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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34회 후난 천년 숨결로 살아있는 서원과 마오쩌둥의 고향


 

후난(湖南)성은 둥팅후(洞庭湖) 남쪽에 위치하며 창장(長江)의 지류인 샹장(湘江)이 흐르고 있다. 후난 성 수도 창사(長沙)는 진시황이 시행한 군현제의 36개 군 중 하나다. 당시 창사 군의 샹현(湘縣)에 관공서가 있었으며 후난 성의 약칭을 샹()이라 하고 후난 요리를 샹차이(湘菜)라고 한다.

 

후난 성 서부지역은 투자족과 먀오족 소수민족자치주가 있으며 마오쩌둥, 류사오치, 펑더화이 등 신중국을 건국한 영웅들의 고향이다. 창사에는 천년학부라 불리는 중국 4대 서원 중 하나인 악록서원이 있다.

 

1)   창사 長沙 중국의 에버랜드라고 할만하군

 

창사 시내 동북쪽에는세계의 창이라는 놀이공원이 있다. 우리나라 에버랜드와도 비슷한데 세계 각국의 유명 건축물을 조성하고 전통문화와 민속품들을 전시하면서 놀이공원을 접목한 형태다. 홍콩 중뤼(中旅)그룹과 후난방송(湖南廣播電視)이 합작해 조성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알렉산드리아 등대가 멀리서도 보인다. 피라미드와 지구본이 있는 입구를 지나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수 많은 건축물들이 파란 하늘과 잘 조화를 이뤄 아주 멋져 보인다.

 

귀엽게 생긴 거대한 돼지를 지나 자그마한 산 능선으로 올라간다. 반대편 산에 백설공주성곽이 거대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청룡열차 같은 롤러코스트 궈산처(過山車)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 정점에서 갑자기 내려가기 시작하더니 한 바퀴 회전하고 살짝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여러 번 회전하며 오르내리는데 정말 아찔하다. 멀리서 바라봐도 섬찟하다.

 

공원길을 따라 가다 보니 커다란 포스터 하나가 낯익다. 바로 드라마 <풀하우스>의 주연배우인 비와 송혜교의 사진이 보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2007 2월에 후난TV에서 <낭만만우(浪漫滿屋>라는 제목으로 방영했는데 그때 기자회견을 하러 창사에 왔다고 한다.

 

후난TV <대장금>을 방영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드라마와 교양프로그램에서도 시청률이 꽤 높은 권위 있는 매체이다.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큰바위얼굴 조각상이 있다. 그 앞에는 4D우주영화관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조그만 모터 차를 타고 공원을 이동하는 사람도 많다.

 

재미있는 이름의 밍싱멍궁창(明星夢工廠)이 나타난다. ‘스타가 되고 싶은 꿈을 만들어주는 공장이라는 뜻인데 사람들이 꽤 몰려있어서 들어가보니 노래방 화면이 보이고 영상카메라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것을 영상CD로 만들어주는 서비스였다.

 

날씨가 더워 숨이 막힐 지경인데 넓은 호수가 나타나니 다소 숨을 돌릴 만 하다. 이곳에서는 청소년들을 위한 이벤트가 자주 열리고 한여름 내내 저녁마다 포쉐이제(潑水節)를 연다. 윈난(雲南) 시솽반나(西雙版納)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인 다이족() 전통 문화행사인데 바가지로 물을 서로 끼얹는 놀이이다. 지금은 아이들이 보트를 타고 놀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음양문(陰陽門)을 사이에 두고 엄청나게 큰 천수천안관음상이 보인다. 그 앞으로 옷을 발가벗은 꼬마아이가 걸어가고 있다. 로프에 매달려 화쒀(滑索)를 타고 호수 위를 날아오는 아이들도 있다. 정말 재미있어 보여 어디서 출발하는지 보러 가는데 우리나라 정자와 종도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종을 치면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언덕을 올라가니 로프를 몸에 묶고 산 아래로 쏜 살처럼 내려가고 있는 모습이 정말 시원해 보인다.

