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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36 장시1 마오쩌둥이 앉았던 자리, 사진 찍는데 돈 내라


장시 성은 한나라 시대 예장군(豫章郡)이었으며 서진 시대에 강주(江州)라고 하다가 당 현종이 강남서도(江南西道)를 설치한다. 장시 성을 흐르는 간장(贛江)의 이름을 따서 약칭으로 ‘간’이라 한다.


장시 성의 수도는 난창봉기로 유명한 난창이며 북쪽으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루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북방에서 내려온 커자 부족의 근거지가 된 간저우가 있다. 장시 문화체험을 시작한다.




1)   루산 廬山 서양열강의 별장 마을 아침의 비둘기 합창


장시 성 최북단 도시 쥬장(九江)으로 향했다. 쥬장에서 다시 세계문화유산인 루산으로 가려면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루산의 중심인 구링(牯嶺)까지는 산을 구비구비 돌아 2시간을 간다.


구링은 해발 1164m로 그 형세가 수소와 닮았다고 해 지어진 이름이다. '구(牯)'는 '수소'이고 '링(嶺)'은 '고개'다. 계속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더니 산 전체를 안개가 덮고 있다. 산 아래와 온도 차가 무려 15℃ 이상 차이 난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반대편 산기슭에 펼쳐진 별장과 산을 넘는 구름이 빠른 속도로 옮아가고 있다.


고개 아래에 있는 식당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배낭을 열어 긴 팔 옷부터 하나 찾아 입고 시내를 두루 걸어 다녔다. 빗물이 남아있는 거리에 조명이 빛나니 산뜻해 보인다.


산 고개 아래 골목으로 내려가니 재래시장이 형성돼 있다. 사람들이 산 동네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여느 평지 도시와 사뭇 달라 보인다. 기름이 떨어지면서 통닭이 빙빙 돌아가고 있다.


다음날 아침 터미널에 가니 미리 예매하지 않는다. 오후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있다. 서둘러 루산 이곳 저곳을 다 보고 되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한다. 볼거리가 많아 하루 일정으로 오기에는 벅찬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링의 언덕에서 바라본 전경은 한 폭의 수채화다. 19세기말 영국 선교사 이덕립(李德立)이 입산해 아름다운 산세를 보고 이곳에 별장마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시 ‘시원하다’는 뜻의 'Cooling'의 음을 따서 구뉴링(牯牛嶺)이던 지명을 '구링'으로 바꿨다.


구링의 아침, 산 아래로 휘감아 오는 안개 속에 별장마을 분위기가 운치가 넘친다. 선명하다 못해 산뜻하고 상큼하다.


바로 옆으로 갑자기 비둘기 떼가 몰려들어 '구구구'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침을 더욱 맛깔스럽게 하는 새소리가 서서히 늘어나더니 이윽고 귀가 따가울 정도다. 한 할머니가 비둘기모이를 1위엔에 팔면서 먹이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붉은 색 초록색 지붕 위에 앉은 비둘기들이 참 평화롭다. 주둥이와 눈만 빼고 새하얀 비둘기들이 모이 앞으로 날아들기 시작한다. 할머니 손 위로도 올라가서 모이를 챙겨 먹으려 했다.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있는 비둘기 한 마리가 외로워 보인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한 할아버지는 얼후를 켜고 있다. 아침 안개가 구링 마을을 뒤덮고 있다. 어느덧 마을이 통째로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산 기슭마다 곳곳에 별장들이 자리잡고 있는 구링 거리를 1시간 가량 걸었다. 바람소리 따라 높은 나무들이 가지를 흔들고 있는데 가끔 이름 모를 새들이 앉아 있다.


구링의 아침 비둘기(왼쪽 위), 백거이 사당(왼쪽 아래), 루산의 호수(오른쪽)


호수의 모양이 거문고를 닮았다는 루친후(如琴湖)로 갔다. 잔잔한 호반인데다가 해발이 1000m에 이르는 고산지대에 이렇게 멋진 호수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호수 속에 있는 섬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따라 들어갔다. 섬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호수 속에서 본 모습도 아주 아름답다.


