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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두관 지사의 중국에 대한 경험을 주제로 중국 관영 인민일보 자매 주간지인 <민생주간> 2012년 제1기, 1일 2일 발행된 잡지에 관련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내용이 많아 번역해 올립니다. 



김두관의 중국에 대한 각별한 감정


2010년 6월, 한국 경상남도 지사 선거의 장막이 걷혔다. 선거 결과는 한국 정계인사들을 아주 놀라게 했는데, 마을 이장부터 시작해 한발한발 올라와 정치 명문가도 아니며 재벌 배경도 없을 뿐 아니라 유명대학 간판도 없는 김두관이 도지사로 당선된 것이다. 이런 결과는 줄곧 한나라당이 당선되던 역사를 바꾼 것이며 한국정당의 정치판도를 바꾼 것이었다. 한국정치권에서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는 이 정치스타는 중국에 대한 아주 속 깊은 마음을 담아 중국과 진지한 교류를 하고 있다.  


이장에서 도지사까지


54세의 김두관은 스스로를 ‘촌사람’이라 부르는 것은 40년 넘게 농촌에서만 살았기 때문이다. 마을 이장을 시작으로 군수, 정부 장관과 현재 도 지사에 이르렀다. 그 동안의 기복과 굴곡은 김두관의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김두관의 고향은 남해군의 한 작은 섬이다. 지난 세기 70~90년대 한국경제는 지속적으로 발전했기에 젊은 이들은 모두 대도시로 향했지만 김두관은 오히려 대부분 사람들과 달리 고향에 남아 농촌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86년 김두관은 남해군 이장으로 농민들과 농사 짓고 함께 생활하며 나날을 보냈다. 이 기간 김두관은 자기 집 땅을 팔아 ‘남해신문’을 발행했는데, 이는 최초의 지방 신문사이다. 신문은 농민의 입장에 서서 생활모습과 사상을 보도했으며 부패공무원의 탐욕을 폭로하고 막아내는데 심혈을 쏟아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남해신문은 남해군에서 점점 전국으로 퍼져 인구가 5만 명뿐인 도시임에도 발행부수가 30만부를 넘었다.


1995년 한국 지방선거가 시작됐다. 김두관은 남해군 군수로 당선돼 한국 최연소 군수가 됐다. 군수가 된 김두관은 이장 시기의 친민적인 사업태도를 지속했다. 그는 남해군은 자원이 부족하지만 환경이 아름다워 반드시 여행업을 발전시켜 지방경제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군분투한 결과 남해군은 한국에서 유명한 스포츠센터를 조성했으며 유명 관광지가 됐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많은 나라 선수들이 이 스포츠센터를 자신들의 훈련기지로 활용했다. 1988년 김두관은 남해군수 연임에 성공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후 김두관은 남해군수에서 직접 행정부 장관으로 임명됐으며 당시 한국 최연소 장관 중 한 명이 됐다. 변화무쌍한 시국으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는데 7개월 후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한국대학총학생연맹(한총련) 시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김두관의 사직을 요구했다. 얽히고 설킨 정국이 순조롭지 않게 돌아가고 대통령을 난처하게 하지 않기 위해 김두관은 의연히 사직하고 고향 남해로 돌아가 경상남도 지사 선거 준비로 뛰어들었다.


4차례의 경선 실패를 거친 후인 2010년 6월 김두관은 결국 한나라당의 강력한 상대와 맞서 승리해 경상남도 지사에 당선된다. 경상남도는 18개의 현과 약 330만 명의 인구를 지닌 한국의 아주 중요한 지방이다. 경상남도 50년 역사에서 민주당 출신 지사는 없었기에 김두관의 당선은 한국 정치판도를 바꿨다.


한국의 지중파


2004년 미국 정치권 인사는 수 차례에 걸쳐 당시 사직 상태이던 김두관의 미국 유학을 요청하며 생활비와 학비까지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김두관은 중국유학을 선택한다. 이것은 대담하고 남다른 선택이었다. 현재 한국의 많은 지도자들이 중국에 오기는 하지만 당시 한국 고위지도자가 중국에 오는 것은 드물었고 한국의 행정고위층의 중국에 대한 이해는 아주 적었다. 


현재 한국의 국회의원은 모두 299명인데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략 반 정도이지만 중국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중국에 한 달조차 머문 사람이 없다. 한국의 18명이나 되는 현 정부 장관들도 대부분 영국이나 미국 유학파이다. 