 

언덕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면 백설공주성곽 아래에 있는 아폴로비행선을 타려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육중한 무게의 비행선이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돌고 있는데 사람들이 아주 즐거워한다. 비행선 양 날개에 각각 4명씩 세 줄로 모두 24명이 한꺼번에 탈 수 있다. 몸이 거꾸로 뒤집어지고 좌우로도 움직이면서 돌아가고 온몸을 비틀며 오르내리기도 하니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공원 입구(왼쪽 위), 노래 CD 만드는 공장(왼쪽 아래), 궈산처(오른쪽 위), 아폴로비행선(오른쪽 아래)


후난을 대표하는 인물 100인이 벽화로 새겨져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많이 찍는다. 특히 마오쩌둥이 태어난 곳이라 더 의미가 깊다. 후난을 대표하는 명소로 중국의 4대 서원 중 하나인 악록서원 모형건물도 있다.

 

범퍼카인 펑펑처(碰碰)와 회전목마는 공짜인가 보다. 공짜라기 보다는 입장료에 포함된 것. 특히 회전목마는 문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런지 아이들이 많다.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알렉산드리아등대 맨 꼭대기에 왕관을 쓰고 창을 든 멋진 왕이 오른손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멋진 등대가 파란 하늘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으니 정말 세계 최초의 등대가 세계의 창에서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2)   창사 長沙 천년 숨결로 살아있는 예쁜 현판 글씨체

 

악록서원은 창사 시내를 흐르는 샹장 서쪽에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 후난대학 입구다. 악록서원은 후난대학 안에 있다. 마침 신입생들이 막 입학하는지 왁자지껄하다. 중국대학은 9월에 신학기가 시작되니 8월말이면 신입생들로 매우 바쁘다.

 

대학 입구에는악록서원(岳麓書院) 창건 1020후난대학 정명(定名) 70주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서원은 북송 시대인 서기 976년 설립됐고 그 후광을 이어받아 후난대학이 1926년이 건립됐다. 1997년에 조성된 기념 조형물이 후난대학 입구 광장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빨간색 천으로 현수막 하나가 걸려 있다. “천년학부는 전국 각지에서 온 신입생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千年學府熱烈歡迎來自全國各地的新同學)”라는 문구가 높이 걸린 것을 보니 정말 후난대학 신입생들은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천 년이나 지난 서원이 있는 곳, 후난대학은 '천년학부'라는 빛나는 이름을 자랑하고 있다. 신입생 모집학과들 중에서 악록서원이라는 곳이 있어서 물어봤더니 지금도 학생을 모집하고 수업도 하는 하나의 학과이다.

 

중국 4대 서원은 악록서원과 장시(江西) 루산(廬山)에 있는 백록동(白鹿洞)서원, 허난(河南) 등펑(登封)에 있는 숭양()서원, 그리고 허난 상츄(商丘)에 있는 응천(應天)서원이다.

 

후난대학 내에 있는 서원 입구로 찾아갔는데 千年學府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 계단 위로 혁희대(赫曦台)라는 곳이 있다. ‘혁희라는 말은아침 햇살이 떠오르다는 뜻이며 학자로서의 희망을 꿈 꾸는 학구적인 의지가 담긴 곳이다.

 

양 옆 벽에는 청나라 시대에 서원 원장이 쓴 글자가 있는데 ()’ 자와()’ 자가 나란히 새겨 있다. 한 아가씨가 몇 바퀴 돌더니 벽의 자를 만지고 있다. 아마도 정확하게 복자를 만지게 되면 복이라도 온다는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먼(大門)에 있는岳麓書院이라는 현판이 인상적이다. 976년 송 태조가 세운 서원을 송 진종시대인 1012년에 서원을 확장하면서 황제가 내린 액자가 그대로 이름으로 굳어졌다. 그 당시의 필체로 보여지는데 천 년에 걸맞게 금빛 찬란해 보인다.

 

다시 얼먼(二門)을 지나면 명산단석(名山壇席)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명산은 중국 5악 중 남악(南嶽)인 헝산(衡山) 끝자락이 바로 이곳이라는 의미다. 이곳 강당 중앙에 의자가 나란히 두 개 놓여 있다. 남송 시대 사상가이던 주희(朱熹)와 당시 서원 주교이던 장식(張栻)이 함께 강연을 하던 자리이다.

 

양쪽 벽에는 충(), (), (), () 4개의 글자가 각각 쓰여 있다. 주희가 친히 쓴 글자라고 하며 강당을 충효염절당(忠孝廉節堂)’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당 뒤편에는 도서관 기능을 지닌 위슈러우(禦書樓)가 있다. 왼편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바이췐쉔(百泉軒) 건물이 있다. 주변 나무와 하늘과 구름, 그리고 건물이 모두 연못 수면 속으로 들어와 있고 물 속을 휘젓고 다니는 물고기들과 어울려 한 폭의 신비한 산수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연못 주위를 한 바퀴 다 빙 둘러 봐도 보는 방향마다 다 그림이니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전설에 의하면 너무나 풍광이 아름다워 승려 2명이 3일 낮과 밤을 쉬지 않고 토론했다고 전해진다는 곳이다.

