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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살면 친구가 그립다. 베이징에 살면서 멘토 같은 선배가 있다면 더욱 좋다. 해외에 사는 까닭에 함께 어울릴만한 모임이 있다는 것은 꽤 커다란 기쁨이다. 사업에 지치고 생활에 윤기가 떨어질 즈음이면 소박한 커뮤니티 하나 만들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 싶다. 두루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나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모임. 이름도 <낭만1번지>라 부르게 됐다.

이 모임의 선배 한 분이 환갑을 맞았다뭔가 색다른 이벤트를 해드리자는 취지에서 베이징 외곽 만리장성 중에서도 가장 멋지기로 유명한 젠커우(
箭扣)장성을 만장일치로 골랐다.


2011
9 24. 아침 7 30 25인승 버스 한 대. 모두 16명이 탔다. 시내에서 열하일기의 땅 청더(承德) 방향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산을 넘어 가면 도착한다. 2시간 후 도착한 만리장성 입구. 1시간 가량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만리장성의 능선 위로 오를 수 있다.

행정소재지는 베이징시 화이러우(懷柔)현 바다오허(八道河)향에 있는 시자즈(西柵子)생태원이다. 입장료 20위엔이다. 2008년에는 10위엔이던 기억이 난다. 물론 4~5년 전에는 등산금지 지역이기도 했다. 너무나 가파른 이 미개발장성에서 중국사람들 몇 명이 추락사해 통제됐던 곳이다.



산을 오르기 전 떡 간단한 게임을 했다. 싱글 팀과 벙글 팀으로 나누어 풍선 빨리 불어서 터트리기이다. 지는 팀은 무거운 떡 생일케이크를 들고 올라가야 한다. 꾹꾹 눌러 만든 순 우리 떡이라 꽤 무겁다. 1시간 내내 3~40도 경사를 줄곧 올라서 모두 숨이 가쁘다. 특히 케이크를 들고 올라야 해 힘겹다. 번갈아 들었지만 보는 사람조차 숨가쁘다.

하늘로 오르는 계단이란 뜻의 텐디(天梯)와 매도 날아오르다 나자빠진다는 뜻으로 경사가 거의 8~90도에 이르는 잉페이다오양(鷹飛倒仰)도 보인다. 바로 명당자리이다. 망루를 타고 올라 약간 넓은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케이크와 과일, , 대추 등으로 상차림을 시작했다.

망루 사이 좁은 틈새에 모두 앉았다. 생일 초를 케이크 위에 올리고 축하 노래를 부른다. 만리장성이 다 떠나가도록 크게 모두 함께 불러본다. 명나라 시대 쌓은 장성 돌도 흔들리는 듯하다. 촛불을 끄고 떡과 대추, 준비해간 음식을 차례로 나눠먹었다. 술 한잔에 얼큰하게 기분도 좋다.

 

우리 일행 중 일흔을 앞둔 가장 연로하신 박사장은 그 사이를 못 참고 눈 앞에 보이는 가파른 망루를 올랐다가 돌아왔다. 매주 등산으로 다져진 체력이 대단해서 모두 부럽기도 하고 반성도 한다.




어느덧 1시간이 지났다. 가파른 장성을 배경으로 망루 앞에 자리를 잡았다. 기념촬영을 했다. 아마도 만리장성에서 환갑연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일은 세계에서 처음일 것이라고 누군가 소리쳤다. 세계 최초는 아니더라도 중국의 상징, 달나라에서도 그 윤곽이 보인다는 만리장성에서 무언가 기념하는 일이 나쁘지 않다. 모두 흥겹기도 하지만 환갑 맞은 선배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다.




다시 장성 등산로를 내려간다. 아래 마을에서 잔치를 벌일 예정이다. 만리장성은 간단하게 축하행사만 하면 되고 술 마시고 덕담하는 자리는 아니기에 말이다.

 

하산 길에 수많은 꽃과 풀, 나비와 벌을 만날 수 있다. 나팔꽃, 해바라기, 호박꽃도 있지만 풀 속에 숨은 꽈리도 반갑다. 햇살이 화사해 풀잎 위를 가득 밝게 비추고 있다. 여느 동네 보다 엄청나게 큰 옥수수는 알맹이를 다 드러내고 있다. 하얗고 노랗고 붉고 파랗고 보랏빛 도는 느낌의 꽃들의 향연이다.




장성 한 켠이 허물어진 상태로 방치된 곳도 있다. 그 옆에는 사진과 마음만 가져가고 장성의 그 어떤 돌이나 자연은 남겨두고 가라는 팻말도 보인다. 바로 미개발장성이야말로 자연 그대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진정 참 역사이고 미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풀벌레와 함께 허물어진 채 그대로인 장성이 언제까지 이 모습대로 남을 지는 알 수 없다.

등산로 입구 옆 언덕 위에 아담한 농가식당이 있다. 식당 마당에는 자오(’)라고 써 있는데 식당 주인의 성이다. 그래서 식당이름도 자오스산쥐(趙氏山居)이다. 준비해간 삼겹살을 숯불에 굽기 시작했다.

 

잠시 시간을 내 농가 주변을 둘러봤다. 정말 우리나라 농가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식당 마당에 주렁주렁 옥수수가 매달려 있다. 다 말리고 나면 탈곡기로 알을 빼낸다. 마당 구석에 있는 탈곡기에 옥수수를 넣고 힘껏 돌리니 알들이 차례로 쏟아져 나온다.

