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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건륭제 단골 순행지 텐진 판산

 

중국은 땅덩어리만큼 산이 많다. 역사와 인물, 산이 함께 등장하는 일 역시 흔하다. 풍경도 일률적이지 않고 지방마다, 때로는 지질시대마다 생김새가 천차만별이다.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명산을 두루 발 딛는 것은 평생 가능하지도 않다.

 

풍경이자 명승으로 유명하면서 국가가 관리하는 명산이 208곳이나 된다. 수천 개에 이르는 입장료 받는 명산 중에서도 국가급풍경명승구(國家級風景名勝區)’는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국립공원이다. 국민들에게 무료로 산을 개방하는 우리와 달리, 아직도 중국은 유명할수록 입장료가 비싸다.

 

지난해 가을, 텐진(天津)의 유일한 국가급(5A) 풍경명승구인 판산(盤山)을 찾았다. 텐진 시 지()현 서북쪽에 위치한다. 베이징 시내와도 직선거리로 불과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경동제일산(京東第一山)’이라 불리며 중화민국 시대에는 전국 15대 명승지로 손꼽혔다.

 

판산 입구에 도착하니 산 정상부근까지 운행하는 셔틀차량들이 줄줄이 서 있다. 표 사는 등산객들에게 일일이 호객한다. ‘걸어가면 힘들다’, ‘케이블카는 더 비싸다고 한다. 상행 30위안(), 하행 30위안이다. 그런데, 유리창에는 상행의 ‘3’자를 지워놓고 ‘10위안도 좋고 20위안도 좋고식으로 제 멋대로 부른다.

 

343(三門四柱三瓦) 패방을 지나 등산로 입구 앞에 이르렀다. 놀라 자빠질 정도, 경악했다. 입장료가 무려 100위안( 17천원)이나 한다. 아무리 5A급 명산이지만 비싸다. 왜 이렇게 비싸냐고 물었다. 대답이 재미있다. ‘황제가 32번이나 오른 산인데 뭐가 비싸냐?’ ‘한국 명산은 모두 공짜라고 말했더니 아가씨 묵묵부답.

 

황제라니? 그렇다. 청나라 건륭제가 한두 번도 아니고 32번이나 순행했던 곳이다. 재위기간이 60년이 넘는다고 해도 2년에 한번 꼴로, 황제가 다녀갔다니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만큼 경치가 좋다는 말인가 보다.

 

 

산으로 접어드니 건연반옥(乾緣飯屋)이라는 자그마한 산장이 보인다. ‘건륭제와 인연이 있다는 이름이니 참으로 적절한 작명이다. 주위에는 옥수수가 햇살을 받으며 굳어가고 있다. 감나무에는 주홍빛 선연한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물 많던 산이 명산이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바위에 돌 오솔길을 흐르는 샘이라는 뜻의 석경류천(石徑流泉)가 새겨져 있고 폭포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일찍이 판산 위쪽 소나무, 판산 가운데 돌, 판산 아래쪽 물(上盤之松, 盤中之石, 下盤之水)’이라 했는데 산 아래에는 정말 물이 풍부한 산길이다. 폭포수가 감나무 잎사귀를 적시고 너른 바위를 스쳐 물길을 잡는 모습이 장관이다.

 

 

건륭제 역시 판산의 아름다움을 천 수 이상의 시로 표현했다는데 일찍이 판산을 알았더라면, 어찌 강남으로 내려갔을 소냐(早知有盤山, 何必下江南)’고 노래했다. 중국 강남은 곧 수향이니 이 폭포수를 보고 읊조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입 안을 양치하듯 헹구는 협곡이라는 뜻의 유명 서예가의 수협(漱峽) 두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바로 옆에 있으니 정말 금상첨화다.

 

()양치질로 입을 헹군다는 뜻이구나 생각하며 산을 올라가고 있는데, 하늘로 솟았지만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잉커(迎客)’이라 써 있으니 손님을 맞이하는 소나무인 듯하다. 황산의 유명한 잉커쑹(迎客松)에 못지 않다.

 

텐청쓰(天成寺) 입구 갈색 단청 담벼락에 나뭇가지 그늘이 선명하다. 갈색 담으로 타고 오르는 넝쿨 잎사귀가 햇살을 받아 거의 투명하다. 넝쿨 가지는 담에 달라붙었건만 광합성에 목마른 잎은 바람 따라 흔들린다. 산 머루처럼 생긴 열매를 달린 나무도 담벼락을 기대고 있다. 나무에서 뻗어내려 제멋대로 거칠게 자라고 있다. 뒤엉킨 모습이 마치 오리발 같기도 한다.

