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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64] 하이난다오 원창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도록 해준 션전(深圳) 민박집을 떠났다. 알토란 같은 반찬을 넣은 주먹밥 두 덩이를 챙겨준 것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였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그저 한끼건만 정성을 함께 보내는 마음이야 동포가 아니라면 서로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리라.


8월 19일 아침, 션전 기차역 앞에 버스터미널로 갔다. 광둥성(广东省) 중산(中山)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바로 하이난다오(海南岛)로 가야 할 듯하다. 사촌동생들과 만나기로 한 것도 있지만, 하이난다오에서 이틀 정도 더 머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버스터미널에 하이난다오로 가는 버스가 없다. 다시 푸톈(福田) 터미널로 급히 옮겼다. 서둘러야 한다. 벌써 10시가 넘었으니 너무 늦으면 도착해서 숙소 구하기가 아무래도 번거롭다. 10시 50분 버스다. 버스를 타니 바이샤(白沙)가 종점이다. 하이커우(海口)로 가는지 다시 물었더니 걱정 말라고 한다. 지도를 찾으니 하이난다오 섬 중간에 바이샤라는 현이 보였다.


벌써 4개월 넘게 다녔지만 정말 이렇게 낯선 느낌은 처음이다. 침대버스를 타고 션전을 벗어나 줄곧 남방 해안을 달린다. 2층 침대에 누워 꼼작 하지 못하고 책도 보고 지도도 찾아보고 음악도 듣고 그러다가 졸리면 자고. 저녁 무렵 한 어딘지도 모를 한 낯선 곳에 버스가 정차한다. 저녁 식사비가 포함된 버스라더니 티켓 한 장을 준다.


더운 날씨에 복잡한 식당으로 들어서 밥 한 공기에 반찬 2개, 국 하나를 받았다. 어느 정도라면 그 어떤 밥도 다 먹는 여행자 입장인데도 도저히 밥을 다 먹기 힘들 정도로 불결하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민박집에서 챙겨준 주먹밥을 하나씩 먹지 않았더라면 정말 배고플 뻔 했다.


  
션전에서 17시간 걸려서 하이커우에 도착
ⓒ 최종명
하이커우


밤 10시가 넘자 광둥성 서남부 도시인 잔장(湛江) 부근에서 갑자기 버스가 정차하길래 내렸더니 차 바퀴를 교체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떠날 생각을 하지 않길래 봤더니 앞 바퀴와 뒤 바퀴 모두 6개를 다 교체한다는 것이다. 1시간 30분 동안 하릴없이 기다렸다.


다시 버스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하이안(海安) 항구에 도착했다. 하이안과 하이커우 사이는 바다라서 배에 버스를 싣게 된다. 배 속에 버스가 서자 이번에는 배에 차량이 다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1시간을 더 기다린 끝에 배가 출발했다. 정말 배 위에서 버스가 굴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무려 17시간 걸려 하이커우(海口) 항구에 도착했다. 새벽 4시가 넘었다. 겨우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몇 시간 머물 생각으로 여행책자에서 찾은 PC방으로 갔다. 그런데, 없어진 지 오래라고 한다. 새벽 거리에는 술 취한 사람들이 많다. 정확하게는 좀 겁이 났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새벽을 헤매는 일은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다. 호텔들을 찾았는데 다 싸구려밖에 안 보인다. 어렵게 호텔을 하나 찾아 여권을 내밀었더니 외국인 숙박 허용이 안 된다고 다른 곳으로 가보란다. 사실 우리나라 여인숙 수준이니 그럴 만도 하다.


옆 호텔로 가서 사정을 했다. 마침 주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으니 가능했다. 5시간 정도만 자고 가니 상관 없지 않냐고 했더니 숙박부에 기록도 하지 않고 열쇠를 내준다. 너무 피곤하면 잠이 잘 오지 않는 법. 오랫동안 버스를 탄 것보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많이 발생하다 보니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일 듯하다.


겨우 몇 시간 잠을 잤다. 12시 전에 나가야 하는 부담 때문인지 대충 씻고 짐을 챙겨 나왔다. 다시 버스를 타고 2시간 거리의 원창(文昌)으로 갔다.


  
원창 동쟈오 해변을 오가는 배 위에서
ⓒ 최종명
원창

원창은 중국 근대화 시대의 유명한 송씨 자매의 아버지인 쏭쟈슈(宋嘉树)의 고향이다. 쏭쟈슈의 원래 성은 한(韩)씨였는데, 어린 시절 외가의 성으로 바꾸고 보스톤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기독교에 심취하고 민족의식을 갖추게 됐으며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저장(浙江)성 쑤저우(苏州)와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고 사업을 하게 된다. 그는 저장성 갑부로서 이후 쑨원(孙文)의 삼민주의를 지지하고 후원하기도 한다.


