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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29] 따렌 아침 바닷가와 단둥 압록강변의 밤

5월23일 오전 9시까지 비 오는 따롄(大连) 하늘을 바라보며 사람 한 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오지 않았다. 지난 밤 술친구를 사귀게 됐는데, 오늘 자기 자가용으로 따롄 바닷가를 드라이브 시켜주겠다고 했기에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저녁 무렵 도착한 민박집. 이미 술판이 벌어진 거실에 저녁 먹으라는 이야기에 무심코 앉았다가 맥주를 받아 마시게 됐고 중국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그 중 한 명, 따롄이 고향이라 소개한 선사회사 사장인데, 나이도 5살 가량 연배인데다가 성품도 지긋해 친해졌다.

그런데, 특별히 업무가 바쁘지 않으면 오겠다던 사람이 연락이 없다. 아마 비가 내리니 설마 쉬겠지 했나 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민주광창(民主广场) 앞에서 203루(路) 협궤열차를 탔다.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작은 한 칸 기차인데 요긴하게 교통수단으로 여전히 운행하고 있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목적지인 똥하이꽁위안(东海公园)까지 1위안이다. 아주머니 운전사는 능수능란하게 운전하며 출발하고 정차할 때마다 바삐 움직인다.

  
203번 열차 종점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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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 분위기도 소담한 시골 기차역 모습 그대로다. 아무런 장식도 그 어떤 건물도 없이 그저 철길만이 승객을 기다리는 그런 모양새이다. 따롄에 가게 되면 이 기차를 한번 타보길, 즐거울 것이다. 느릿느릿한 기차야말로 정서적으로 포근하다.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비가 약간씩 굵어지기 시작한다. 공원 정문 앞에서 표를 사며 약간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는 어렵다. 바람도 세차게 불기 시작한다. 기온이 점점 떨어지는 게 온몸이 싸늘해질 정도다.

똥하이꽁위안만 거리가 7km나 되는데 따롄 남쪽 해안도로를 따라 조성된 많은 아름다운 공원들을 다 보려면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할 듯하다. 산뜻한 공원 모습이다. 아침 산보를 나온 외국인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낚시하는 사람 동상과 목마 탄 아이와 부모 동상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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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나온 아이들과 선생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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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로 나가니 파도도 거세게 몰아친다. 태풍이 부는 바닷가와 비슷하다. 공원 곳곳에는 기분이 상쾌해지는 동상들이 많이 서 있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의 모습이나 선생님을 따라 나선 아이들의 발랄한 모습, 휴지를 줍는 아이, 신발끈을 메주는 어머니, 낚시하는 사람 등.

  
신발 끈 메는 어머니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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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화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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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등산화 역시 절묘하게 서 있고 장기를 두는 노인은 선하기 그지없다. 꽃들과 어울린 풍차도 있고 절벽을 오르는 등산객도 있으며 해학적인 남녀가 나체로 서 있기도 하다. 아주 야하게 몸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이곳 자연의 분위기 속에 묻혀 있으니 전혀 이상하지 않다. 커다란 배도 있고 트럼프를 가지고 노는 아이도 있다.

  
장기 두는 노인 동상과 암벽 등반 동상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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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원에는 돌고래들도 있다. 사람들이 드무니 한쪽에서 안전무방비 상태로 잠을 자는 녀석도 있고, 물살을 유유히 헤치며 노는 녀석도 있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그렇지 벤치에 앉아 한참 쉬면서 바닷소리, 파도소리 그리고 자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며 쉬어가도 좋을 그런 기분 좋은 공원이다.

비를 맞으며 조금 더 걸었다. 해변 모래사장에 큰 거북이 동상이 나타났다. 조금 전에 작고 귀여운 동상들을 보다가 해변을 다 차지할 듯한 거북이를 만나니 깜짝 놀랄 만하다. 모래 속에 턱 자리를 잡고 바다를 향해 있는 거북이. 그 위로 사람들이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그런다. 거북이 등을 타는 셈이다.

  
해변 모래사장의 거북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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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가 점점 거세진다. 비옷도 없고 우산도 없다. 공원차량이 보여서 얼른 탔다. 후문인 난먼(南门)까지 간다니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보다 멀다. 10여분을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넘었다. 난먼에 내리니 간혹 자가용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택시도 없고 게다가 버스는 아예 없는 듯하다.

지도를 살펴, 바닷가 해안도로가 아닌 시내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다행히 비가 약간 그칠 태세다. 푸른 잔디와 나무, 새소리가 지저귀니 이대로 시내까지 산책을 해도 좋을 듯하다. 마침 택시가 왔다. 민주광창으로 가자. 숙소로.

지금은 중국 상무부장으로 대외 통상업무를 총괄하는 지위에 오른 뽀시라이(薄熙來)가 따롄 시장과 랴오닝 성장이던 시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뽀시라이는 산서(山西) 성 출신으로 베이징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이면서, 중국 공산혁명1세대로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했으며 올해(2007년) 1월 별세한 공산당 원로 뽀이뽀(薄一波)의 아들로 태자당 회원이기도 하다. 중국 내 대표적인 지한파로 소개되고 있으며 중국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대체로 평판도 좋을 뿐 아니라 잘 생긴 외모에 젠틀한 인상으로 차기 후계 구도의 한 축이라고 평가한다.

