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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링구쓰(灵谷寺)는 아주 큰 사원이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그 규모는 변했지만 그 절터는 그대로 남아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링구쓰는 명나라 초기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만들어졌으나 청나라 태평천국의 난으로 훼손됐다. 다만 우량디엔(无梁殿)만이 겨우 그 형체가 보존되었다.

웅장했던 우량디엔은 1930년대 국민당정부가 링구쓰 절터를 전몰장병의 묘지로 사용하면서 제를 올리는 링탕(灵堂)이었다가 지금은 씬하이꺼밍씨샹관(辛亥革命蜡像馆), 즉 실물 인형 전시관, 즉 밀랍관이 된 것이다.

씨샹관 왼편, 링구타(灵谷塔) 방향으로 가는 길에 취엔윈(泉韵)이라는 문이 하나 있다. '운이 솟는 샘'인가. 정말 운이 절로 나오는 운치 있는 글체다.

그 취엔윈 오른쪽으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이 바로 옛 우량디엔, 지금의 밀랍관이다. 청나라 씨엔펑(咸丰)제 시대인 1850년대, 태평천국 반란군과 청나라 군사와의 전투 와중에 겨우 그 형체를 남겼다 한다.

그리고 통쯔(同治) 시대였던 1867년에 앞 글에서 소개한, 현재의 링구쓰인 롱왕먀오(龙王庙)를 새로 지었다. 그러다가 국민당 정부가 우량디엔의 불교유물들을 롱왕먀오로 옮기고 북벌 과정에서 숨진 군사들을 위한 위령 공간으로 사용했다.

우량디엔 정면, 남쪽에는 국민당 정부의 전몰장병을 위한 파이팡(牌坊)이 있다. 가운데 따런따이(大仁大义)라 있어 따런따이파이팡이라 부른다. 국민당을 상징하는 상징이 보인다.

파이팡에서 바라보니 조그만 문이 보이고 그 위에 씬하이꺼밍씨샹관이란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는 원래 우량디엔이었음을 보여주듯, 또 그 위에 간판이 걸려 있다. 역사자료를 굳이 찾지 않더라도 그 옛날 링구쓰의 가장 아름다웠던 푸디엔(佛殿)이던 우량디엔 자리였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씨샹관(腊像馆)의 글자는 1990년대 초에 천리푸(陈立夫)라는 서예가가 쓴 것이라 한다. 재미 있는 건 '腊'는 '蜡'를 잘못 쓴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腊'는 'la', 'lie', 'xi'로 발음되고 'xi'로 발음되면 깐로우(干肉)란 뜻의 마른고기 또는 포를 의미하니 맞지 않다는 것이다. '蜡' 역시 'la', 'qu', 'zha'로 발음되며 라샹(蜡像)이 밀랍이니 그 의미가 맞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腊'는 깐로우라는 뜻도 있지만 넓게 해석하면 무나이이(木乃伊, 미라)로 볼 수 있고, '생명은 없지만 생전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한 것을 뜻하니 틀리지 않다고 한다.  

본래는 우량디엔(无量殿)으로 불리던 우량디엔(无梁殿). 간판 바탕 색은 서로 달라도 필체와 그 색감은 서로 같다. 소박하면서도 탐스런 느낌은 주는 필체가 아닌가. 그 옅지도 깊지도 않아 은은한 맛이 감도는 게 호감이 간다.

이 곳의 높이는 22미터에 이른다 하니 옛 푸디엔(佛殿)으로는 꽤 컸다. 안에는 1994년 1월에 만들어져 공개된 중국 근대화 과정의 역사적 인물들의 밀랍들이 전시돼 있다.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11년 신해혁명, 1927년 북벌 승리까지의 역사적 인물 57명이 실제 크기 그대로 제작돼 있다. 비록 밀랍이지만 청나라 말기의 역사와 신해혁명의 의미를 새겨볼 수 있다.

입구에는 '국민혁명열사의 위패'(灵位)가 있다.

베이징에 있던 군벌과의 북벌전쟁(北伐战争)에서 사망한 3만3천4백2십4명의 이름을 4면 벽을 타고 모두 적어 놓았다. 이렇게 이름 석자 남길 뿐이건만 사람들은 정치와 사상에 따라 서로 죽이는 전쟁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젖었다. 하여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새긴 건 중국에도 유례가 없다 한다.

그럼, 이제 씨샹관에 있는 인물들에 대해 공부를 해보자.

린저쉬(林则徐, 임칙서)는 푸젠(福建) 성 푸저우(福州) 사람으로 청나라 말기 따오꽝(光) 시대, 아편 엄금 (严禁鸦片) 정책을 주장했으며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몰수, 불 태우고 추방하니 야피엔짠쩡(鸦片战争)이 일어난 계기가 된다.

전쟁론자로 비판 받아 유배 당한 후, 다시돌아와 태평천국의 난 평정을 준비하고 부임하던 1850년, 사망한다.