그는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아버지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 딸들이 중화민국과 신중국 건립에 깊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1997년도 제작된 짱만위(张曼玉) 주연의 영화 <쏭자왕차오(宋家王朝)>를 통해서도 알려지기도 했다.


쏭아이링(宋霭龄, 1890~1973)은 첫째 딸로서, 재정관료이며 중국은행 총재를 지냈으며 장제스(蒋介石) 국민당정부의 재정을 책임진 자본가이며 공자의 75대손인 꽁썅씨(孔祥熙)와 결혼했다. 원래 쑨원의 비서였고 결혼 후 여동생 쏭칭링을 비서로 추천했다.


쏭칭링은 겨우 스물을 넘긴 나이에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의 유부남이기도 했던 중국의 민족지도자, 삼민주의 사상가, 정치가이면서 혁명가인 쑨원과 결혼했으며 그의 비서이자 동지이기도 했다. 쑨원 사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사회주의자로서의 행로를 걸으며 신중국 정부의 부주석에 오르기도 했다.


  
원창에서 동쟈오 해변으로 가는 배
ⓒ 최종명
원창


쏭즈원(宋子文, 1894~1971)은 미국 하버드에서 공부했으며 초기에 쑨원의 영문 담당 비서였다가 쟝제스 주도의 국민당 정부의 재정담당 관료와 중앙은행 총재로 활약했다. 쟝제스에 이어 중국공산당의 두 번째 전범자 리스트에 올랐으며 장제스의 국민당 당적 삭제 리스트에도 꽁샹씨에 이어 두 번째로 오르는 중국 현대사의 '아이러니'의 주인공이다.


쏭메이링(宋美龄, 1897~2003)은 당시 유부남이며 국민당 정부를 이끌던 장제스와 결혼했다. 그녀 역시 장제스의 수행비서로 활동했으며, 서안사변으로 사로잡힌 장제스를 구하러 가서 저우언라이(周恩来)와 담판을 하기도 했다. 무려 106세까지 장수해 그 비결이 회자되기도 했다.


남동생 쏭즈량(宋子良, 1899~1987)은 미국에서 공부한 후 중국국화은행과 건설은행 총경리를 거쳤으며 은행자금을 투자해 건설, 철도, 전기, 탄광 등 기간 산업을 육성했다.


  
원창 동쟈오 해변 가는 길의 어촌 모습
ⓒ 최종명
원창


남동생 쏭즈안(宋子安, 1906~1969)은 1928년 미국 하버드를 졸업한 후 중국건설은행에서 근무했으며 1949년에는 홍콩광주은행 주석이 되기도 했다. 쏭칭링이 특히 아꼈다고 전한다.


당대의 갑부였으며 쑨원 지지자이던 쏭자슈는 자식들에게 '천하를 먼저 생각하라'고 교육했으며 3남3녀에게 남녀 평등을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자식 교육에 대해서는 곧잘 토론주제가 되기도 한다. 20세기 중국 현대사에서 쏭씨 집안의 세 자매는 중국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과 모두 결혼했고, 세 형제는 모두 경제통이며 은행가로 활동했다.


  
원창 동쟈오 해변의 정취
ⓒ 최종명
하이난다오


쏭칭링을 제외하고는 모두 쟝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밀착돼 있기도 했다. 쏭칭링은 쑨원의 사상이 진화하고 발전해 가는 것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 그가 사망할 시점에 이르러 친러시아, 공산당과의 협력을 도모했다. 그의 유언을 받들어 쏭칭링은 러시아와 끊임 없이 관계 모색을 시도했고, 마오쩌둥 노선과 긴밀하게 협력했으며 중국의 소위 신중국에서도 인정받기에 이른다. 결국, 장제스와 결혼한 여동생 쏭메이링과는 평생 죽을 때까지 서로 얼굴도 보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쑨원이 일찍 사망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최후의 전쟁에서 쏭칭링이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선언을 한 것은 우연일까.


다시 버스를 타고 예린(椰林) 마터우(码头)까지 배로 이동한 후 다시 동쟈오(东郊) 해변을 찾았다. 동쟈오는 야자수나무가 잘 뻗은 해변이다. 정말 낙원이 따로 없다. 아열대 해변은 정말 포근하다.