2004년 8월부터 2005년 1월까지 김두관은 베이징대학에서 중국에 대한 심층연구를 했다. 이 기간 중국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작한 것이다. “그의 중국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한눈에 잘 드러나는 것은 중국에 대한 이해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중국에 왔으니 단지 보도기사뿐 아니라 책을 통해 중국의 진면목을 이해하는데 목 말라 했다.”라고 베이징대학 기간 그의 중국어 교육을 담당했던 스멍린(石梦林)은 깊은 감명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학습 외 시간에 시안에 간 것은 물론 선양 등 대도시를 방문했으며 김두관은 중국의 2~3선의 도시들에 대한 실제 상황을 이해하고자 했으며 때로는 아주 산간지방을 가기도 했다. 스멍린은 김두관을 따라 친황다오에 있는 아주 작은 산촌마을을 가기도 했다. 김두관은 일반 가정 안으로 들어가 그곳 촌민이 살아가는 상황이나 수입 정도, 아이들은 몇인지, 생활 정도는 어떤지 등등 물어보지 않은 것이 없다. 김두관은 한국의 미래가 중국과 아주 깊이 함께 연결돼 있어 중국과의 관계를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 김두관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을 중국 대학에 입학하도록 했다. 지금 딸은 이미 중국인민대학을 졸업해 한국으로 돌아가 중국은행의 한국지점에서 근무하고 있다. 2011년 6월 11일 경상남도 북경사무소를 정식으로 개소했는데 이는 경상남도가 중국에 설립한 3번째 사무소이다.


2012년 김두관은 또한 중국 선양에 4번째 사무소를 설립할 계획이다. 한국의 17개 지방행정기관 중 대부분은 중국에 1개의 사무소만 두고 있지만 경상남도처럼 중국을 중시하는 곳은 거의 없다. 김두관은 중국에 넓은 인맥을 지니고 있으며 깊은 우의를 나누고 있다. 중국공청단 중앙과 상무부 및 많은 지방 성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상남도 지사로서 1년 좀 넘는 기간에 수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한국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김두관은 김대중과 노무현 이후 가장 중국을 잘 아는 지중파 정치권 인사이다.


중국 여자아이와의 허물 없는 벗


2004년 아주 우연한 기회에 베이징어언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스멍린은 김두관을 지도하게 됐다. 베이징대학에 재학 중인 김두관에게 매일 1~2시간 정기적으로 중국어 공부를 지도한 스멍린은 중국어 학습뿐 아니라 가끔 영문번역도 도왔다.


“그의 겉모습은 장대하고 우람했고 아주 엄숙한 편이지만 어떤 낯선 생소함도 없었다.”는 것이 스멍린의 김두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베이징대학 기간 김두관은 스멍린에게 자기 딸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장래에 반드시 중국 대학에 입학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스멍린은 그저 농담으로 여겼는데 그게 진심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는데 이후 스멍린은 아버지에 이어 그의 딸 중국어 공부를 돕게 됐다.


김두관 및 딸의 언어 선생이 된 스멍린은 김두관과 더욱 깊은 친교를 나누게 됐다. 김두관의 언행도 점점 스멍린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됐다.


김두관도 마음 씀씀이를 아주 중시했다. 대학 졸업 후인 스멍린은 직장을 구하지 않고 한국으로 가서 한국어 연수를 선택했다. 서울에 도착한 스멍린은 김두관의 업무가 바쁜 것을 고려해 연락하지 않았는데 얼마 후 김두관이 이를 알고 즉시 스멍린과 연락한 후 부인을 시켜 스멍린의 숙소에 김치를 보내주기도 했다.


김두관은 스멍린을 집에 손님으로 초대했으며 한국 생활에 불편한 건 없는지 물었다. 스멍린은 한국농산품 가격이 너무 비싸고 사과조차 사기 힘들고 베이징 여자아이들은 늘 과일 먹는 것을 즐긴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뜻밖에도 스멍린이 매번 집을 찾아갈 때마다 김두관의 부인이 큰 접시에 사과를 깎아서 접대했으며 집을 나설 때면 싸주기도 했다.


“진짜 저에게 큰 감동이었는데 사과는 한국에서 정말 비싸기도 하지만 김두관의 집은 그리 부유하지도 않기 때문이에요.”라고 스멍린은 말한다. 


2006년 설날 한국에서 공부하던 스멍린은 처음으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새해를 보냈다. 스멍린은 김두관과 함께 남해에 있는 고향집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따뜻한 설날을 보냈다.


김두관이 고향집에 가자 온 마을에 큰 일이 벌어졌다. 촌민들이 모두 와 돌아가며 김두관과 함께 식사하자고 청하며 그를 문안하는 것이었다. 김두관은 아주 겸손하게 사람들을 맞았으며 전혀 관료의 냄새를 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똑같이 실컷 마시고 즐기는 것이었다. 마을의 연로한 할머니를 보자 그는 겸손한 동작으로 부축하더니 휠체어에 태워주기도 했다.


“한국에서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났지만 김두관과 같은 사람은 정말 흔치 않다. 외유내강인데다가 마음이 세심해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주 깊다.”고 스멍린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