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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7] 도교와 황건적의 민란 ②


▲ 도관(도교사원)에서 삼관대제를 봉공하는 삼관전은 아주 많다. 재물신을 모시는 전각과 함께 나란히 배치돼 있을만큼 인기가 좋다. 사진은 북경 백운관 내 삼관전. ⓒ 최종명


도교에 종파가 많은 것은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도교의 발생 시기에 천사도 정일파와 함께 교세를 확대한 태평도가 있다. 오나라 땅 낭야(榔琊, 산동 동남부) 사람으로 도술과 의술로 사람들의 병환을 고치던 중 태행산 동쪽 곡양(曲阳, 하북 보정保定)에서 우연히 신서(神书)를 얻은 우길(于吉)이 도교 경전 <태평경>을 집필했다. 우길은 절강 소흥(绍兴) 등지에서 민심을 얻자 손책(孙策)의 미움을 받아 살해 당하는 인물로 소설 <삼국지>에도 등장한다. 


장각은 <태평경>을 경전으로 삼아 질병 치료와 태평한 세상을 꿈 꾸며 교세를 넓혔다. 환관 정치가 팽배하고 서역과의 전쟁에 동원되는 노역으로 고통 받고 토지로부터 이탈, 소외된 농민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험악한 세상이었다. 미신일지는 몰라도 인민들은 장각의 설법을 믿고 따랐으니 급속도로 교세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죄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행위로 부적을 탄 물을 마시며 기도하며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장각은 태평도인(太平道人)을 자처하며 자신이 세운 교권을 태평도라 이름하고 하북과 산동 일대에서 해방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갑자년인 184년 3월 5일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고 신도들에게 지침을 하달했다. 6~7명을 단위로 하는 소방(小方), 1만 명이 넘는 단위를 대방(大方)으로 구분하고, 종교와 행정이 통합된 조직을 운영했다. 무려 36방에 이르는 수십만의 신도가 결집했으며 전국 각 조직에게 언제라도 출동할 준비를 시켰으며, 수도 낙양을 침공하면 동조하기로 한 환관들에게 수 차례 언약도 받았다.


"창천(苍天)은 이미 죽고 황천(黄天)이 나타났으니 갑자년에 이르러 천하가 대길이다."


▲ 도교의 명산 무당산 정상에는 도교의 진무사상을 통치 명분으로 삼기 위해 명나라 영락제 얼굴을 그대로 닮은 진무대제의 조각상이 봉공된 금전이 있다. 마치 작은 황궁처럼 조성돼 있다. ⓒ 최종명


이제 황천 세상이 등장한다는 참위(谶纬)이자 혁명 구호를 앞세웠다. 음양오행의 오덕시종(五德始终)에 따르면, 동한(东汉)은 불(火)의 기운을 가진 창천이며 화생토(火生土)의 원리에 따라 흙(土)은 황색(黄色)이다. 곧 태평도의 세상이 도래한다고 웅변하며 신도들의 머리에 노란 수건을 두르게 했으며 관청 문에는 '갑자(甲子)' 두 글자를 새길 것을 지시했다. 주변 정세도 유리했는데 앞서 언급한 오두미도의 장수가 주도하는 민란이 이미 익주에서 봉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거사 한 달 전, 낙양으로 밀명을 보낸 제자 당주(唐周)가 돌연 변심해 민란을 밀고했다. 도성과의 내통을 주도한 대방 수령 마원의(马元义)가 체포돼 사지와 머리가 수레에 끌려 토막 나는 거열(车裂)을 당하고 말았다. 관군이 들이닥쳐 수천 명의 신도들이 체포돼 처형됐으며 즉시 장각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졌다. 


거사일을 생각할 겨를 없이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장각은 즉각 떨쳐 일어날 것을 명령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는지라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자 온 사방이 황건의 물결로 넘쳐났다. 마치 노란 나비 떼가 하늘을 뒤덮은 듯 천지개벽의 모습이 펼쳐지자 사람들은 모두 '아적(蛾贼)이 나타났다'고 소리쳤다. 


기주(冀州) 거록(钜鹿)의 태양이 떠오르자 3개의 깃발이 함께 나부꼈다. <도덕경> 음양이론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를 내세워 장각을 천공장군(天公将军), 장보를 지공장군, 장량을 인공장군이라 부르고 민란의 깃발에 오롯이 새겼다. 


