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쑨원(孙文)의 호는 쭝산(中山)이다. 베이징 중산공원에는 쭝산탕(中山堂)이 있다. 이곳에는 <쑨쭝산과 베이징> 전시실이 있는데, 그곳에 쑨원과 쏭칭링(宋庆龄)이 결혼 후 찍은 사진이 있다. 관심이 많았던 사진이라 반가움에 참 오래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쑨원에 대해서는 난징(南京) 쭝산링(中山陵)과 링구쓰(灵谷寺)에서도 자주 이야길 했다. 좀 지겨울 수 있으니 '쏭칭링' 집안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쭝산탕 전체를 다 잡아보려고 했건만 조금 윗부분이 없다. 이곳은 원래 셔지탄(社稷坛, 사직단)의 본당인 바이디엔(拜殿)이었다. 쑨원이 베이징에서 사망한 후 그를 기리는 뜻에서 이름을 바꾸고 그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단(坛)은 원래 제사를 올리던 제단을 말한다. 베이징 옛말에 '우탄빠먀오'(五坛八庙)가 있다고 했다. 예전에 택시운전기사가 관광 온 한국사람이냐고 묻더니, 이 말을 했다. '하늘' '땅' '해' '달' 네곳은 금방 생각이 났다. 도대체 한 곳은 어딜까 궁금했다. 그래서 이곳 중산공원에 오니 옛 사직단이 있어, 아마도 우탄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티엔탄(天坛), 띠탄(地坛), 르탄(日坛), 위에탄(月坛) 외에 바로 씨엔농탄(先农坛)을 포함해 우탄이라 한다. 다음 기회에 "东单,西四,鼓楼前,五坛八庙顾和园"을 소개할 생각.

쭝산탕을 들어서는 사람들이 옛 바이디엔 앞 스파이팡(石牌坊)을 지나온다.

또렷하게 쓴 글씨. 이곳은 입장료를 받는다. 10위엔.

쑨원이 앉았던 의자.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보존상태가 깨끗하다. 문 입구에서 사람들에게 들어오라는 듯 놓여 있다. 사람들은 별도의 먼퍄오(门票, 입장료)를 받으니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약간 열린 문으로 보고만 있다.

쑨원을 만나러 갔으니 바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인데 안에는 한사람도 없다. 이 훌륭한 역사 창고를 혼자 보는 기분이 꽤 좋다. 의자가 탐 난다. 앉으면 1920년대로 훌쩍 날아갈 지도 모르니...

쑨원의 행적과 그의 글, 책들이 전시돼 있다. 차곡차곡 그림만 봐도 역사공부가 된다. 옷차림, 모자, 시계, 주변건물, 글씨 등이 다 '즐겁기만 한 공부'가 아닌가.

쑨원(孙文)과 쏭칭링(宋庆龄, 1893~1981)이 일본에서 찍은 결혼식 사진이다. 중국현대사에 하나의 전환을 만들어낸 기념비적인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

겨우 스물을 넘긴 쏭칭링과 거의 오십을 바라보는 쑨원의 결합은 망명 시절 일본에서 1915년 결혼했다. 이들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자주 언급한 바, 중국의 민족지도자, 삼민주의 사상가, 정치가이면서 혁명가인 쑨원과 그의 비서이자 동지이기도 하며, 당대 최고 갑부의 딸 쏭칭링과의 결혼이니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로부터 주목 받기에 충분하다.

쑨원과 쏭칭링의 결혼을 보니 중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드라마틱한 송(宋)씨 집안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맨앞 宋子安, 둘째줄 왼쪽부터 宋蔼龄, 宋子文, 宋庆龄, 셋재줄 왼쪽부터 아버지 宋嘉树, 어머니 倪桂珍, 뒷줄 왼쪽부터 宋子良, 宋美龄 (출처:京华时报)

쑨원은 앞 글에서 이미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말한 바 있다.

