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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당 정치국 위원 (1) 왕강, 왕러취안, 왕자오궈, 왕치산, 후이량위, 류치

중국 공산당 정치국은 정치 파벌 색깔이 선명하며 모두 25명으로 구성된다. 보통 물러나는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정치국 위원들은 2012년 가을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하게 된다. 최근 보시라이 전 충징 시 서기의 낙마는 파벌 사이의 정치투쟁의 일환이자 돌발 변수다.

상하이방과 공청단, 태자당이라는 구분보다는 장쩌민계, 후진타오계, 중립계로 나누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중립계[1]는 태자당 출신이 대부분이지만 태자당이면서 공청단 출신도 많고 시진핑처럼 장쩌민계에 밀착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태상황의 지위를 잃고 있는 장쩌민을 대신해 당장은 아니겠지만 태자당의 쩡칭훙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시진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핵심'의 출현이 예측된다는 점이다. 이는 정치국 상무위원회로 진입하는 역학 관계와 함께 향후 25명의 정치국 위원의 구성 또한 면밀하게 살펴볼 문제이다.

중앙 정치국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전 협의 및 합의된 내용으로 직권 선출한다. 현 17기 당 정치국 위원은 모두 25명이며 그 중 9명으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구성한다. 당과 국무원, 정협의 핵심 요직 및 베이징, 상하이, 텐진 시 서기가 당연직으로 포함된다. 18기 상무위원 진입을 앞두고 충칭 시 서기 및 광둥 성 서기가 포함된 것은 치열한 계파 경쟁의 일환이다.

보통 당 정치국 상무위원은 당내 서열 순이지만 당 정치국 위원은 성의 획순이다. 현 25명의 정치국 위원 중 상무위원 9명을 뺀 16명을 3번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정치국 위원 중 성과 특별시 서기 포함)

왕강 王刚

당 정치국 위원이자 현 정협 부주석 왕강은 공산당 중앙직속기관공작위원회 서기를 겸임한다. 1942년 10월 출생, 지린(吉林) 푸위(扶余) 사람으로 지린대학에서 철학을 전공, 1971년 공산당에 입당한다. 6-70년대 건설공업부의 홍보 선전 업무를 담당하다가 신장 위구르자치구 판공청 비서로 근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1981년부터 중앙의 타이완 판공실 비서로 발탁된다.

1985년 당 및 국무원 판공청 민원 처리 부서인 신방국(信访局)에서 능력을 발휘해 당안관(档案馆, 공문서 보관소) 관장을 역임한다. 1999년 당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중앙 판공청 주임이 돼 장쩌민 총서기의 집사로 발탁된다. 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2007년 당 정치국 위원이 된다.

당 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동시에 후진타오의 집사인 링지화[2]에게 판공청 주임을 물려준 후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맡는다. 장쩌민 시대의 가신이던 쩡칭홍으로부터 정치적 입지를 지속적으로 넘겨받는다.

왕러취안 王乐泉

당 정치국 위원 왕러취안은 쩡칭홍 계열의 저우융캉이 서기로 있는 중앙 정법위 부서기를 겸임한다. 1944년 12월 출생, 산둥(山东) 서우광(寿光) 사람으로 중앙당교 출신이다. 1966년 입당 후 마오쩌둥이 주창한 사회주의교육 운동에 참가하며 고향에서 공사(公社) 부사장과 서기로 활동한다. 1978년 서우광 현 서기를 거쳐 1982년 공청단 산둥 성 부서기가 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한다.

1989년 산둥성 부성장으로 신임을 받은 후 1991년부터 소수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한 신장 위구르자치구에서 10년 이상 머물며 중앙 정부를 대신해 정치력을 발휘한다. 인민정부 부주석, 부서기를 거쳐 1995년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서기가 된다. 2002년 당 정치국 위원이 되며 신장 자치 독립 운동의 과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 2010년 중앙 정법위 부서기를 맡는다.

후진타오의 측근으로 공안과 사법을 총괄하는 정법위에서 저우융캉을 견제하고 정치적으로 공청단 계열의 입지를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설명: 왕강, 왕러취안, 왕자오궈)

왕자오궈 王兆国

당 정치국 위원 왕자오궈는 전국인민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이자 전국노동조합 연합조직인 중화전국총공회(中华全国总工会) 주석을 겸임한다. 1941년 7월 출생, 허베이(河北) 펑룬(丰润) 사람으로 하얼빈공과대학에서 터어빈공학을 전공한다. 1965년 입당 후 1968년부터 후베이의 자동차공장에서 현장 기술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1979년 후베이 스옌(十堰)시의 제2기(第二汽)자동차 부공장장이던 시절 덩샤오핑의 주목을 받으며 후야오방 총서기에 의해 발탁돼 1982년 41세의 나이에 공청단 제1서기가 된다. 1984년 43세의 나이에 당 요직인 중앙 판공청 주임과 서기처 서기로 승진해 일약 차세대 지도자로 급부상해 '로켓서기'라는 별명을 얻는다. 후야오방의 실각을 앞두고 2년 만에 중앙판공청 주임을 원자바오에게 물려주고 1987년 푸젠 성 부서기로 물러난다.

푸젠 성장을 맡으면서 타이완 전문가로 변신해 투자 유치 등에 능력을 발휘, 1990년 국무원 타이완 업무 주임으로 다시 중앙 무대로 복귀한다. 1992년 타이완 문제를 관리하는 당 중앙통전부장을 맡으며 1993년 정협 부주석, 2002년 당 정치국 위원이 된다. 2003년부터 전인대 부위원장을 연임하고 있다.