사실 '사람'대신에 '물'을 내세우면 천지수를 주관하는 삼관대제(三官大帝) 봉공 장소 삼관전과 거록의 삼형제가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천지인'이 주도하는 태평도 민란이자 농민이 주축인 황건군은 이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급속하게 빠져들었다.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에서 세상만물이 생성하는 원리로 황천의 세상을 건설하려는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기주에서 시작한 민란은 한달 만에 일곱 개 주 28개 군을 섭렵했다. 조직화된 농민군이 관청을 습격해 관리를 살해하고 파죽지세를 떨쳐 일어나자 인민은 호응해 대오를 이루어 신도로 합류했다. 황건군은 탈취한 곡식이나 옷을 각 지방으로 보내 구휼하자 궐기하는 곳이 점차 늘어났다. 


한영제와 조정은 경악했다. 하진(何进, 십상시를 견제하려다 살해 당한 인물)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정비해 수도 방비를 서둘렀으며 함곡관을 비롯 도성으로 통하는 관문을 봉쇄했으며 전국 군현에 사병 훈련과 병기 점검 및 의용군 소집을 명령했다. 


▲ 도교명산인 용호산 정상에서 바라본 모습. ⓒ 최종명


장군 황보숭(皇甫嵩)은 환관정치에 불만을 품었다가 당고지화(党锢之祸)를 당했던 사대부와 귀족을 즉시 해금하고 황궁의 재산 및 군마 사용을 건의하는 등 총력전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동한은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버금가는 당고지화로 사대부를 숙청했는데, 황보숭에 의해 해금된 사대부들은 황건의 난을 틈 타 잇달아 각 지역을 할거하는 무장 세력으로 변모하게 됐다.


좌중랑장(左中郎将)에 임명된 황보숭은 4만 명의 병사를 동원해 선봉장 주준(朱㑺)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주준은 영천(颍川, 하남 우주禹州)에서 황건군 장령(将领, 고급장교) 파채(波才)에게 대패를 당한 후 물러났다. 황건군은 토벌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했는데 전쟁 경험이 많지 않던 황건군은 장사(长社, 낙양 숭현嵩县) 전투에서 초원에 주둔하고 있다가 불의의 화염공격을 당해 참패하고 말았다. 


한편, 노식(卢植, 삼국시대 원소袁绍의 군사)과 동탁(董卓, 한나라 말기 재상)이 이끄는 토벌군이 장각이 주둔한 거록 성을 직접 공격했지만, 수개월이 지나도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불행히도 장각은 병을 얻어 민란을 선포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황건군 주력은 대부분 농민으로 민란 초기 관청을 급습하고 떨쳐 일어날 때와 달리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경험 미숙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각은 전국으로 확대되는 전쟁 양상을 지켜보면서 전투에서 패배해 처형되거나 퇴각하는 신도들을 지켜보며 치열하게 반전을 고민했으나 전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돌연 병사했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사기가 떨어진 황건군은 새로운 통솔 대장 장량 주도로 토벌군과의 대항을 이어갔다. 노식과 동탁에 이어 황보숭 부대가 합류한 연합군과 싸웠으나 광종(广宗, 하북 위현威县)에서 대패했고 장량도 3만여 명과 함께 전사했다. 얼마 후 곡양(曲阳, 하북 진현晋县)에서 장보가 이끄는 황건군 역시 진압 당해 10만 여명이 무참하게 도륙을 당하고 말았다. 


황건군의 주력 부대는 비록 소실됐지만 농민 봉기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끝내 소멸되지 않고 대방과 소방 출신의 지도자가 다시 크고 작은 민란을 일으켜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투쟁을 지속했다. <후한서> '황보숭전'에 따르면 기주의 흑산(黑山, 하남 안양安阳 서쪽)에서 일어난 흑산황건(黑山黄巾)은 장우각(張牛角)과 장연(張燕) 등 장령 만도 25명이 넘어 최소 25만 명이 봉기했으며 원소나 조조(曹操)에게 패배할 때까지 끊임없이 저항했다. 산서 백파곡(白波谷, 양분襄汾)에서 곽태(郭太), 양봉(杨奉), 한섬(韩暹)의 주도로 봉기한 백파황건(白波黄巾)은 동탁의 사위 우보(牛辅)에 의해 진압될 때까지 굳건하게 항전했다. 