  
원창 동쟈오 해변의 야자수가 있는 신선들의 경치가 있다는 뜻의 예린쎈징 별장마을촌
ⓒ 최종명
원창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고 금빛 모래가 보드랍게 깔린 해변에 앉았다. 나무 의자가 곳곳에 있어 한잠 푹 자도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잠이 부족했으니 안성맞춤이다. 누워서 야자수열매를 바라보니 좀 색깔이 이상했다. 가만 보니 그 빛깔이 연두색이 아니라 거의 노란 금빛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진예즈(金椰子)라고 불리는 야자수열매다. 이곳의 풍부한 수분으로 인해 늘 축축하게 1년 내내 적셔주고 있기에 생긴 빛깔이라니 참 독특하다.


  
금빛이 감도는 야자수 열매
ⓒ 최종명
야자수

예린쎈징(椰林仙境)이라는 별장 마을이 참 예쁘게 꾸며져 있다. 이곳에서 며칠 푹 쉬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해변 가게에서 컵라면을 시켰다. 밥 대신에 만터우(馒头)를 6개 샀다. 우리가 발음대로 만두라고 하면 중국에서는 쟈오즈(饺子)이다.


만터우는 안에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고 그저 밀가루만으로 만든 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밋밋하다. 컵라면의 짠 맛을 달래면서 밥 대신 먹기에 나쁘지 않다.


밥도 먹었으니 아쉽지만 다시 이 골짜기 해변을 벗어나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얀 조각상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흥분된다. 이 첩첩 해변에 세 자매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라면 쏭씨 자매들일 것이다. 이 조각상의 이름은 예샹황허우(椰乡皇后)라 한다.


‘야자수의 고향이 배출한 황후’라니 역시 드라마다. 황후라 하면 황제의 부인이니 가운데 서 있는 황후는 쏭칭링. 그녀는 공화정의 수반이던 쑨원의 부인이었고, 왼편에 있는 쏭메이링은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의 부인. 또 한 명은 바로 신중국의 국가주석을 역임한 류샤오치(刘少奇)의 부인인 씨에페이(谢飞)였다. 정말 황조 시대의 컨셉으로 보면 황후를 배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이 중국의 남방 너머 아열대 외딴 섬 중에서도 동쪽 변방 마을 출신이니 ‘국모의 고향(国母之乡)’이라 부를 만하다.


  
하이난다오 원창의 동쟈오 해변에 있는 황후를 배출한 고향이라는 뜻의 예샹황허우 조각상
ⓒ 최종명
하이난다오


어부의 딸 씨에페이는 류샤오치의 세 번째 부인으로 노련(干练)하면서도 성격이 시원시원(爽快)하고 직설적이라 한다. 1932년 류샤오치를 처음 만났고 장정(长征) 도중에도 몇 번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 씨에페이는 류사오치의 차분하고 세심한 성향에 오히려 별로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두 사람 사이에 자주 업무를 가지고 논의를 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게 됐는데 류사오치가 먼저 그녀의 빠른 말투와 솔직 담백한 성향에 호감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저우언라이(周恩来)의 부인인 덩잉차오(邓颖超)가 그들의 혼인을 주선했다고 전한다. 하여간 이렇게 그녀 역시 ‘황후’가 된 것이다.


  
원창 동쟈오 배 위에서 만난 꼬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한국 전통문양의 책갈피
ⓒ 최종명
원창

버스를 타고 마터우 앞에서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배에 버스를 실어야 하니까 차들이 일렬로 주차하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꼬마아이들이 아는 체를 한다.


수줍어하기도 하는데 너무 귀여워서 아직 남아 있던 선물인 책갈피를 하나 줬다. 한국의 전통문양이라고 소개하니 아이도 고마워하고 엄마 아빠도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더니, 자기 차를 타고 원창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어서 잠시 고민했는데 이미 버스요금을 냈다고 사양했다. 트럭 뒤에 타고 가기에는 날씨가 아주 덥다.


원창에서 다시 츙하이(琼海)로 가서 하루를 묵을 생각이다. 버스를 타고 2시간 가까이 가니 츙하이 시내로 접어든다. 문득 PC방이 보여 내려달라고 했다.


4거리에 보이는 한 호텔에 들어가서 방을 잡았다. 여권을 보더니 한국사람이라고 꽤 반가워 한다. 그래서, 무심코 이곳 호텔에 온 최초의 한국사람이 아니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한다. 1달 전에 한국 사람 몇 명이 이곳에서 묵었다고 한다.


6개월을 방방곡곡 여행하면서 도저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올 곳이 아니라 생각해서 물어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야자수 나무가 바다의 정취를 더욱 이국적으로 만드는 땅에서 온종일 '황후의 고향'을 생각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