 

새파란 색감이 하늘인지 물살인지 살펴보려고 잠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악록서원의 학생들도 이곳에서 잡다한 생각을 지워냈을지 모른다. 아니면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시인이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사당 숭도사(왼쪽), 악록서원 입구(오른쪽 위), 연못과 바이췐쉔(오른쪽 가운데), 만세사표(오른쪽 아래)

 

유학자들을 모신 아담한 사당 몇 채가 있고 학자들의 글씨와 초상화 등이 전시돼 있다. 유학자들의 사당답게 이름이 어렵긴 하지만 현판의 한자들 글씨체가 너무 예쁘다. 일일이 유학자들을 살펴보기는 어려웠지만 나름대로 사당을 마련할 정도로 중국에서는 유명한 학자들로 존경 받고 있을 터라 하나씩 살펴봤다.

 

숭도사(崇道祠)는 주장사(朱張祠)라고도 불리는데 주희와 장식의 사당이다. 사당 안에는 두 사람의 전신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고 성리학을 집대성한 양대 산맥답게사문정맥(斯文正脈)’이라고 편액이 걸려 있다.

 

사문이란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로 문인이나 문화를 지칭한다. 따라서, ‘문화의 바른 맥을 잇는 학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학자의 정갈한 모습에서 대가의 풍모가 우러러 나온다.

 

육군자당(六君子堂)에는 주동(朱洞), 이윤칙(李允則), 주식(周式), 류공(劉珙), 진강(陳鋼), 양무원(楊茂元) 등 송나라 유학자들의 초상화와 업적들이 적혀 있다. 선산사(船山祠)는 명청시대 사상가인 왕부지(王夫之)의 사당이다.

 

염계사(濂溪祠)는 주돈이(周敦)의 사당으로 북송시대 사상가로 정호(程顥), 정이(), 장재(張載) 및 주희 다섯 사람과 함께공맹주정장주(孔孟周程張朱)’라는 유교 성리학의 정맥을 잇는 학자로 평가된다.

 

공자 사당인 문묘도 있다. 본당 중앙에는 당나라 시대 화가로서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견주어 화성(畫聖이라 불린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공자의 행교도()가 있다.

 

양손을 모아 가슴 부근까지 올리고 긴 수염과 두건을 쓰고 도포를 날리며 서 있는 모습이 정말 만세사표처럼 보이는데 청나라 강희제가 헌정했다는 만세사표(萬世師表)가 걸려 있기도 하다. 양쪽 옆에는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에 이르기까지 공자의 도를 이어온 현자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문 밖에는 공자의 행교상이 조각돼 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잠시 예를 표시하고 있다. 햇살 바른 곳에 서 있는 공자의 조각상을 지나 악록서원을 나왔다.

 

정말 온갖 한자와의 씨름이었던 것 같다. 예쁜 글자체들이라 기분이 좋아서인지 더위 속에서도 무사히 살펴본 듯하다. 천년 역사를 지니고 지금도 전통을 고스란히 남겨둔 것이 보기 좋았다. 천년학부라는 자부심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정말 부럽다.

 

3)   닝샹 寧鄕 온화한 중국공산당 이론가의 우여곡절 인생

 

창사에서 버스를 타고 신중국 국가주석을 역임한 류샤오치(劉少奇)의 고거를 찾아가는 길이다. 버스는 샹장을 건너 서남쪽 방향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화밍러우진(花明樓)까지 시골길을 달렸다.

 

국가주석까지 지낸 인물의 고거로 가는 길치고는 비포장도로가 꽤 많다. 도로 옆으로 사람들이 몰려 나와 물건을 사고파는 우리나라 5일장과 비슷한 시장도 있다. 농산물과 공산품이 다 쏟아져 나온 거리 시장이다.

 

류샤오치구리(故里)’ 패방 앞에 버스가 도착했다. 동상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공예품 파는 가게를 지나 조금 더 가면 호수가 하나 있고 옆에 농가가 몇 채 있다. 이곳이 바로 공산주의자이며 혁명가이고 신중국 국가주석을 역임한 류샤오치의 생가다. 여행 중에 유명인의 고거를 가면 인물에 대한 정보도 얻지만 당시 생활상이나 가옥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붉은 벽돌과 나무로 지어진 농가로 들어간다.