호반 주위로 예쁜 꽃도 피었고 졸졸 시냇물도 흐른다.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고 가볍게 산책을 하는 사람도 있다. 산책로에서는 과일을 팔기도 한다. 돌다리도 멋지고 호수 주변에 있는 나무벤치도 운치 있다. 나룻배 두 척이 나란히 서서 찰랑거리며 있는 모습도 낭만적인 호수를 만들어주고 있다.


호수 옆에는 멋진 정원이 하나 있는데 화분 및 수석 전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초당인 화징(花徑)이 있다. 사마(司馬) 벼슬을 할 당시 이곳을 찾아 '대림사도화(大林寺桃花)'라는 칠언절구를 남겼다.


늦봄이라 산 아래 이미 진 도화 꽃이 이곳에는 화창하게 피기 시작한 것에 빗대어 감탄사로 뿜어낸 것에서 ‘화징’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정자도 있고 연못도 있는 작은 초당. 꽃밭처럼 예쁜 정원에는 시상을 떠올리는 듯한 백거이의 조각상도 있다. 초당 안은 백거이가 쓴 작품들이 많이 전시돼 있다.


초당 안에는 붓글씨를 쓰는 묵객이 있어 사람 이름을 시제로 시를 짓고 부채에 써서 팔고 있다. 이름하여 이명작시(以名作詩)라 한다. 부채 위로 한자씩 정성스레 붓글씨를 쓰더니 낙관을 했다.


그리고 부채를 들어 쓴 시를 읽어주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머니는 '헌여우첸더스(很有錢的詩)' 즉 부자가 될만한 시라고 훈수를 두고 있다. 중국사람이 160위엔을 내고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부채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크고 작은 붓이 통에 담겨 있고 인주 위에는 연락처가 적혀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루산의 백거이 초당에서 독점으로 붓글씨를 써서 파니 꽤 유명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백거이보다 필체가 뛰어나지 않아도 사람들 이름으로 덕담을 짓고 있으니 이 또한 멋진 일일 것이다.


잔잔한 호수이지만 주변 산과도 잘 어울린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들도 호수를 바라보고 있겠지만 늦봄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을 노래한 시인의 마음도 느껴지는 곳이다.


2) 루산廬山 마오쩌둥이 앉았던 자리에서 사진 찍는데 돈 내라


루산에는 장장 2,500m에 이르는 진슈구(錦繡谷) 계곡이 자리잡고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 계곡에서 안개에 뒤덮인 루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한다.


계곡 입구에는 톈챠오(天橋)라 부르는 자그마한 바위가 계곡 사이에 불쑥 솟아나 있다. 바위 위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모습이다. 연인 한 쌍이 나란히 섰는데 정말 공중부양이라도 하는 모습으로 다소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가파른 산길을 따라 가니 아래 낭떠러지 쪽으로 가지 말라는 노란색 표시가 그려져 있다. 계곡 아래에서부터 구름인지 안개인지 계속 위로 솟구치고 있다. 산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더 무서운 공포가 밀려든다.


사자 입처럼 생긴 스즈커우(獅子口) 낭떠러지가 나왔다. 아래에 하오윈스(好運石)라 부르는 큰 암석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이 암석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여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면서 돌을 만져야 행운이 생긴다고 전해진다.


계속 계곡을 따라가면 곳곳이 절경이다. 아쉽게도 온 사방이 안개에 뒤덮여 있어서 아무 곳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길 옆으로 빨간 리본으로 묶은 열쇠꾸러미만 잔뜩 보였다.


산에서 솟아나 떨어져 내리는 판칭취엔(梵青泉) 샘물에는 사람들이 던진 동전들로 가득했다. 계곡을 따라 오느라 힘든 땀을 식히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는 쉼터이다.


