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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4] 녹림과 적미, 농민의 야망이 되다 ①


▲  왕망의 고향 한단의 황량몽 사원. 한단지몽 주제의 벽화.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주공의 나라를 흠모해 개혁을 도모했으나 '하룻밤의 꿈'처럼 허무한 실패의 길을 걷고 있었다. ⓒ 최종명


왕망, 주공을 꿈 꾸다


중국 역사에서 칼부림 없이 황제를 찬탈 또는 선위로 역성혁명을 이룬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왕망(王莽)과 무조(武曌)다. 무조는 당나라 시대 7세기경 주周(역사에서 무주武周)를 국호로 통치한 여성 황제 무측천(武則天)이고 왕망은 1세기경 한나라를 앞뒤로 나누며 신(新)나라를 세워 좌지우지했다. 


무측천이 수렴청정의 지위를 이용해 양위를 강제해 나라를 세웠고 권력을 잃고 태상황으로 물러난 후에도 황후로서 장례를 치렀다. 이렇듯 여성이었지만 황족의 범위 내에서 벌어진 역성이었다. 왕망은 황제로 군림한 세월만 엇비슷한 15년을 빼면 전혀 다른 맥락이다. 건국과 통치, 죽음조차 완전 색다른 돌출 행동이었기에 한나라를 다룬 역사서마다 객관적인 평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으리라 예측할 수 있다.


삼국시대를 봐도 동탁(董卓), 조조(曹操), 사마의(司馬懿)도 허수아비 황제를 두고 상국이나 제후, 태사 및 태부 등 유아독존으로 통치했던 인물은 많다. 조조나 사마의 후손은 후광을 얻어 결국 창업 군주로서 자리를 잡아 새로운 나라를 구축하기도 했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 독이 됐던 것인가? 왕망은 외척 출신이라는 배경과 급진적 이상주의적 개혁가라는 평가와 함께 실패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아마도 후대 역사에서 자기 편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왕망은 전국시대 위나라 제후국의 식읍이던 원성(元城, 하북 한단邯郸 동쪽 대명大名 현) 사람으로 후작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탓에 가난했다. 한원제의 황후가 된 고모 효원황후(孝元皇后)의 도움으로 황궁에서 살았는데 공손한 태도와 총명한 기품을 지녀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그는 태황후의 섭정으로 조정을 좌지우지하자 숙부들의 지위를 이어받아 38살의 나이로 대사마가 됐다. 왕망은 점차 정치의 중심에서 정점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딸을 왕후로 삼고 황제 측근에서 보필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았다는 부명(符命)을 드러냈고 드디어 선양을 통해 황제에 등극했다. 


한무제가 통치하던 100여 년 전 북방민족 흉노 등과 영토 전쟁을 벌이기 위해 소금과 철을 전매하고 농지뿐 아니라 상업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등 나라의 창고를 과도하게 축적했다. 이로 인해 서민들의 삶은 점차 궁핍해졌으며 개혁에 대한 요구가 심각하게 도래하고 있었다. 한나라 초기의 통치철학이던 도교적 기풍은 점차 유교적 학풍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덧 왕망의 개혁, 그것도 유교 통치이념을 전면에 내세운 변화를 갈망하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  20세기 중국 최고 문학가 노신의 고향 소흥(紹興), 마을 입구 조각 초상화가 대문호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녹림서옥'이라 쓰며 '인민'의 고통을 함께 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 최종명


간신이나 아첨하는 집단에 의해 황제에 올랐는지 모르나 적어도 왕망은 유교 경전이 향하는 이상적인 나라, 공자가 그토록 갈구했던 인물 주공을 닮고 싶었다. '주공재세(周公再世)'는 주나라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왕망이 스스로 황제까지 되면서라도 개혁하고자 했던 꿈이었다. 통치 이념으로서의 철학적 체계나 국가의 이상을 제대로 구현하거나 보장했던 한나라 왕조가 아니었기에 개혁을 원했던 왕망은 '신'나라를 건국하고 싶어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명예혁명'으로 황제가 된 왕망은 주나라의 정전법을 참고해 토지 개혁을 단행했는데 한나라 초기부터 시행된 군국제(郡國制) 기반의 지방 제후와 호족의 정치적, 물적 토대를 제한하면서 농민의 소작농으로의 전락을 타파하려는 제도였다. 유교경전 <주례>에 기반해 사회전반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화폐 개혁, 상공업 부흥, 노비 매매 금지 등은 의욕적인 건국 정책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쌓였던 사회적 모순은 유교이념을 현실화할 노하우가 부족했고 점차 중앙집권적 통치로 강제하자 기층 민중의 고충은 개선되지 않고 더욱 피폐화되는 악순환을 낳았다. 지방 호족들은 호시탐탐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서역의 흉노 및 고구려와의 무력 충돌을 낳아 나라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다.