 

창문 앞에 있는 나무책상과 침실,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있다. 술을 만들어 마시던 방도 있고 책상 위에는 주판도 있다. 곡식을 찧던 도구도 있으며 맷돌도 있다. 바닥에 구멍을 파고 그 속에 화롯불을 두고 약을 달이는 기다란 기구가 설치돼 있는 카오훠우(火屋)는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했다.

 

1961년 고향에 온 류주석이 마을 촌민들에게 강의를 했다는 방에 의자와 칠판이 그대로 놓여있다. 어머니 방에는 물레도 있고 농기구들도 놓여 있다. 붉은 벽돌과 나무로 지어진 농가가 몇 채 남아 있어 마을민속촌으로 꾸며놓았다. 농기구도 있고 우물도 있다.



류사오치 고향(왼쪽 위), 옛집 책상(왼쪽 가운데), 농기구들(왼쪽 아래), 카오훠우(오른쪽)

 

근처에 류사오치 기념관이 있다. 그림으로 이어진 일대기를 읽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사와 현대사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류샤오치는 1898년에 태어나 혁명가의 길을 걸었고 마오쩌둥 노선을 따라 창정(長征)에 참가했다. 1959년 마오쩌둥에 이어 국가 주석의 자리에 오르지만 문화혁명으로 인해 실각하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969년에 사망한다.

 

지난 하이난다오 편에 나온 세페이(謝飛)는 그의 3번째 부인이다. 신기하게도 그는 6번 결혼했는데 대부분 혁명의 와중에 옥사하거나 병사했고 정치적 박해로 강제이혼을 당하기도 한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고된 혁명과 불행한 결혼이 이어지는 와중에 심한 위장병을 앓고 체중이 급속하게 주는 등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을 때 왕광메이(王光美) 6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원자물리학 분야 최초의 여성석사이며 1948년 혁명에 투신하자마자 류사오치와 결혼한다.

 

둘은 20년 동안 비교적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했으며 류사오치의 사망 후에도 그녀는 사회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었다. 특히, '가난한 어머니'들을 지원하는 행복공정(幸福工程)을 주창했으며 온 국민의 애도 속에 2006 85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신중국 후 국가주석으로서 활동하던 때 사진들도 많다. 특히, 1963년 북한 김일성 주석의 방중 당시 함께 찍은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김일성(金日成)’의 영문 설명으로 ‘Kim Re-cheng‘이라고 적혀 있다. ‘ ‘Jin’이라고 해야 맞다. ‘Kim’이라고 썼더라면 ‘Il-sung’으로 해야 하고 게다가 의 병음은 ‘Ri’이지 ‘Re’가 아니다. 멋대로 누군가 썼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태어난 곳과 아주 가까운 동네에서 태어난 혁명동지였고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국가주석 자리에 오른 당내 조직이론가인 류사오치를 만나봤다. 마음씨 좋은 인상의 류주석은 문화대혁명의 역풍으로 실각했는데 중국 현대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임에 틀림없다.

 

4)   사오산 韶山 마오쩌둥이 3번이나 결혼한 까닭은?

 

마오쩌둥 고향인 사오산으로 향했다.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마오쩌둥은 농민봉기와 창정을 통해 지도자로 부상했고 일본제국주의가 물러난 후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해 신중국을 세웠다.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과도한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정치지도자로서의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는 인물이다. 문화대혁명은 끝이 났지만 우상이던 마오쩌둥은 지금도 캐릭터상품뿐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친근하게 다가갈 정도로 인간적인 품성을 지닌 것 같지 않다. 어쩌면 공산주의 혁명 자체나 당 중앙에 대한 신뢰를 영원히 믿고 싶어하는 요인이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남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마오쩌둥은 중국을 이해하는 복잡한 코드이기도 하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으로 들어갔더니 사람들로 복잡하다. 후난 요리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마오쩌둥이 즐겨 먹었다고 하는 홍샤오러우(紅燒肉) 맛을 볼 수 있었다. 홍샤오러우는 비계가 두툼한 돼지고기를 깍두기처럼 두텁게 썰어 삶고 볶은 후 향료를 넣어 만든다. 향기도 좋지만 약간 단맛도 일품이다. 샹차이는 독특한 향이 나는 샹차이(香菜)와 발음과 성조가 같아서 잘못 들으면 오해할 수 있지만 후난 요리라는 뜻이다.