조금 더 계곡을 따라 가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의자에 앉아 10위엔씩 돈을 주고 사진을 찍고 있다. 바로 마오쩌둥이 앉아 경치를 감상하던 자리라고 한다.


1959년 여름 당 중앙은 이곳 루산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열었다. 정치국원을 비롯 각 성과 자치주서기, 국가기관 책임자들까지 모두 모인 자리다. 이 회의가 열리는 도중 한국전쟁 총사령관이었으며 당시 국방부 부장이던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권위 남용과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는 서신을 보냈다. 마오쩌둥은 이를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이라 여겨 서신을 공개하고 펑더화이를 권력으로부터 축출하게 된다. 이후 반우파투쟁을 벌인 마오쩌둥이 앉은 자리가 관광명소가 된 것이다.


루산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멋진 자연경관 때문이건만 그 틈새를 차지하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얄밉기도 하다. 마오쩌둥이 앉았던 자리 부근 높은 나무에 앉은 원숭이가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조롱하는 듯 보인다.


동굴 속에 셴런둥(仙人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패방이 있는 동굴이 나타났다. 보통 신선과 관련되면 도교 유적지다. 도교의 삼청(三清)은 신선이 거주하는 곳으로 옥청(玉清)은 원시천존(元始天尊), 상청(上清)은 영보천존(灵宝天尊), 태청(太清) 도덕천존(道德天尊)의 순위다. 중국에서 삼청각이나 삼청전에 가면 이런 세 신선을 모시는 사당을 흔히 볼 수 있다.


태청은 노자를 원형으로 한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영험의 기운이 느껴졌다. 향불 앞에 있는 팻말을 하나 뽑으면 도사들이 뭔가를 적은 종이로 바꿔주고 바로 옆 태상노군전(太上老君殿)으로 가면 도사들이 길흉화복을 점쳐 준다.


1905년에는 한 도사(道士)가 도교의 천신이며 교주이며 도교의 삼청 중 세 번째 지위의 도덕천존을 기리는 사당인 태상노군전을 건립했다. 갈색 빛이 나는 나무에 머리와 눈썹 그리고 수염이 하얀 조각상이 특이해 보였다.


산에서 내려가려는데 레일 달린 차량을 타고 내려갈 수 있다. 사람들이 없어서 이상했지만 재미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아주 빠르게 내려간다. 고장 나면 떨어질 텐데 하는 두려움이 생겨 자꾸 손으로 브레이크를 당겼다. 그러니 차가 출발하지 않는데 몸을 써서 왔다 갔다 해도 움직이질 않는다.


레일을 타고 한참 산길을 내려 왔다. 다시 버스를 타고 내려갈까 하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텐츠쓰(天池寺)를 둘러보기로 했다. 넓은 광장 연못에 붕어들이 노닐고 있다. 연못 바닥에 항아리가 있고 동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루산의 바위(왼쪽), 마오쩌둥이 앉았던 자리(오른쪽 위), 루산의 흔들다리(오른쪽 아래)


잠시 쉬면서 지도를 보니 반대편 등산로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다. 절벽 롱셔우야(龍首崖)를 거쳐 오는 사람들이다. 산길을 따라 내려가 보기로 했다. 이 절벽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많다. 낭떠러지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내렸다가 또 오르는데 곳곳에 있는 암석들이 여러 가지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사자암(獅子岩), 문인암(方印岩), 문수암(文殊岩), 청량암(清涼岩) 등 암석들을 보면서 산을 타는 재미가 아주 좋다. 멀리 계곡과 계곡을 연결한 다리가 보였다. 안개도 다 사라지니 멋진 산 능선이 다 드러났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내리니 땀이 샘솟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꽃봉오리도 예쁘고 저 멀리 계곡에서 쏟아지는 폭포도 보였다. 어느덧 산과 산을 잇는 높은 다리인 톄숴챠오(鐵索橋)가 보였다. 돌과 돌을 쇠사슬로 연결했는데 틈 사이로 약간씩 흔들렸다. 계곡을 타고 부는 바람에 날려갈까 사슬을 꼭 잡고 천천히 다리를 건너갔다.