쏭칭링은 본적이 하이난(海南) 성으로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당대의 절강성 갑부였으며 쑨원 지지자이던 쏭지아슈(宋嘉树,1864~1918)의 둘째딸이다. 쏭지아슈는 자식들에게 '천하를 먼저 생각하라'고 교육했으며 3남3녀에게 남녀 평등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한다. 그의 자식 교육에 대해서는 곧잘 토론주제가 되기도 한다.

언니 쏭아이링(宋霭龄, 1890~1973)은 당시 재정관료이며 중국은행 총재를 지냈으며 쟝제스 국민당정부의 재정을 담당한 자본가이며 공자의 75대손이라 알려진 꽁썅씨(孔祥熙)와 결혼했다. 원래 쑨원의 비서였는데 결혼 후 여동생 쏭칭링을 비서로 추천했다.


남동생 쏭즈원(宋子文, 1894~1971)은 미국 하버드에서 공부했으며 초기에 쑨원의 영문 담당 비서였다가 쟝제스 주도의 국민당 정부의 재정담당 관료와 중앙은행 총재로 활약했다. 쟝제스에 이어 중국공산당의 두번째 전범자 리스트에 올랐으며 쟝제스의 국민당 당적 삭제 리스트에도 꽁샹씨에 이어 두번째로 오르는 중국 현대사의 '아이러니'의 주인공이다.


여동생 쏭메이링(宋美龄, 1897~2003)은 바로 국민당 정부를 이끈 쟝제스와 결혼했다. 그녀 역시 쟝제스의 수행비서로 활동했으며, 서안사변으로 사로잡힌 쟝제스를 구하러 가서 저우언라이(周恩来)와 담판을 하기도 했다. 언니 쏭칭링과 그녀는 각각 중국본토와 대만에서 여성으로서 정치적 리더쉽을 발휘하면서 죽을 때까지 정치적 대립이 심했다. 형제자매 중 가장 장수했다.


남동생 쏭즈량(宋子良, 1899~1987)은 미국에서 공부한 후 중국국화은행과 건설은행 총경리를 거쳤으며 은행자금을 투자해 건설, 철도, 전기, 탄광 등 기간 산업을 육성했다.


남동생 쏭즈안(宋子安, 1906~1969)은 1928년 미국 하버드를 졸업한 후 중국건설은행에서 근무했으며 1949년에는 홍콩광주은행 주석이 되기도 했다. 쏭칭링이 특히 아꼈다고 전한다.


20세기 중국 현대사에서 쏭씨 집안의 세 자매는 중국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과 모두 결혼했고, 세 형제는 경제통으로 활동했다. 쏭칭링을 제외하고는 모두 쟝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밀착돼 있었다.


출생연도는 자료가 다 제각각이라 혹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의 몇몇 백과사전도 틀린 듯해서 가급적 중국 자료를 근거로 형제 사이인 점을 감안, 나름대로 정리했다.


재미있는 것은 네이버 백과사전(두산백과)에서 쏭칭링을 '1890.1.27~1981.5.29'이라 했는데, 아마 쏭아이링의 출생연도와 쏭칭링의 사망연도를 섞은 듯하다. 그러다보니 남동생인 쏭즈원도 1891년생이라고 틀리게 됐고 그의 여동생인 쏭메이링도 1901년생이라 잘못 표기돼 있으며 그의 일생도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돼 있는데, 실제로 관련 기사를 찾아보면 중국나이로 106세까지 살았다고 돼 있다. 이렇게 줄줄이 틀릴 수 있는가. 거꾸로 다 고쳐야 할 듯.

(참고 : http://www.people.com.cn/GB/shizheng/8198/30266/)

둘의 결혼 서약서(誓約书)다. 당대의 명문가의 딸 쏭칭링은 아버지의 반대와 감금을 뚫고 전격적으로 결혼한다. 당시 유명 일본인 법률가가 증인한 서명도 보인다. 내용을 살펴보면 참 '명예'를 소중히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서약서는 3가지의 재미난(?) 의문을 담고 있기도 하다.


하나는 결혼식은 1915년 10월 25일 오전에 이뤄졌는데, 서약서에는 26일로 기재돼 있다. 그것은 일본이 원래 짝수일을 길하다고 생각하는 습성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란다.