왕치산 王岐山

당 정치국 위원 왕치산은 국무원의 금융, 대외 무역을 담당하는 부총리이다.  1948년 7월 출생, 산시(山西) 텐전(天镇) 사람으로 시베이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으면서 금융경제 전문가이다. 문화대혁명 시기 옌안으로 하방돼 산시 성박물관에서 근무한다. 1983년 입당 후 당 서기처 농촌경제연구실과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에서 일한다.

장인 야오이린(姚依林)[3]이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후 1988년 중국농촌신탁투자기업 사장에 이어 1993년 부총리이자 인민은행장인 주룽지에 이어 부행장으로서 근무하며 1996년 중국건설은행 은행장을 맡아 금융경제 전문가로 거듭난다.

1997년 광둥성 서기로 부임하는 리창춘을 따라가 성 상무위원과 부성장을 맡으며 금융 전문가로서 입지를 확실하게 다진다. 2000년 중앙 무대로 복귀해 부장급인 국무원 경제체제개혁판공실 주임을 맡지만 주룽지 총리의 은퇴로 다시 하이난다오 서기로 좌천된다. 2003년 사스(SARS)[4]의 여파가 베이징을 뒤덮자 베이징 대리 시장으로 다시 복귀해 무사히 사태를 진정시킨다.

2007년 베이징올림픽조직위원회 주석이자 베이징 시장 왕치산은 당 정치국 위원으로 들어가면서 후진타오의 직계인 궈진룽(郭金龙)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2008년 우이(吴仪)[5]의  뒤를 이어 국무원 부총리가 돼 금융개혁과 대외 경제교류에 전념한다. 당 원로의 사위로 장인의 정치적 후원을 받아 태자당이라 분류하지만 개혁파 성향의 경제 전문가라는 독특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있다.

(사진설명 : 왕치산, 후이량위, 류치)

후이량위 回良玉

당 정치국 위원 후이량위는 농업 및 소수민족 문제를 담당하는 부총리이다. 1944년 10월 출생, 지린(吉林) 위수(榆树) 사람으로 소수민족인 후이족(回族)이며 지린성 농업대학을 졸업한다. 1966년 입당 후 고향에서 혁명위원회 정치부 간사로 사회 활동을 시작해 1974년 현 부서기와 1977년 지린 성 농업국 부국장, 1984년 바이청(白城) 지역위원회 부서기, 1985년 성 농공부장을 거쳐 1987년 지린 성 부성장이 된다.

1990년 중앙 무대로 진출해 당의 최고 브레인 팀인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을 맡게 되며 1992년 후베이성 부서기로 행정가로 거듭난다. 1994년 안후이 대리성장과 성장을 거쳐 1998년 안후이 성 서기가 된다. 1999년 장쑤성 서기를 거쳐 2002년 당 정치국 위원이 된 후 2003년부터 국무원 부총리를 현재까지 연임하고 있다. 당내 최고의 농업 전문가로서 장쩌민의 정치적 후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류치 刘淇 서기

당 정치국 위원이자 베이징 시 서기 류치는 1942년 11월 출생, 장쑤(江苏) 우진(武进) 사람으로 베이징강철대학에서 야금제철을 전공한다. 우한(武汉)강철 공장에서 근무하던 1975년 입당 후 승진을 거듭해 1990년 사장이 된다.

1993년 국무원 야금공업부 부장을 거쳐 1998년 베이징 시 부서기 및 부시장이 된다. 시장 및 올림픽 조직위 주석을 거쳐 2002년부터 서기를 맡는다. 장쩌민의 정적이던 천시퉁(陈希同)이 제거된 후 서기로 올라온 자칭린을 이어 베이징을 맡은 것이다.

사스로 인해 위생부장 장원캉(张文康, 상하이방)[6]과 시장 멍쉬에눙(孟学农, 공청단)[7]이 동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다. 대리시장으로 온 왕치산이 사스 문제를 해결하고 부총리로 승진해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거론되는 반면 2012년 세대교체 시기, 70세를 넘겨 물러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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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권력인 장쩌민과 후진타오 계파에 속하지 않는다는 측면이 있지만 꼭 정치 개혁 등에서 중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두 계파 사이에서 뛰어난 능력으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독자적인 세력화, 시진핑을 옹립했다는 측면에서 쩡칭훙계와 독자적인 태자당으로 구분해도 좋다.

[2] 중앙판공청의 핵심인물인 링지화(令计划)와 왕후닝(王沪宁)은 각각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브레인으로 경쟁 관계에 있다. 자세한 프로필은 중앙판공청 편 참고.

[3] 1917년 출생, 1935년 공산당에 입당. 신중국 정부 재무 전문가로서 국무원 부총리,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을 역임했으며 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은퇴 후 1994년 사망. 딸 야오밍산(姚明珊)을 왕치산에게 시집 보냄.

[4] 전염성비전형폐렴(传染性非典型肺炎)이라 부르며 약자로 페이뎬(非典)이라 함.

[5] 1938년 출생, 1962년 공산당에 입당. 2003년 3월 여성 부총리가 되자마자 사스의 발생으로 위생부 부장을 겸임하며 진두지휘함.

[6] 1940년 출생, 1966년 공산당에 입당. 해방군 소장 출신으로 위생부장에서 물러난 후 현 전국정협 교과문위체(教科文卫体)위원회 부주임을 맡고 있음.

[7] 1949년 출생, 1972년 공산당에 입당. 공학도로 공청단 베이징 부서기 출신이며 베이징 시장에서 물러난 후 후진타오의 총애로 산시(山西) 성장으로 복귀했으나 산사태로 인한 사망 사건 발생 책임을 지고 다시 물러남. 현 중앙직속기관공위(中央直属机关工委) 부서기로 다시 일선에 복귀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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