1993년에 만들었다고 하는 다리 중간에 섰다. 사방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루산 풍경의 진면목을 보는 듯하다.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산봉우리가 온 사방을 수 놓고 있다. 하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건너기 힘들어 보였다. 다리 아래를 보고 있자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리를 건넜는데 이곳에도 마오쩌둥이 앉았던 자리가 있다. 즉석에서 사진을 찍어주고 칼라 프린트 출력까지 해준다. 샘플 사진을 보니 일출 모습도 있는데 붉은 해가 정말 장관이다. 군복을 입고 찍은 사람들도 있다.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새벽 산행을 시작해 일출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이번에는 케이블카를 탔다. 산 아래를 둘러보면서 천천히 올라가고 있다. 수력발전소가 나타나 당황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버스 정류장. 복잡한 루산 등산로를 이제서야 제대로 이해한 셈이다. 다음에는 버스를 타고 이곳에 도착해 거꾸로 등산하면 좋을 듯하다.


수력발전소 주변에서 나비와 벌과 같은 벌레들과 한동안 놀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빨갛고 하얀 꽃들과도 정겨운 인사를 나눠 본다. 루산의 자연은 정말 모든 게 아름다운가 보다.


다시 구링 터미널로 돌아왔다. 버스가 서서히 출발했다. 너무도 아름다운 루산과 헤어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꼭 다시 오고 싶다. 버스는 산 굽이굽이 끝도 없이 내려갔다. 어제 올라올 때는 날씨가 흐려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데 정말 아름다운 산이다.


3) 난창 南昌 세계 최고의 미술품 당삼채로 빛나는 누각


장시의 수도인 난창 시내에 있는 텅왕거(滕王閣)를 찾았다. 강남 3대 누각 중 하나인 텅왕거는 간장(贛江)을 바라보고 있다. 당 태종 이세민의 동생으로 텅왕이라 불리던 이원영(李元嬰)이 서기 653년에 처음 만든 누각이다.


누각 입구로 들어서니 광장 바닥에 큰 원형의 태극과 팔괘 문양과 함께 웅장한 누각의 자태가 나타난다. 베이징 고궁 쳰칭먼(乾清門) 앞에 있는 사자 조각상처럼 두 마리의 암수 사자가 지키고 있다. 누각은 '명삼암칠(明三暗七)'의 건축양식을 따랐다. 외관으로 보면 3층 회랑(回廊)으로 쌓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7층 구조다.


누각 1층으로 들어서니 박물관이 있다. 송, 원, 명, 청나라 시대별로 누각의 발전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시대별로 다른 특성을 지닌 누각이겠지만 전문가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특별한 차이를 찾기 쉽지 않다. 벽에는 옛 글자체로 편액들이 걸려 있다. 황족들의 초상화들도 있고 갑옷과 같은 전투 복장들도 전시돼 있다.


6층으로 올라가니 한쪽에 공연무대가 있다. 도착하자마자 채 1분도 되지 않아 공연이 끝나 아쉽다.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편종과 만도린(피파), 양친을 연주했다. 텅왕이 이렇게 가무를 즐겼을 법한 연주와 무용이 끝나자마자 관광객들은 배우들과 사진 찍기에 바쁘다. 한 아가씨가 외국인 관광객의 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는다.


벽에는 당삼채로 제작된 벽화가 정말 멋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황색, 갈색, 녹색의 유약을 바탕으로 비교적 저온에서 구워낸 당삼채 도자기는 당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3가지 색깔의 유약으로 화려하고 유연한 동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 이곳 벽화는 당삼채로 만든 타일을 서로 연결해 만들었다.


좌우 벽면에 새겨진 거대한 벽화 중 용장(龍牆)은 남성 가무악대의 무용도이며 봉장(鳳牆)은 여성 가무악대가 등장한다. 용장은 적진을 돌파하는 파진악무(破陣樂舞)를 주제로 한다. 역동적이고 강직한 춤사위인 후등무(胡騰舞)와 자유롭고 활력이 넘치는 검기무(劍器舞), 중앙에는 사자의 기상이 느껴지는 오방사자무(五方獅子舞)가 그려져 있다.