 

 

사원 본당의 편액 청정묘음(淨妙音)은 건륭제가 하사한 것이다. 사람 키보다 더 큰 바위에 불연(佛緣)이란 글자가 연붉은 색칠로 새겨져 있다. 산길을 따라 좀더 올라가면 완쑹쓰(萬松寺)가 있고 더 위에는 판구쓰(盤古寺), 오악 중 하나인 쑹산(嵩山)에도 있는 사오린쓰(少林寺)도 있다. 산 곳곳에 사원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명산답다. 한참 때에는 사원과 사당, 암자를 합해 72개나 있었다고 전해진다.

 

 

완쑹쓰 본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 앞에는 여느 사원처럼 향불이 타고 있다. 사람 키 만한 향이 타는 것도 이채롭지만 동물 얼굴 모습의 향불이 신기하다. 호랑이 같지도 않고 용은 더욱 아닌 듯, 도무지 딱 뭐라 표현하기 힘든 동물 3마리의 얼굴이다. 입에서는 향 연기가 부글거리며 분출하고 있다. 눈과 코는 검게, 입 주위는 붉게 그려놓은 색감이 하얀 연기와 어울려 심상치 않다.

 

한가로이 장기 두고 있는 스님들이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뜻밖에도 불교사원에 용왕묘(龍王廟)가 있다. 중국 사원은 역시 , , 의 경계가 높지 않다. 파란 가운을 입고 험상궂은 얼굴을 한 용왕이니 생경할 따름이다.

 

천불전(千佛殿) 옆에는 케이블카가 운행을 기다리고 있다. 한 아주머니가 한참을 기다렸나 보다. 케이블카 타는 사람이 없어서 기다린 것이다. 케이블카 한번 타는데 60위안으로 비싼 편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수기라면 모를까 운행시간이 28분이나 걸리니 한 사람 때문에 전력을 낭비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비싸긴 하지만 케이블카 비행은 참 멋지다. 판산의 옛 이름들이 떠오를 정도로 산세 전체를 조망하기 좋다. 산을 둘러싼 모습이 반듯하다고 사정산(四正山), 산의 형세가 끝도 없다고 무종산(無終山)이라 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바로 난텐먼(南天門)이다. 태산 정상 부근에도 똑같은 이름이 있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하늘 문이니 예사롭지 않다. 정자가 하나 있는 아담한 언덕이다. 언덕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 텐진 시는 물론이고 시력이 좋은 사람이면 바다도 보인다.

 

난텐먼 위치는 산 아래 보다 오히려 산 위 경치를 관망하기 좋다. 눈을 돌려 정상을 바라보면 파란 하늘 아래 우뚝 솟은 탑 하나가 보인다. 여느 산에서 쉽게 보기 힘든 판산의 진면목이다.

 

탑이 있는 산 정상 과위에펑(挂月峰)으로 가려면 윈자오쓰()를 거쳐 가도 된다.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사원이니 경치가 멋지다. 마침 부처님이 공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늘이 새파랗다. 윈자오쓰는 당나라 때 세워진 불교사원이다. 원래는 용이 내려온다는강용암(降龍庵)이었다고 한다.

 

사원 앞에 서니 멋진 산의 모습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발 아래 케이블카의 긴 행렬도 보인다. ‘구름의 뿌리라는 윈건(雲根)이 새겨져 있을 정도로 구름도 휘황찬란하다. 그리고 윈펑거(雲峰閣)라는 산상호텔이 있다. 절묘한 장소에 돈벌이를 만드는 일에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리탑이 있는 판산 최고봉 이름이 과위에펑이다. 해발은 864미터 정도로 높지 않으나 달이 걸리는 봉우리라니 꽤 운치 있는 이름이다. 호텔에서 묵으면서 정말 달이 어떻게 봉우리에 걸치는지 보고 싶어진다. 일출도 궁금하다. 언젠가 황제처럼 멋진 야경과 일출을 위해 1박 일정을 잡아보고 싶다.

