한 건물은 유럽식 풍의 3층 건물이다.

일일이 실내 분위기를 전하기는 어렵지만 아주 세심하게 기획된 건축물이면서 예술품에 가깝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각 방마다 꾸며놓은 장식들도 당시 위세 등등했던 군벌의 힘을 과시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 실내 집무실 .
ⓒ 최종명
집무실

따칭루 동편 구석에는 작은 사당이 하나 있다. 가묘라고 알려졌기도 하지만 관제묘이다. 짱줘린은 관우를 매우 숭상했던 인물이라 전해진다. 그래서 솨이푸 내에 관우를 모셨다고 한다. 작고 구석에 있어 언뜻 지나치기 쉽다. 따로 관제묘를 지키는 아가씨가 하루종일 서 있다.

짱줘린의 장자 짱쉬에량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서안사변으로 역사적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유약했던 그는 당시 정치적, 군사적 상황에서 일정하게 쟝제스(蒋介石)의 영향력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후 타이완과 미국 하와이 등지에서 거주하였으며 무려 100세를 넘기는 천수를 누렸다.

그는 세 번 결혼했는데 본처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동거했으며 천수를 함께 누렸던 짜오이띠(赵一荻)의 고거가 바로 옆에 있다. 1928년부터 3년간 거주했던 이 집은 그녀가 스스로 설계하고 장식한 집이라 한다. 짱솨이푸가 남성적인 모습이라면 역시 이곳은 아주 섬세한 여성의 손길이 깃든 집이다.

  
▲ 조일적 고거 내부 모습 .
ⓒ 최종명
조일적

짱쉬에량과 짜오이띠는 1964년에 정식으로 결혼한다. 그리고 2000년에 짜오이띠가, 그 다음해에 짱쉬에량이 사망해 합장된다. 평생을 동고동락했던 그들이 진정 행복했을까. 1925년에 결혼해 1963년 합의 이혼한 본처인 위펑즈(于凤至)를 두고 1929년부터 동거했던 사이인 그들은 노년에 다정했던 모습이 자주 언론에 드러났다 한다.

진정한 사랑 그리고 결혼이란 게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짱쉬에량과 짜오이띠 두 사람의 삶을 살펴보노라니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마침 하늘이 시꺼멓게 변했다. 갑자기 천둥번개가 친다. 그리고는 소낙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 먹구름이 몰려오는 장씨수부와 조일적 고거 하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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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거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 했으나 포기했다. 거의 빈 택시가 없다. 버스를 탔다. 잘못 타서 반대 방향으로 갔다. 거기서 다시 택시를 잡아보려 했는데 마찬가지다. 중국도 비가 오면 택시가 왕이다. 다시 기차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기차 역 앞에서 겨우 합승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길거리에서 2시간 가까이 갈팡질팡했더니 피로가 엄습. 따뜻한 물에 씻고 밥 챙겨 먹고 나니 졸린 게 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