봉장은 궁중 무용인 예당우의무(霓裳羽衣舞)를 주제로 한다. '예(霓)'는 무지개, '우(羽)'는 깃털이고 당(裳)은 치마, 의(衣)는 윗옷입니다. 전부 여성스럽게 천을 휘날리며 추는 2인 춤인 자지무(柘枝舞)와 치마가 둥글게 펼쳐지는 춤인 후선무(胡旋舞)가 그려져 있다.


텅왕거(왼쪽), 연못과 왕발 조각상(오른쪽 위), 텅왕거 벽화의 당삼채(오른쪽 아래)


누각 꼭대기에서 바라본 강은 정말 멋지다. 강 너머는 고층빌딩 숲이며 강에는 화물선이 떠다니고 있다. 모래를 싣고 가기도 하고 텅 빈 배가 정박해 있기도 하다. 반대편으로 돌아가니 시내 번화가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변도로도 잘 조성돼 있어서 시원해 보인다.


누각의 각 층마다 지붕이 차례로 보이는데 아래로 시선을 둘수록 서 있는 곳이 정말 높다는 것을 느낀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데 각 층마다 그림과 서예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대나무 죽간도 있고 산수화 벽화도 보인다.


밖으로 나오니 텅왕거 좌우로 2개의 정자가 보인다. 남쪽에 있는 정자를 야장(壓江)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정자를 이추이(挹翠)라 한다. 마치 양 날개를 단 모습인데 '하늘에 기대어 우뚝 솟은(倚天聳立)' 산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장자(莊子)>에 나오는 하늘을 날아가는 곤붕(鯤鵬)과 닮았다고도 한다.


정면에서 오른쪽 정자인 이추이팅을 지나니 작은 정원이 나온다. 둥근 원 모양의 문 틈 사이로 바라보니 배들이 떠다니고 건너편 높은 빌딩도 보인다.


인공 연못에 비친 정자가 살짝 흔들리는 물결에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한다. 연못에는 구곡풍우교(九曲風雨橋)라는 돌다리가 있어서 하나씩 건너면서 연꽃도 보고 수면에 비친 모습도 볼 수 있다.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은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의 조각상이 햇살에 빛나고 있다.


텅왕거를 나오면서 하늘에서 보면 산처럼 보인다는 이 웅장한 누각 속에 반짝거리는 당나라 시대 궁중무용 벽화가 자꾸 생각났다. 한편으로는 강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춤사위를 직접 볼 수 있다면 좋을 듯싶다.


4) 난창 南昌 주더와 저우언라이 혁명을 꿈꾸다


지도를 더듬어 시내를 걸어가며 난창봉기의 주역인 주더(朱德)의 집을 찾아간다. 시내호수인 둥후(東湖) 주변은 번화가다. 잔잔한 호수를 따라 배를 타는 사람, 낚시를 하는 사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활기차다. 정자에는 사람들이 호수를 바라보며 오후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호수를 따라 한참 걸어 화위엔쟈오제(花園角街)에서 혁명원로 주더 집 간판을 찾았다. 화위엔쟈오2호(花園角2號)가 주더 옛집 주소다. 이곳은 공산당이 주도한 바이치이(八一起義), 즉 난창봉기를 준비하던 아지트다. 그래서 고향 집이라는 뜻의 구쥐(故居)가 아니라 옛집이라는 쥬쥐(舊居)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이다. 바깥은 거의 6m는 될만한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이 있고 오른편으로 주더가 사용하던 침실이 보인다. 책상이 하나 놓여 있고 안쪽으로 침대가 있다.


주더는 쓰촨 성 북부의 이룽(儀隴) 출신으로 평생을 혁명가이며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신중국 수립 후 인민해방군 총사령(總司令)이 된다.