 

 

사원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 이름이 신도(神道)이다. 길 따라 오르다 보면 하늘이 파랗게 보이기 시작한다. 길 옆 바위에 하늘 가는 길 5(去天五尺)’이라고 새겨있다. 글자 때문이어서인지 한적한 길이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달이 걸린다는 봉우리에 돌과 벽돌을 쌓아 우뚝 솟은 사리탑에 이르렀다. 3 8각형의 탑신이 온 세상을 두루 내려다 보는 듯하다. 8각형 각 면마다, 3개의 불상이 조각돼 있다. 남쪽 방향의 한 면에는 정광불사리탑(定光佛舍利塔) 6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광불은 연등고불(燃燈古佛)이라고 부르는데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사리탑을 둘러싸고 소나무들이 뒤엉켜 있기도 하고, 축 늘어져 있기도 하다. 사리탑을 보호하는 수호신처럼 서 있는 듯하다. 댕그라니 탑 하나 있는 것보다 훨씬 보기 좋다. 탑을 등지고 사방 둘러봐도 멋진 풍경이다. ‘판산 위쪽 소나무가 많다는 말이 허명이 아니었다.

 

산 정상 바위에 새겨진 일람중산소(一覽眾山小) 다섯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두보(杜甫)<망악(望岳)> 중에서 태산을 바라보며 지은 시 끄트머리에 나오는데 뭇 산의 자그마함을 굽어보리라는 말이다. 판산 정상도 태산 못지 않다는 자부심일지도 모른다.

 

 

소나무 시야를 따라 북쪽을 바라보니 또 하나의 봉우리가 보인다. ()이 매달린 정자도 보인다. 저 곳에서 이 탑을 관람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다시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가 북쪽 능선 길을 올랐다.

 

산 정상과 북쪽 봉우리인 즈라이펑(自來峰) 가는 길 한가운데 높이가 10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과중쑹(挂鐘松)이 서 있다. 천근이 넘는 커다란 종을 걸었던 소나무라고 한다. 산 아래 윈자오쓰를 세울 때 함께 심은 나무라고 하니 1,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비바람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것이다. 스님들이 종을 치면 수천 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종이 걸려 있지 않다.

 

바로 옆에는 사리탑을 등 지고 이 산의 이름인 판산(盤山)’이 새겨져 있는데 건륭어서(乾隆御書)이다. ‘은 반듯하고 은 한 획으로 쓴 듯한 글자체이다. 건륭제 필체를 앞에 두고 산 정상 사리탑을 배경으로 한 곳인데다가 힘찬 소나무까지 곁들이니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위치이다.

 

 

즈라이펑에는 정자가 있고 그 안에 종 하나가 걸려 있다. 천 근이나 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종을 치면 멀리 소리가 번져가긴 할 듯하다. 정자 주변에는 온통 열쇠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염원을 담은 글자를 긁어서 매달았겠는데 대부분 녹이 슬어 알아보기 힘들다. 몇 달 전 열쇠인데 ‘LOVE FOREVER Jon Tina’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외국 연인도 다녀갔나 보다.

 

다시 산을 내려온다. 난텐먼 갈림길에서 셔틀차량을 타는 곳을 찾았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서 그냥 산길을 따라 내려왔다. 수백 개는 돼 보이는 계단을 따라 수직으로 내려오는데 무릎이 꽤 아프다. 다시 서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길을 내려온다. 판산의 멋진 풍광을 바라보며 하산하는 길도 참 좋다. 길게 늘어선 케이블카가 조망을 방해하는 것만 아니라면 더욱 아름다운 자연풍광일 것이다. 조금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오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하산하는데 2시간이나 걸리니 산을 오르려면 아마 4시간 이상 땀을 흘려야 할 듯하다.

 

산을 다 내려오니 허기가 진다. 풍성한 감나무가 반갑다. 바닥에 떨어진 감 하나를 집어서 먹었더니 떫지 않고 달다. 슬쩍 감 하나를 따서 하나 더 먹어도 간섭하는 사람 하나 없다. 예상하지 못한 비싼 입장료에 케이블카까지 타서 160위안( 27천원)을 썼지만 달콤한 감 몇 개 값이라 생각해도 좋았다. 건륭제가 감을 먹었다는 기록은 없겠지만 이 향긋한 감 앞에서 황제라고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듯싶다.

 

건륭제 때문에 입장료가 비싸진 것도 맞다. 하지만 황제가 수 없이 다녀갔을 정도로 멋진 산인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