산길도로를 넘어가는 드라이브는 일품이다. 뽀시라이 시절 '동북의 홍콩'을 비전으로 발전시킨 따롄이라 꽤 정돈된 도시의 모습답다. 우리나라 강릉과도 유사한 분위기라 비교하곤 하는데, 솔직히 홍콩이나 강릉보다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든다. 적어도 해안을 따라 조성된 공원과 도로의 분위기는 그렇다.

산길을 넘어가다가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 기사에게 기차역 앞 터미널로 가자고 했다. 아주 흔쾌히 알았다며 방향을 바꾸는 기사. 참 좋다. 베이징에서 2년 가까이 산 경험으로 비추어 이렇게 손님을 배려하고 최선을 다해 목적지까지 안전 운행하면서도 말씨도 다정다감한 사람은 베이징에서는 만나본 적이 없다. 따롄에서 만난 기사 한 명으로 전체를 비교하긴 어렵지만 말이다. 친황따오에서 기사에게 당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더욱 고마운 마음이 든 것인지도 모른다.

  
대련 시내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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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에서 딴둥으로 가는 버스를 예매했다. 2시 40분까지 다시 오면 된다. 숙소에 가서 점심 먹고 짐 챙겨서 나올 충분한 시간이 된다. 좀 여유가 있기도 해서 은행에서 현금도 찾았다. 그리고 시내 거리를 조금 걸었다. 원래 비 때문이 아니었다면 하루 더 묵으면서 2000년에 왔을 때 먹었던 맛있는 양고기꼬치 파는 거리와 샹그릴라 호텔 앞 광장도 보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하는 마음을 조금 달래기 위해서. 역시 따롄 거리는 깔끔함이 묻어있다. 옛 건물들도 남아있기는 하지만, 번창하는 도시답게 고층건물들 숲이라 할만하다.

따롄에서 딴둥까지는 4시간 조금 더 걸린다. 여전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차창에 흩뿌리는 것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버스에서 잠을 금방 자고 정확히 깨는 것은 발품 취재하며 생긴 습관이니 나쁘지 않다.

딴둥에서 내려 숙소를 찾아가는 길은 우리말 간판, 정확히 조선족 동포들의 어감이 실린 간판들이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그렇다. 압록강 강변 길을 달리니 살짝 기분이 들뜬다. 민박집에 도착해 짐을 풀고 창문을 여니 압록강이 훤히 보이고 더 너머 북한땅도 보인다. 비록 공사중인 고층건물이 시야를 약간 가리긴 하지만 그런대로 기분이 좋은 전망이다.

  
공사중인 건물 사이로 비친 북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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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어둠이 내렸지만 얼른 바깥세상이 궁금했다. 강변은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오른쪽으로는 어둠 속에 숨어버린 북한의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이지만 왼쪽 거리는 그야말로 번화한 거리다. 식당들이 늘어선 거리에는 북한 식당도 보이고 식당 앞에는 이미 배부른 아이들이 재잘거리기도 한다.

  
압록강 강변의 밤거리와 멀리 보이는 조명 끊어진 단교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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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철교가 끊어진 돤챠오(断桥) 앞까지 걸었다. 밤 풍경이 아름다운 딴둥 압록강변. 사람들이 하나 둘 줄어들기 시작한다. 북한상품 가게에 들러 북한담배와 우표세트를 샀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려는데 갑자기 주인아주머니가 나타나서는 집에 아무도 없으니 30분 정도 기다렸으면 한다.

생음악이 나온다는 바로 들어가 진토닉 한잔에 강변에서의 상쾌한 기분을 연장했다. 노래를 부르는 아가씨가 조용히 전자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니 분위기도 정말 적성에 맞는다.

2001년부터 중국노래를 아주 좋아해 한 때는 2000여 곡을 다운 받아 듣고, 가사를 다 병음으로 바꿔 중국 전문포털에 올리기도 했다. 가사에 병음을 달면서 중국어와 친숙해졌고 노래를 들으며 중국대중음악의 다양한 장르적 정서를 나름대로 느껴보기도 했다. 최근에도 중국 최신 노래들을 MP3 플레이어에 담아 늘 듣곤 한다. 그렇게 중국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개인적 취향만은 아니다. 중국문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수단이며 중국 젊은이들의 정서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생음악은 늘 좋다. 가볍게 술 한 잔하며 중국대중가요를 들을만한 곳은 중국 어느 도시나 많다. 딴둥에서 그것도 압록강 강변에서 한 30분 즐기니 혼자 즐기는 취재여행만큼 좋은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외로운 여행길에 이런 오아시스가 꼭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숙소에 돌아가니 아직 주인아주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한 10분 기다리는데 역시 밤이라 쌀쌀하기도 하지만 약간 무섭다. 인적이 드물다는 것은 낯선 곳에서는 늘 오싹한 느낌을 받는다. 민박집 앞에서 기다려보기는 또 처음이네.혼자 블로그를 챙기고 있는데 다른 분들이 소주 한 잔 하자고 한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거실 유리 밖으로 새까만 배경만이 시간을 재촉하지만 그래도 딴둥의 첫날밤은 즐겁기 그지없다. 내일 날이 밝으면 또 바삐 움직여 북한 땅을 봐야지 하는 마음을 감춘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