녹림, 천자의 문을 열어라


▲  녹림군을 통해 한나라의 부흥을 이끌어낸 광무제 유수를 기념해 친필어제를 내린 건륭제. 승덕(옛 열하)에 있는 피서산장에서 ⓒ 최종명


서한 말년에 왕광(王匡), 왕봉(王鳳)은 녹림산(綠林山)에서 농민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녹림' 또는 '녹림호한'은 산속에 은거하며 관청에 항거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일반명사가 됐다. 1925년 북양(군벌)정부의 교육부 관리 유백소(劉百昭)와 일부 관변 평론가들은 여자사범대학생들의 정치투쟁을 지지하던 교원들을 '토비(土匪)', '학비(學匪)'라고 매도했는데, 이에 작자는 자신의 서재를 비꼬는 투로 '녹림서옥'이라 기재했다.


20세기 문학가 노신(魯迅)의 <화개집(華蓋集)> '화개집속편' 머리말인 제기(題記) 중 '1925년 12월 31일 밤, 녹림서옥 동쪽 벽 밑에서 쓰다'라는 말에 나오는 '녹림서옥'에 대한 주석이다. 녹림산에서의 민란이 서기 17년이니 거의 1900년이나 지나 '토비'보다 다소 그럴 듯한 '학비'까지 들먹이는 것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었다. 민란을 대표하는 말로 녹림의 파괴력을 드러내는 멋진 말이 아닌가? 


호북 형문(荊門)에 있는 대홍산(大洪山)이 1988년 장가계와 구채구와 함께 국가급 풍경구로 비준됐다. 계곡, 표류, 온천, 동굴, 불교성지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갈대로 휩싸인 해발 1,488m 고원에 위치한 녹림채가 있어 그 어떤 명승지보다 유명하다. 도대체 녹림산의 산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왕망의 신나라가 이상정치를 열심히 시술하고 있었지만 농민이건 평민이건 먹고 사는 일이 날로 힘들어 갔다. 흉노와의 변방 전쟁으로 국력 낭비가 심해 전반적으로 GDP 수준은 극악해졌으니 왕망은 왕창 망하기 일촉즉발이었다. 더구나 남방 지역은 자연재해와 흉년의 연속이었고 안타깝게도 인육까지 입에 대는 인상식(人相食) 사례도 빈번했다고 <후한서(後漢書)>가 기록한 걸 보면 참혹했던 실상이 피부로 느껴진다. 


놀랍게도 중국 역사에서 식인에 관한 근거 자료는 생각보다 많다. <장자(莊子)>에 당당히 등장해 공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고대 최고의 민란 두목이자 도적인 도척(盗跖)은 사람의 내장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한서>를 시작으로 중국 24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20세기에 이르러서도 노신의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에 나오는 홀인(吃人)은 식인의 뜻이기도 하다. 


서기 17년 강하(江夏) 군 신시(新市, 지금의 경산京山) 일대에 흉년이 들어 황량했다.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산과 들에 나가 냉이를 캐먹었지만 풀조차 말라버리자 사람들은 서로 먹자고 싸우고 무법천지가 되기 일쑤였다. 이때 늘 사람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근심을 해소해주며 명망이 두터웠던 왕광은 아수라장에서도 사태를 잘 해결해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왕광은 인자한 왕봉과 함께 점점 폭도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로 나서게 됐다. 기근은 흉흉한 인심을 낳고 대책 없이 소모적인 감정 싸움만 깊게 하는데 왕광과 왕봉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모두 다 살아남을 방안을 강구했다. 유일한 솔루션은 곧 지방 관청에 대한 공격, 그리고 약탈의 시작이었다. 


<후한서> '유현전(劉玄傳)'에 따르면 처음에 수백 명으로 시작한 약탈은 왕광이 농민들을 이끌고 녹림산으로 들어가 요새를 쌓고 비적이 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몇 달 만에 7~8천 여명이 따라 들어와 곧 무장 군대로 발전했다. 이렇게 신시 지방에서 모인 군대는 녹림군으로 불리며 역사에 당당하게 등장했다. 