둘은 쏭칭링의 링(龄)이 아닌 린(琳)으로 기재돼 있다. 그것은 두 글자의 발음이 서로 비슷한데다가 린이 쓰기가 좋았지 않았을까 한단다.


셋은 쏭칭링은 도장을 찍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미국에서 일본으로 오느라 도장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하여간, 쭝산탕의 이 서약서는 복제본으로 공개된 것이고 원본은 쭝궈리스뽀우관(中国历史博物馆)에 있다고 한다.

그의 옷 앞에 서니 내 모습이 비친다. 존경하는 쑨원의 옷차림 속으로 살며시 들어가고 싶어서 일까.

언뜻 보면 참 못 쓴 서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쑨원이 쓴 저 투박해 보이는 글씨체는 볼수록 정겹게 느껴진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결단이 있어 보인다. 정직하고 진지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실제 모습과 좀 다른 느낌이다. 너무 엄숙하다. 하얗게 조각상에 옷차림 하니 장군처럼 보인다. 물론 그도 전쟁도 치르고 무장봉기도 한 혁명가이긴 하지만, 선비처럼 온화한 풍모에 더 가깝다.

그가 사용하던 물건들인데, 아마도 그가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이곳에 많이 있나 보다. 권총도 휴대하고 다녔겠다.

쑨원 전집에는 중국 현대사의 흐름이 녹아 있으리라. 그리고 민족을 사랑했던 고뇌들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의 삼민주의는 초기 신해혁명의 기틀이었고 또 진화해 현대에 이르는 살아있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살아있는 이론이고 사상일까. 이렇게 베이징 한 복판에 숨쉬고 있음이 그걸 말하지 않을까.

그가 쓰던 도장들

그의 죽음도 기록돼 있다.

신해혁명의 주인공. 공화정을 잉태한 민족의 지도자이며 삼민주의 사상의 주창자인 쑨원을 공산당 체제의 중국정부는 매년 기념한다.

쑨원의 사상은 진화하고 발전해 그가 사망할 시점에 이르러 친러시아, 공산당과의 협력을 도모했다. 그의 유언을 받들어 쏭칭링은 러시아와 끊임 없이 관계 모색을 시도했고, 마오쩌똥 노선과 긴밀하게 협력했으며 중국의 소위 '신정부'에서도 인정받기에 이른다.

공산당과 국민당 모두 쑨원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각자 그럴만한 명백한 근거가 있겠지만, 13억 중국인 모두에게 살아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당시 국민당 총리이던 쑨원 사후의 펑안지니엔베이(奉安纪念碑)

쭝산탕 내 쑨원의 박물관은 '쑨쭝산과 베이징'(孙中山与北京) 전시회라 부른다. 그리고 이곳을 '애국주의 교육기지'라고 한다. 바이디엔이 워낙 넓다보니 전시관에 여유가 많다.

그리고 아주 높아서, 또 공간이 많다.

천정과 등이 쑨원의 정신처럼 아주 맑아 보인다.

그가 저 의자에 앉아 있다면 지금의 중국사회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 평생을 민족을 생각하는 실천가이고자 했던 쑨원. 도덕적으로 살고자 했던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마오쩌똥과 쟝제스는 쑨원에 비해 '인간'이란 측면에서, '도덕성'이란 측면에서 미흡해 보인다는 게 내 개인 생각이다. 정치와 사상을 떠나, 한 인간의 일생을 조망해 본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쑨쭝산과(与) 베이징>, 확실히 그의 브랜드 이미지는 푸를 청!

쑨원과 쏭칭링이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자꾸 기억에 남는다. 그녀의 가족사도 그냥 간단히 넘길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쑨원의 힘은 무엇일까. 재벌과 정부와의 결탁으로부터 쏭칭링의 순수한 혁명열정, 서민에 대한 사랑을 발굴한 것이야말로, 바로 궈푸(国父)의 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징 중산공원에 가면, 중산당에서 '손중산과 베이징'을 보며 '손문과 송경령'을 생각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