청주와 서주는 물론 연주(兖州)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며 항전한 청서황건(青徐黄巾)은 <삼국지> '무제기'에 무려 '백만 명이나 참여했다'고 과장했는데 최소 30여 만 명의 농민군이 활약을 했다. 산동의 발해연안 북해(北海)를 근거지로 투항하지 않고 20여 년을 응전했으며 결국 반년이상 결전을 벌렸던 조조의 군대에 투항했다. 


▲ 도교 명산 용호산 천사부 삼청전 앞. 남방도교 정일파의 본산지. ⓒ 최종명


<삼국지> '장패전(臧霸传)'의 주석 본에는 조조가 죽자 황건군에서 귀순한 '청주병이 천하가 앞으로 어지러워질까 염려하며 북을 치고 통곡하면 제단에 섰다.'는 기록까지 나타나는 것을 보면 황건군의 생명력은 참으로 길었다. 익주황건(益州黄巾)의 지도자 마상(马相)은 천자를 자칭하며 사천 면죽(绵竹, 성도 북쪽)에서 봉기해 10만 여명의 군대를 일으켰다. 익주 일대를 장악했다가 익주목 유언(刘焉)의 부하장수인 가룡(贾龙)에게 패할 때까지 항전했다. 


장각 사후에도 30여 년을 끊임없이 항거하며 전국을 휩쓸며 동한의 통치를 무력화시켰고 명문세가의 씨를 휩쓸어버렸다. 장각은 아깝게 병사했으나 일찍이 농민 주도의 민란이 허망하게 실패로 귀결된 전례를 되새겨 통일적인 구호와 조직적인 체계 및 중간 지도자를 양성하고 종교의 힘을 빌어 명확한 정치 강령을 제시한 까닭에 중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민란으로 기록되고 있다. 


황건군의 처연한 투쟁은 농민 주도 민란의 중요한 경험을 제공했으며 통치자의 '왜곡' 기록 외에도 민간의 '진심' 구전으로도 도도한 강물처럼 역사는 흘러간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황건의 민란이 진압된 후 동한의 통치가 공고화되기는커녕 군벌의 할거가 깊어졌으며 외척과 환관의 권력투쟁은 동귀어진(同归于尽)으로 끝장나고 일단락되는 것을 우리는 소설 <삼국지>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도교 명산, 중국 최고의 풍경


중국 영토는 한반도에 비해 44배가 되고 고대 중국의 중원만 생각해봐도 20배 이상은 넓다. 산맥도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으니 예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산봉우리를 쳐다 보고라면 오르고 또 오르고 싶었으리라. 


아무리 올라도 오를 곳이 남아있는 중국의 명산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명산뿐 아니라 대부분의 산에는 사원이 꽤 많다. 불교나 도교 사원이 왜 산에 많은지 생각해볼 필요도 있겠지만 도시에도 그만큼 많으니 특별한 이유는 없을 듯싶다. 일일이 사연과 곡절이 있을 것이다. 모두 세계 문화 유산이거나 국가가 관리하는 명승지로 보호되고 있다. 


장릉이 도를 깨우친 도교 발원지로 도원승경(道源胜境)이라 불리는 학명산(鹤鸣山)은 도교 명산이지만 훨씬 더 유명한 도교 사원이 생겨나 겨우 도교 4대 명산에 들어간다. 학명산과 3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으로 장릉이 여생을 보낸 청성산(青城山)은 사천 도강언(都江堰)에 있다. 


장릉이 수련했던 곳으로 4대손 장성(張盛)이 이주해 2천여 년을 이어오며 천사부(天师府)가 자리잡고 있는 용호산(龙虎山)은 강서 응담(鹰潭)에 있다. 중국 도교의 양대 산맥인 전진도(全真道)의 성지 제운산(齐云山)은 안휘 황산 부근 휴녕(休宁)에 있으며 도교신화에 등장하는 진무신(真武神)이 출생했다는 무당산(武当山)은 호북 십언(十堰)에 각각 위치한다. 


10년 전 용호산 천사부를 취재할 때 대만 사람들이 찾아와 닭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진심으로 경건하게 참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도교사원을 발걸음한지 참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이기도 하거니와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 문화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유산으로서의 도교는 알면 알수록 흥미진진한데 그럴수록 파고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기도 하다. 운무나 협곡 속에 담긴 명산을 찾으면 곳곳마다 도교의 신이 자리잡고 있어 감상을 방해하고 있지만 인민의 얼어붙은 마음을 풀어주고 해방의 춤을 추게 하는 민란을 생각하면 그다지 훼방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