덩스창(邓世昌, 등세창)은 꽝똥(广东) 성 판위(番禺) 사람으로 청일전쟁의 영웅으로 추앙 받는다. 그는 해군 함장으로 일본군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우다 1894년 지금의 산똥 웨이하이(威海) 시 룽청(荣成) 청산(成山) 앞바다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해 청 조정은 '状节'라는 칭호를 내렸고 현재 청산토우(成山头)에는 그의 기념비도 있다. 1996년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원양함선의 이름을 '스창'(世昌) 호라 명명하기도 했다.

리홍장(李鸿章, 이홍장)은 안후이(安徽) 성 허페이(合肥) 사람으로 청나라 말기 정치가이며 외교가이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지역민병대인 화이쥔(淮军)을 이끌고 정치적으로 도약한 후, 과학과 군사력을 중시하는 양우윈똥(洋务运动)을 주도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서양열강과 마관탸오위에(马关条约, 시모노세끼조약)과 씬초우허위에(辛丑和约, 베이징의정서)를 직접 띠지에(缔结, 체결)하기도 했다.

의화단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서양열강의 베이징 침공과 그 의정서 내용에는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향후 국민당 정부, 마오쩌똥 정부에 이르기까지 부담이 되기도 했다.

치여우찐(秋瑾, 추근)은 푸졘(福建) 성에서 태어난 저쟝(浙江) 성 샤오씽(绍兴) 사람으로 청나라 말기 혁명운동가이며 중국 최초의 여성해방을 부르짖던 선구자이다.

1904년부터 청나라의 부패상을 목격한 후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보다 근대화 과정에서 계몽운동, 혁명운동, 여권운동 그리고 무장봉기에 이르기까지 실천적 삶을 살다간 여성이다. 베이징과 상하이, 그리고 샤오씽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1907년 무장봉기가 발각돼 고문 끝에 사형 당했는데, 당시 나이가 32살이었다.

루하오똥(陆皓东, 육호동)은 꽝저우의 썅산(香山) 사람으로 쑨원과 함께 자라고 공부한 완빤(玩伴, 동무)이며 혁명 동지이기도 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쑨원의 영향을 받아 서구식 민주주의 사상을 접한 후 청나라의 개혁을 준비하고 청원하기도 한다.

이후 청일전쟁 패배 이후 쑨원과 함께 반청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꾀한다. 1895년 무장봉기는 사전에 발각돼 수포로 돌아가지만 체포 당시 당원명부를 완전 소각 후 사로잡히고 사형 당한다.

밀랍에서 그는 청색 바탕에 힌색인 12개의 삼각형과 가운데 원이 조화를 이룬 칭티엔바이르치(青天白日旗)을 걸치고 있다. 이 깃발의 유래는 대만국기와 연관이 많다.

루하오똥은 쑨원을 비롯, 삽합회 조직원이던 쩡스량(郑士良), 천샤오바이(陈少白) 등과 중국 최초의 혁명조직인 씽쭝회이(兴中会)를 만든다. 그리고 꽝저우 봉기 때 루하오똥은 자신이 직접 고안하고 도안한 이 깃발을 선보인다. 이후 후이저우(惠州) 봉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루하오똥은 체포되고 사형 당한다.

처음에 루하오똥이 이 깃발을 만들 때는 특별한 규정이나 의미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깃발을 만드는 사람들마다 도형의 크기나 배열이 다 제각각이었다. 이후 쑨원은 펼쳐져 빛나는 12개의 도형의 의미를 12간지로 해석하고, 시간의 개념으로 이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후 1906년 당시 혁명의 중심이던 통멍회이(同盟会)의 간부회의에서는 모두 5개의 서로 다른 국기가 제안됐는데, 쑨원도 이때 루하오똥의 고안한 칭티엔바이르치에 자신의 삼민주의 이념을 첨부한 칭티엔바이르만띠홍치(青天白日满地红旗)를 주장한다. 흰색과 파란색의 루하오똥의 깃발을 빨간색 바탕 왼쪽 윗편에 배치한 깃발의 모습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쑨원의 깃발이 통과되지 못한다. 민국 원년에 다시 쑨원은 국기로 관철시키려 하나 참의원의 반대로 무산되고 단지 해군기로만 활용된다. 이에 쑨원은 다시 반대 이유를 설명해 결국 그의 깃발을 국기로 관철하고 만다. 이후 쑨원 사후 국민당의 쟝지에스는 이 깃발을 국기로 계속 사용하게 된다.

위여우런(于右任, 우우임)은 산씨(陕西)성 싼위엔(三原)사람으로 1906년 통멍회이(同盟会)에 참가하면서 쑨원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제국주의 반대운동을 전개한 정치가, 시인, 서예가이며 언론인이기도 했다.

그는 1905년 상하이의 명문인 푸단(复旦) 대학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주로 상하이에서 언론 기자로서 혁명운동을 고취시키는 일을 하다가 난징 정부에서 장관을 지내기도 한다. 그는 1964년 타이완에서 지병으로 사망한다.