 

탈곡기 뒤 창문 틀에는 장성 발 아래는 우리 집(長城下是我家)’이라는 현판이 놓여있다. 장성 바로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재치이자 자부심이 느껴진다. 마당에는 호박도 걸려 있고 가운데는 땅굴이 하나 있다. 맥주 한 박스를 주문했더니 창고이자 땅굴에서 가지고 나온다. 한여름에도 시원해지는 얼음골인 것이다.

 

온 사방에 주먹만한 열매가 널려 있다. 바로 호두, 허타오(核桃)이다. 건과류를 대표하는 것으로 창셔우궈(長壽果) 또는 완수이즈(萬歲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건강식품이다. 우리가 호두(胡桃)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원산지 유럽으로 중국 서북을 통해 들어온 것이어서 그렇게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직역하면 '오랑캐 복숭아'이니 말이다.

이 호두는 사실 잣처럼 껍질을 두 번 벗겨야 먹을 수 있다. 이 호두껍질을 둘러싼 껍질이 또 있다. 호두 바깥껍질을 벗기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잣 열매를 벗겨먹은 경우는 있지만 호두껍질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농가 뒤쪽도 옥수수 밭이다. 밭 옆에 핀 꽃에 나비와 벌이 쌍을 지어 노닌다. 연보라 꽃 잎 위에 진한 주홍빛 나비 한 마리가 가만히 앉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봐도 좀체 달아날 생각이 없다. 사람의 왕래가 작을수록 자연은 자연다운 것이 아닐까 싶다.

 

문득 농가 지붕 위에 희한한 꽃이 폈다. 햇살을 향해 살포시 자라서 언뜻 잘 눈에 띄진 않아도 분명 지붕을 덮은 기와 사이로 무언가 자라나고 있다. 식당 주인에게 얼른 달려가 이름이 무언지 물었다. 중국말로 뭐라 하는데 잘 모르겠다. 글로 좀 써달라고 하니 주인 아주머니가 딸은 부른다. 종이에 와타화(瓦塔花)라고 써준다.

 

돌아와서 검색해보니 타화와쑹(塔花瓦松). 직역하면 탑꽃기와소나무? 검증된 지 모르겠지만 항암치료효과까지 있는 희귀한 식물이라고 한다. 식당 주인은 100년 이상 된 집 지붕 위에서만 자라고 피어난다고 자랑한다. '하늘을 향한 탑 모양'이라는 타싱징톈(塔形景天)이란 별명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바위솔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암 수술 후 전이 방지 등에 굉장한 효과가 있다는데 깜짝 놀랐다. 중국에서는 쓰촨(四川), 간쑤(甘肅등 고원지대에서 많이 난다고 하는데 베이징 외곽 산골마을 농가 지붕에 등장했으니 참 뜻밖이다.

 

삽겹살 파티에 이 식당의 요리 8가지를 주문했다. 특히, 바로 집 옆에서 즉석에서 따다가 요리하는 예차이(野菜), 산나물요리가 가장 인기가 좋다. 맥주를 마시며 환갑잔치 칭송이 이어졌다. 만리장성에 올랐으니 마오쩌둥이 1935년에 지었다는 시의 한 구절인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는 덕담도 이어졌다.

 

두루 돌아가며 소위 성화주(聖火酒)를 마셨다. 성화 릴레이처럼 맥주 병 위에 잔을 올리고 마시는 놀이이다. 술을 마시기 전 한마디씩 남겼다. 만리장성의 기운을 받아 힘껏 그리고 정겨운 말투가 이어졌다.

 

잔치에 노래도 빠질 수 없다. 대중가요, 팝송, 동요와 운동권노래까지 마음껏 축하노래를 불렀다. 맑은 공기에 섞어 술도 거나하게 마셨지만 취기가 오르지 않는다. 춤도 추고 그야말로 난리가 날 정도로 시끄럽다. 그렇게 만리장성의 풍경 속으로 온갖 스트레스를 다 풀어냈다.

 

잔치를 끝내고 공터로 나갔다. 뒷마당 겸해서 간단한 올림픽 5종 경기가 이어졌다. 말이 올림픽이지 흥겨운 체육대회이다. 투창던지기 대신에 나무젓가락 던지기, 3단 넓이뛰기 대신에 뒤로 멀리뛰기이다. 제기차기도 하고 다시 풍선도 등장했다. 힘겨루기는 팔 굽혀 펴기인데 먼저 40대는 10, 50대는 5개를 먼저 한 후 60대까지 다 함께 시~작을 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우승을 하는 게임이다. 두 팀으로 나눠 수건 잡고 앉아서 빨리 걷는 게임은 서로의 마음까지 이어 달리게 된다.

 

하루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만리장성과 호흡했다. 모두 16명이 회비를 갹출했는데 1인당 150위엔( 28천원)을 냈다. 물론 삼겹살이나 일부 품목을 제공해준 벗들이 있긴 했어도 멋진 잔치를 차리기에 부담이 없다.

 

이제 다시 시내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맑은 하늘 위로 갑자기 피아노 건반 같은 구름이 펼쳐진다. 선율처럼 고운 마음으로 모두 하나된 환갑연이었다. 잔치를 하자면 식당에서 엄청난 과음과 폭죽으로 시끄러운 중국사람들이니 과연 만리장성에서 환갑연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성 위에서 세계 최초라고 말했던 것만큼 건전하고 뜻 깊은 축하 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