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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는데 사람은 무엇을? 윈스턴 처칠, 오드리 헵번, 어네스트 헤밍웨이, 알버트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테레사 수녀, 소피아 로렌, 재클린 케네디의 공통점은? 이름 들어 알 정도의 역사적 인물인 것을 빼고 나면 유섭 카쉬(Yousuf Karsh)를 떠올려야 한다.

사진작가 카쉬(1908~2002)는 흑해 연안 아르메니아 공화국 태생의 캐나다 이주민이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숙부의 영향으로 초상 사진을 찍던 그는 1941년 캐나다를 방문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사진을 찍었고 <라이프(LIFE)> 지의 표지로 실리면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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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인물사진의 거장 카쉬展(전)>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3일 오후 5시 주최 측(한겨레신문과 뉴벤처엔터테인먼트)이 마련한 조촐한 개막식을 찾았다. 사진을 사랑하는 작가 및 지망생들 200여명이 붐볐으며 청융화 주한중국대사를 비롯 사진이 주는 감성을 직접 보기 위해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손범수 아나운서의 차분한 진행으로 주최 측 대표의 인사말과 함께 육명심 사진작가, 재키 엘가 보스턴미술관 수석, 유경선 중앙대 명예교수, 방송인인 이상벽씨가 차례로 축하 말을 통해 '카쉬'와 '사진'에 대한 진한 공감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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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식 진행을 맡은 손범수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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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헌 한겨레신문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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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명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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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이상벽씨

개막식을 마치자 전시장의 문이 열려 말로만 듣던 거장 카쉬의 '이름'들을 차례로 살펴볼 기회가 생겼다. 사진을 향하는 조명들이 수 없이 연결된 느낌을 주고 흰색, 붉은색과 파란색 톤으로 섹션을 나눈 공간 구분이 참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입구 초입의 <윈스턴 처칠>은 단연 주목을 받았다. 처칠의 이글거리는 눈매와 시가 없는 손의 위치는 볼수록 강렬한 메시지가 있다. 카쉬는 '옷에 묻은 실밥을 떼주는 행동'처럼 처칠에게서 시가를 정중히, 즉흥적으로 내려놓게 했다고 한다. 찰나를 담는 사진은 그래서 우연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 창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 15,312명의 인물을 찍은 거장의 이 '계획 없는' 행동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으니 어쩌면 처칠이야말로 2차 세계대전의 영웅뿐 아니라 카쉬는 물론이고 모든 사진작가들의 영웅이 아닐까. '세계에서 가장 많이 지면에 실린 사진 중의 하나'인 <윈스턴 처칠>을 직접 본다는 것은 영웅을 만나는 즐거움과도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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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융화 주한중국대사

섹션마다 사진들을 미리 보고 난 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을 할까 지켜봤다. 어떤 심리적 반응 또는 미세한 감동을 담은 뒷모습을 찾아보는 재미는 사진전 감상에 더해 부수입으로 얻어볼 요량이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마치 로마제국의 원로 근위병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꽉 다문 입은 조명 때문에 더 빛나는 볼과 이마와 함께 확신에 찬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비행기 추락사고와 4번의 결혼, 음주, 유혈이 낭자한 스포츠 탐닉 등으로부터 <노인과 바다>를 창조한 불굴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듯한 백발의 <알버트 아이슈타인> 앞, 맑은 눈과 패인 주름의 조화, 얼굴 동선의 부드러움 속에 명확하게 드러나는 천재의 느낌이 훑고 지나간 후 차츰 해학의 단내가 난다. 천재의 불편함이 아닌 과학과 예술, 문화까지 인류의 평화로 승화시킬 듯한 할아버지가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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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드리 햅번>은 하루 종일 보고 또 봐도, 아름다운 사진의 얼굴이다. 아니 아름다운 얼굴의 사진이라고 해도 되겠다. 왜 여배우를 찍었을까. 벨기에 출신으로 영화 <로마의 휴일>로 세계의 연인이 된 그녀는 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개인적 고통과 노년에 인류애를 실천한 천사가 함께 녹아 있으니 카쉬의 카메라에 살포시 들어왔으리라.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녀를 영화가 아닌 사진이 주는 색다른 미인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커다란 붉은 모자를 쓰고 있는 <소피아 로렌>은 카쉬답지 않게 칼라 사진이다. 굵은 이목구비를 살려 위와 아래를 비운 구도가 오히려 멀리서 봐도 단박에 명품사진임을 직감하게 한다. 글래머스타, 연기파 배우의 이미지는 이 한 장의 사진 속, 원숙하고 지적인 미소로부터 부활하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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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65점의 사진이 전시됐는데 하나하나 그 세밀한 느낌을 잡아내려면 시간이 빠듯할 것이다. 사람들은 카쉬가 전하고 한 인물의 구도와 조명, 삶의 가치관까지 공감하려고 애쓴다. 문득 사진을 향해 있는 조명 때문에 실루엣으로 연신 오고 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진지함이 묻어나는 것은 이미 세상을 떠난 카쉬가 생전에 안배해놓은 것은 아닐까.