쑨원, 쑨쭝산(孙中山)이다. 1925년에 쭝산시로 이름이 바뀐 꽝똥(广东) 성 썅산(香山)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형의 도움으로 기독교를 접하고 의학을 전공해 성공한 개업 의사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중국의 앞날에 관심을 가지던 그는 혁명운동의 선구자로서, 삼민주의를 제장한 사상가로서 중국의 국부로 존경받는다. 혁명조직 구축과 무장봉기 기도 등으로 혁명에 참여하면서 도피와 해외 망명생활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실천하고 조직한다.

우창(武昌) 봉기로 촉발된 씬하이꺼밍(辛亥革命)을 주도해 공화정을 펼치나 군벌의 힘에 밀려 곧 위엔스카이(元世凯)에게 권력을 이양하게 된다. 이후 군벌과의 협상을 위해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중 간암으로 사망한다.

한편, 쑨원은 정치적 동지이며 비서인 쏭칭링(宋庆龄)과 결혼했는데, 쏭칭링은 그의 유언을 받들어 이후 좌파 성향을 띠게 되고 쟝지에스 대신에 마오쩌똥 정권을 지지함으로써 힘을 실어주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지도자로 활동했으며 베이징 허우하이(后海) 근처 고가에서 살다가 1981년 사망한다.

쑨원을 비롯 아이들 앞에 있는 사람은 펑솽관(冯爽观, 풍상관)이다. 쑨원은 어린 시절, 동네의 한 싼허회이(三合会) 무술도장에서 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싼허회이는 가끔 홍콩영화에 등장하기도 하는 조직인데, 원래 반청복명 조직으로 그 역사가 깊다. 싼허회이는 바로 태평천국의 난에 참여하는데, 그는 바로 태평천국의 난에 참가했던 늙은 군인이었던 것이다.

풍상관은 아이들에게 '태평천국'을 꿈꾼 홍쉐이췐(洪水全)에 대한 영웅담과 청나라 군대와의 전투 경험을 이야기해 주곤 했다. 쑨원은 그의 이야기에 심취했고 '홍쉐이췐이 청나라를 때려부순 건 정말 잘한거야'라고 말해 '제2의 홍쉐이췐'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쑨원은 삼합회 회원인 쩡스량(郑士良)의 도움으로 무장봉기를 도모하기도 하는 등 초기에 태평천국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쑨원은 위엔스카이에게 권력을 이양한 후 공화정 수호를 위한 혁명운동을 계속 이어간다. 1921년에 이르러 자신의 고향에서 꽝저우 정부를 수립하고 북양군벌 타도와 반 제국주의 운동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1924년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꽝저우 황푸(黄埔)에 육군군관학교를 설립한다.

'혁명적 군사 및 정치 조직원'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학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력 아래 운영되었다. 당시 꽝저우 정부의 총리인 쑨원이 주도한 군관학교이지만, 사진 왼편의 군관학교장 쨩지에스(蒋介石), 가운데 국민당 대표인 랴오쭝카이(廖仲恺)와 함께, 오른쪽의 정치부 주임을 역임한 중국공산당 지도자 저우언라이(周恩来)도 참여한 양당 협력의 학교인 셈이다.


이 당시 이미 쑨원은 국공합작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반제국주의 연합을 위해 소련과도 협력하는 등 중국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전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57명의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니 참 시간이 길다. 기나긴 터널을 빠져 나온 느낌이다. 중국인들은 씬하이꺼밍(辛亥革命)을 우리보다 훨씬 자세히 알고 있으리라. 우리도 중국 근대화와 현대의 중국을 이해하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되새겨 볼 일이다. 씨샹관 뒷문을 나오니 환한 햇살 아래 사진을 찍는 사람들 모습이 정겹다.

중국의 근대화는 우리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온 것 같기도 하다. 외세 앞에 놓인 왕조 정권이란 점에서는 유사하나 일본과 다르고, 또 그 대응이란 측면에서 중국과 우리는 또 다르지 않을까. 그러나, 서로 다른 상황에서 이뤄진 근대화 과정이지만 현대사회와도 그리 멀지 않은 세월이고, 또 여전히 그 역사와 잇닿아 있음을 느낀다.

예전에 한중일 역사교과서 관련 심포지움에 취재를 갔다가 3국이 공동으로 편찬한 공동 역사교과서를 본 적이 있다. '동북아의 평화와 미래'를 위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과서. 세나라 연구진들이 치열한 토론과 고민 끝에 펴낸 교과서.

그 교과서는 주로 근대화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까지를 담았다. 과연, 언제 선사시대부터 지금에 이르는, 통일된 동북아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긴 호흡으로 구경한 씬하이꺼밍씨샹관을 빠져 나왔다.

이제 밍샤오링(明孝陵)을 보러 갈 시간이다. 쑨원이 잠들어 있는 쭝산링(中山陵)을 중심으로 오른편이 이곳이고, 밍샤오링은 왼편이다. 붉고 노란, 이쁜 샤오훠처(小火车)다. 작은 기차란다. 후후~

밍샤오링은 세계문화유산이다. 샹처(上车) 요금 3위엔을 내고, 명나라를 개국한 쭈위엔짱(朱元璋)과 황후의 링먀오(陵庙, 능묘)를 만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