녹림군의 위세가 날로 커져가자 4년 후인 21년 2월에 왕망의 명령을 받은 형주목(荆州牧)은 2만 명의 진압군을 동원했다. 토벌군의 이동을 간파한 왕광과 왕봉 등 지휘부는 잠복해 있다가 토벌군이 경내로 들어오자마자 습격해 수천 명을 살해하고 군수물자를 모두 빼앗았다. 녹림군 장군 마무(馬武)가 후퇴하는 군대 앞에 갑자기 나타나자 형주목은 혼비백산 마치를 몰고 달아났다. 마차를 쫓아간 마무의 긴 창이 문짝을 내리치자 마차와 함께 형주목이 나뒹구는 사이 단칼에 말부터 베버리는 동안 간발의 차이로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허겁지겁 도망쳤다. 대승을 거두자 마무의 영웅담은 하늘을 찔렀다. 


녹림군은 2만 명의 정부군을 격퇴한 여세를 몰아 경릉(竟陵, 호북 천문天門 시)과 현성이 있는 운사(雲杜, 경산京山 현)를 공격했는데 위세가 황제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녹림군이 약탈을 마치고 산채로 돌아올 때 수만 명이 뒤를 따랐다. 


17년 9월, 토벌군과 일전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5만 명이나 함께 거주하는 산채에 돌연 전염병이 돌아 병사하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어갔다. 왕광 등 지도부는 산에서 돌림병으로 모두 죽느니 하산해 출정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왕상(王常)과 성단(成丹)이 통솔하는 하강병(下江兵, 강릉江陵 지역에서 활동) 부대는 서남쪽 남부(南郡, 강릉)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왕광, 왕봉, 마무가 통솔하는 신시병은 북쪽 남양(南陽)으로 출병했다. 녹림군이 산에서 내려와 조직적으로 움직이자 나라는 점점 혼란에 빠져 들었으며 전국으로 퍼진 소문은 일파만파로 또 다른 민란으로 이어졌다. 


차츰 세력을 넓혀 나가던 21년 7월, 신시병 부대가 평림촌(平林村, 수주随州 시)까지 진군하자 진목(陳牧)과 료심(廖諶)이 통솔하는 수천 명의 평림병이 반란에 호응해 합류했다. 이때 한나라의 황실의 파락호이자 귀족 출신으로 2년 후 녹림군에 의해 경시제(更始帝)로 추인되는 유현이 단신으로 평림병에 투신했다. 북상하던 10월, 용릉(舂陵, 조양棗陽 시)에 이르러 지방호족 유인(劉縯)과 유수(劉秀)도 녹림군에 합류했다. 용릉병을 통솔하는 유연은 왕망의 신나라에 반대해 거병했다. 한고조 유방의 9대손으로 거병 후 세력이 미미했던 유인 부대는 녹림군의 확산을 눈 여겨 보고 합류를 요청했다. 유인의 인척 동생인 유수는 신나라의 종말 후 동한을 세운 광무제가 되는데 당시만 해도 말조차 타 본 적 없고 유약했던 유수가 녹림군 민란의 와중에 천자가 될 줄이야 아무도 몰랐다. 


민란 양상이 확산되자 각 지역 농민들은 물론 지방호족도 분기탱천(憤氣撐天) 일어나 전국적 민란으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신시병, 평림병, 용릉병을 통합 부대는 북상을 서둘러 신야(新野)를 점령했으며 12월 마지막 날에는 하강병까지 합류해 군수물자 주둔지인 남향(藍鄉, 신야 현)을 야습, 주둔군 장군을 포함해 2만여 명을 섬멸했다. 22년 새해가 되자 남향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격해오는 수만 명의 토벌군을 육양(淯陽, 하남 남양南陽 부근)에서 조우해 단번에 참패시켰다. 녹림군은 여세를 몰아 완성(宛城, 하남 남양)을 공략하자 대부분의 토벌군이 투항했다.


서남쪽으로 출병한 하강병도 형주를 점령했으며 파죽지세로 북상한 3개 부대 연합군도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군세가 커졌다. 왕광을 비롯한 각 부대 지도자들은 어느덧 황족인 유씨 일가 중에서 황제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굶어 죽지 않으려고 모였던 농민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민란의 합법적인 명분을 세워야 했으니 신나라 황제를 몰아내는 건국을 목표로 전진하는 길만 남았다. 