사진을 보고 사진과 소통하는 사람들의 사진 같은 정지를 보노라면 우리는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평생 찍었던 사람들과 카쉬, 카쉬의 사진을 함께 보는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그저 하나라기 보다는 다른 생각을 서로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따뜻한 하나가 아닐까. 늘 남을 헐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오드리 햅번> 앞에 나란히 서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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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의 거장'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사진작가 5인의 특별전시가 함께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좋은 사진작가가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눈길과 발길을 함께 잡은 <안익태>, <서정주>, <안성기>, <김희애>, <문훈숙>, <피천득>, <정일성> 앞에 섰다.

고 임응식 작가의 1955년 작품인 <안익태>는 지휘하는 손놀림에는 리듬이 있고 입 속에는 무언가 담아둔 듯한 소리가 함께 뿜어져 나와 진지한 대한민국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아~ 이런 것이 '포착'일까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축사를 하기도 한 육명심 작가의 <서정주>는 관악산을 배경으로 쌀쌀한 날씨에 움츠린 모양새이건만 포근한 시어를 쏙 담았을 것 같은 시인의 정취가 있다. 손을 펼치면 산 능선 가득하게 사랑의 언어를 갈겨댈 것 같은 모습이다. 시인인 줄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꼭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싶은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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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작가의 <안성기>와 <김희애>는 나란히 붙어서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다. '주름이 만든 카리스마'는 주름도 최고이고 카리스마도 최고였다. 사진작가는 조각가가 아니니 주름을 빚었을 리 만무한데 어떻게 이다지 다정한 카리스마를 풍기게 작품을 만들어낼까. 의도적으로 사진의 눈부터 시작해 얼굴 전체를 줌아웃으로 보면 정말 카리스마란 이런 것이구나 느낄 것이다.

역시 줌아웃으로 <김희애>를 봤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눈물 한 방울'을 먼저 보게 되는데 이 눈물을 보고 눈물 없는 눈, 그러나 눈 속에 하염없이 깊은 우물을 담은 눈을 보고 서서히 얼굴 전체를 바라보자. 눈물이 슬픈 것은 눈과 코, 입 그리고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하나로 볼 때 진정 슬퍼지는가 보다. <김희애> 앞에서 이렇게 눈물부터 보고 얼굴을 천천히 최대한 느리게 볼 수 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을 지 모른다.

<송강호>와 <전도연>도 소박한 공감이어서 좋지만 임영균 작가의 <문훈숙>이 인상적이다. 발레리나의 앉은 모습, 앞모습과 거울에 비친 뒤와 옆모습을 담았다. 내 마음을 끈 것은 아마도 발레리나의 몸매를 버린 것에 주목했는데, 아니 얼굴에 집중했다. 화려한 무대 모습과 혼신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서로 다른 뉘앙스로 다가오듯이 우리는 얼굴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자신의 얼굴을 여러 방향에서 보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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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작가의 <피천득>과 <정일성>은 얼굴 속 깊이 들어가 있는 손을 잘 살려내는 듯하다. 작가가 '소년'이고 '청년'이라 부르고 싶어하는 마음을 사진은 고스란히 담았다.

개업식에 이은 관람이라 다소 어수선했다. 모든 사진을 다 보지도 못했지만 이 전시회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제 사진은 매니아들의 단순한 사진을 공부하는 장소가 아닌 온 가족이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 된 듯하다.

어떻게 볼까 생각해야 한다. 20세기 최고의 사진작가가 숨쉬는 예술의 전당에 가려면 조금 카쉬를 이해하고 가자. 가족 나들이로도 좋으니 사진 속에 담긴 이야기를 가지고 대화하는 시간이라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인물사진의 주인공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윈스턴 처칠과 오드리 햅번의 삶과 이미지 그리고 그들을 담아낸 감수성과 열정까지 다 사랑으로 다가오게 된다. 사진을 사랑하게 된다.  

디지털카메라라면 어떤가. 비싸건 싸건 좋건 나쁘건 카메라로 담을 수 있는 느낌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작가가 사진을 남기면 사진에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기회가 될 듯싶다. '공감'이라는 것을 느끼는 일이 구도나 조명보다 더욱 '사진답다'는 것을 느낀 좋은 전시회 공간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