 

맛 있는 점심을 먹고 마오쩌둥이 청년시절 즐겨 찾던 산봉우리인 샤오펑(韶峰)을 올랐다. 청년시절에 썼다는 시구들을 바위에 새겨놓은 비림에는 하얀 대리석에 깃발을 들고 진군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농민과 군인들과 함께 조각상으로 서 있는 마오쩌둥을 만나게 됐다.

 

케이블유람차인 란처(纜車)를 타고 산을 오르면 관음각(觀音閣)이 있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정상에는 샤오펑쓰(韶峰寺)라는 사원이 있다. 고대시대에 봉화대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주위가 한눈에 다 드러나는 봉우리다.

 

사원 주위에는 향과 종이가 계속 타고 있다. 종이 울려서 사원 뒤로 가보니 길에서 주웠을 것 같은 나무로 종을 치고 있는 아이가 있다. 아무나 와서 종을 치고 가도 되는가 보다.

 

산 봉우리를 내려와 마오쩌둥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갔다. 동상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화환을 바치는 행사를 하고 묵념을 올리기도 한다.



마오쩌둥(왼쪽), 홍샤오러우(오른쪽 위), 샤오펑 케이블카(오른쪽 가운데), 마오쩌둥 고거(오른쪽 아래)

 

앞에서 류사오치의 불행한 결혼에 대해 언급했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마오쩌둥은 굉장히 정략적인 결혼에 능했던 사람이다. 모두 3번 결혼을 했는데 그 과정이 대체로 정치적이었다.

 

베이징에서 은사이던 양창지(楊昌濟)의 소개로 리다자오(李大釗)를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게 되는데 이 시기 마음에 두었던 은사의 딸 양카이후이(楊開慧)1920년 결혼을 하고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조직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농민폭동의 실패로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간 1927년 장시 융신(永新)한 떨기 꽃(一枝花)’이라 불리던 17세의 허즈전(賀子珍)과 동거를 시작한다. 양카이후이가 징강산으로 들어오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던 마오쩌둥은 당이 둘 사이의 이혼을 불허하자 당시 후난군벌이던 허젠(何建)의 손을 빌어 차도살인(借刀殺人)지계를 사용한다.

 

양카이후이의 사형 직후 당은 마오쩌둥과 허즈전의 결혼을 허가한다. 양창지의 제자이고 마오쩌둥과 동문수학한 샤오즈셩(蕭子升) <마오쩌둥과 함께 구걸하다(和毛澤東一起行乞記)>라는 책에서 이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가장 사랑했다고 전해지는 허즈전은 1937년 돌연 옌안(延安)을 떠나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후 1948년에 이르러야 귀국한다. 그것은 당시 옌안에 있던 미국기자 스메들리의 통역을 담당하던 우리리(吳莉莉)와의 연분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예뻤다는 양귀비에 필적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던 우리리를 마음에 두고 있다가 허즈전에게 들통난 것이다. 이후 마오쩌둥의 반대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소련으로 떠났고 둘 사이는 파경을 맞게 됐으며 죽을 때까지 마오쩌둥과 만나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은 허즈전이 떠난 이듬해인 1938, 막 옌안에 온 24살의 리윈허(李雲鶴) , 장칭()과 결혼한다. 신중국 건립 후 문화대혁명의 4인방 중 한 명으로 천하를 주무르지만 1977년 출당조치를 당하고 사형 판결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1991년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는 인물이다.

 

사실 마오쩌둥은 공식적으로 3번 결혼했지만 원래 고향에서 부모들이 맺어준 라씨(羅氏)라는 본처가 있다. 실제로 같이 생활한 적이 없어서 부부 사이가 아니었다. 마오쩌둥 고거에는 라씨에 대한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인들의 영원한 지도자로 남아있는 마오쩌둥 고거에는 1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촬영이 금지되고 공안(公安)이 감시하지만 대신에 관람은 공짜다. 집 내부는 평범한 농가의 모습 그대로 별로 특별할 것은 없다. 사람들은 연꽃이 무성한 작은 호수를 사이에 두고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하루 종일 중국 공산당 혁명사를 읽은 느낌이다. 혁명사가 너무 지루해 국가주석의 사생활에 더 솔깃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