▲  왕망의 개혁은 '주공재세'를 꿈꾸며 유교 예악을 통한 통치였다. 비록 그의 개혁은 실패했으나 공자를 통치이념으로 통찰한 지도자였다. 공자 사당에서 열린 제례. ⓒ 최종명


완성을 장악하고 안정을 취하자 녹림군의 주축 세력인 신시병과 평림병은 유약하고 병력이 미미해 통제하기 쉬운 혈혈단신 파락호 유현을 황제로 옹립하고 한나라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경시제라 불렀다. 녹림군 지도자들은 모두 중신에 올랐는데 왕광은 정국상공(定國上公), 왕봉은 성국상공(成國上公)의 최상위 벼슬에 올랐으며, 공로에 따라 신시병 장군 주유(朱鲔)는 대사마(大司馬), 유연은 대사도(大司徒), 유수는 태상편장(太常偏将)에 임명됐다. 


녹림군은 경시군으로 조직을 안정화하자마자 왕봉, 왕상, 유수를 앞세워 곤양(昆陽, 엽현葉縣), 정릉(定陵, 무양舞陽), 언현(郾縣, 루하漯河) 방향으로 다시 북진을 시작했다. 


서기 23년, 왕망은 유현을 황제로 옹립했다는 소식에 크게 놀라 대사마 왕읍(王邑)과 사도(司徒) 왕심(王尋)을 장군으로 삼고 기인이자 거인인 거무패(巨毋霸)가 이끄는 호랑이, 표범, 코뿔소, 코끼리 부대까지 동원한 백만대병(실제로 43만 명 가량)을 모병해 대규모 토벌을 시작해 경시군이 주둔한 곤양 일대를 포위했다. 겨우 7~8천 명뿐이었던 곤양 성의 경시군은 성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곤양을 잃으면 각개격파 당할 것을 우려한 유수는 적극적으로 판세를 뒤집기 위해 13명의 돌격대를 인솔해 포위망을 뚫은 후 정릉과 언현의 주력군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왔다. 


유수는 3천명의 병력으로 토벌군 주력 부대를 향해 돌진해 오로지 지휘 장군 왕심을 타깃으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북송의 학자 사마광(司馬光)의 편년체 기록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유수가 앞으로 내달리니 병사들은 퇴각하였고, 한 명이 백 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유수는 성의 서쪽 해자를 시작으로 적의 주력 부대로 쳐들어갔다.'고 묘사했다. 유수의 결사대가 왕심을 단칼에 베어 죽이고 대군의 전열을 일시에 붕괴시키자 곤양 성에 있던 부대가 호응해 합세했다. 안과 밖에서 세력을 합치니 고함이 천지를 흔들었으며 토벌군은 전의를 상실해 도망치는 자들끼리 서로 밟히고 엎어져 죽은 시체가 백여 리나 늘어섰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까지 겹쳐 왕읍을 비롯한 장수들은 시체를 딛고 도망치기 바빴다.


중국 역사에서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지만 불과 수천 명이 '백만대군'을 물리친 기적과도 같은 전쟁은 곤양대전 말고 또 있을까? 곤양대전을 통해 역사 무대에 등장한 유수는 데뷔 무대에서 결승골을 넣은 스타나 다름 없었다. 


호북 경산의 녹림채로 향하는 절벽 길에는 유리 재료로 흔히 쓰는 석영석 암석이 'V자 거꾸로' 형상으로 서 있는데 그 높이가 25미터, 폭이 16미터에 이른다. 유수 광무제의 아들 한명제 유장(劉庄)이 녹림산과의 인연을 듣고 아버지를 기리며 '한천문(漢天門)' 친필을 하사해 새겼으며 청 건륭제도 강남을 순행하던 중 감개무량해 '천자지문(天子之門)'의 어필친제를 내렸다. 


진승과 오광의 민란을 통해 유방이 천하에 얼굴을 내밀었듯 '녹림산'이 아니었다면 유수가 어떻게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는가? 곤양대전의 영웅 유수는 불과 1년 만에 서생에서 용사로 거듭났다는 역사의 기록을 믿고 기적을 인정해야 하듯 '하늘로 가는 문'을 지나면서 천자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