1927년 8월 1일 일어난 난창봉기는 제1차 국공합작의 느슨한 틀을 깨고 노동자와 농민이 주체가 되는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중국공산당의 신호탄이었다. 주더는 이를 주모하기 위해 이곳을 거점으로 일을 추진한다.


봉기가 있기 며칠 전 7월 27일 주더는 초조한 마음으로 중요한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 봉기를 함께 주도할 인물이었으니 바로 자신을 입당시킨 저우언라이(周恩來)다. 오랜 친구를 만나 기쁨을 만끽하며 주더는 난창의 군대상황과 봉기 계획을 보고했으며 저우언라이는 치밀한 계획에 기뻐했다고 한다.


2층 구조의 허름한 집이지만 천장은 비교적 높은 편이고 좁은 마당이 있는데 하늘을 향해 뚫려 있어 햇살이 잘 비친다. 거실에는 당시 저우언라이가 잠을 잤던 간이침대와 탁자, 옷걸이가 놓여 있다. 주더가 직접 요리를 했다는 야채도 있고 마작 패, 옷과 부채 등과 함께 봉기를 기념하는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난창봉기는 주더와 저우언라이의 합작품이다. 7월 31일 저녁 밀고자가 생긴 것을 발견한 주더는 저우언라이에게 즉각 보고하고 거사를 8월 1일 새벽 2시로 당긴다. 전투가 시작되자 일사 분란하게 적들을 무장해제하고 4시간여 만에 모든 작전을 끝냈다. 여명이 떠오를 즈음 3천여 명의 적군을 섬멸하고 5천여 종의 무기와 백만여 발의 총알, 수문의 대포를 노획하고 난창을 완전 점령한다.


바로 당일 오전 쑹칭링(宋慶齡), 저우언라이, 주더를 비롯 25명으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봉기선언문을 통과시킨다. 이것이 저우언라이와 주더의 이름이 처음으로 기재된 첫 번째 문서다.


주더의 침실(왼쪽 위), 난창봉기 전시실(왼쪽 아래), 거실 벽에 걸린 저우언라이 사진(오른쪽)


장제스(蔣介石) 군대가 난창으로 진주하자 혁명위원회와 군대는 차례로 철수한 뒤 군대를 지휘해 남하한다.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주력 군은 광둥성 해안가인 차오저우(潮州)와 산터우(汕頭)로 가고, 주더가 지휘하는 부대는 메이저우(梅州) 근처 싼허댐(三河壩)로 가면서 둘은 헤어지게 된다.


저우언라이 주력군은 장제스 군대와의 전투에서 대패한 후 뿔뿔이 흩어진다. 한편 주더가 이끄는 부대는 장시성과 광둥성 등지를 전전하다가 유격전으로 전술을 바꿔 이동한다. 7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판스셩(范石生) 부대에 의탁하기도 하는데 적군에 발각되자 후난으로 이동해 1928년 1월 다시 한 번 후난봉기를 거행한다.


다시 부대를 인솔하고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가게 된다. 드디어 닝강룽(甯岡礱) 시에 있는 원싱거(文星閣)에서 마오쩌둥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주더와 마오쩌둥의 합류(朱毛會師)'라고 한다. 주더 부대는 곧 홍사군(紅四軍)이 된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혁명을 모의하고 끝까지 군대를 인솔해 마오쩌둥과 합류한 것이다.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 그리고 주더 총사령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한 주더의 집을 보고 나오는데 중국사람이 아는 체를 합니다. 왜 한국사람이 이곳에 와서 관심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지 궁금해 했다. 주더를 아는 것도 이상하다는 눈치다. 담배까지 나눠 피며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계속 들었다. 같이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주더의 높은 담장 앞에서 지나가는 차와 사람들을 한동안 지켜본다. 혁명적 열정으로 빛나던 주더와 저우언라이, 좁은 공간이지만 직접 요리해 나눠먹으면서 의기투합한 마음은 혁명의 물결만큼은 바다보다 더 넓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