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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24] 톈진

베이징에서 배낭여행답지 않은 며칠을 보냈더니 어깨가 한결 가볍다. 영상 6mm 테이프 10개를 후배 승기에게 맡겼다. 한 달에 한 번 서울로 들어가니 위험한(?) 중국보다 안전한 한국(?)에 두는 게 나으니 잘 된 셈이다.

5월 17일, 아침 먹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짧게 깎았다. 수염이 점점 자라 턱수염이 머리카락보다 더 길면 어쩌나 생각하면서.

▲ 베이징->톈진 D539 열차, 5월 17일 12:20 출발, 3호차 71호 좌석, 42위엔 이등칸
ⓒ 최종명

12시 20분 D열차. 중국 기차는 열차의 속도나 수준에 따라 그 이니셜이 다소 다르다. 이니셜이 없는 4자리 숫자부터 Z, T, K, N, L 등 다양하다. D 이니셜은 2007년에 새로 생긴 열차로 거의 고속철도 수준으로 달린다. 그러면서 전반적으로 각 열차의 속도를 상향 조정했다고 한다.

베이징 역에서 출발, 기차 여행

▲ 베이징 역 대합실
ⓒ 최종명


베이징에서 톈진까지 69분 딱 걸렸다. 예전보다 10분 이상 빨라졌다. 역 도착 10분 전에 중국인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예전에 어학연수하면서 알게 된 네이멍구(内蒙古) 출신의 한족인데 톈진차이징따쉬에(天津财经大学)에서 경영학 석사를 밟고 있다. 베이징 역으로 가면서 전화를 했었는데 꽌지(关机)돼 있더니만 메시지를 보고 연락을 한 것이다.

'따거니짜이날?(大哥你在哪儿)'(형 어디야?)
'스푼중허우져우따오톈진러바(十分钟后就到天津了吧)'(10분 후면 천진 도착이야!)

톈진 도착이라니 왕쟈웨이(王嘉伟)는 너무 반가워하며 숙소 어디냐, 며칠 있을 거냐, 뭐 하러 오냐, 질문이 많다. 일단 숙소 정하고 전화하기로 했다.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걷는데 갑자기 맑던 하늘에 천둥번개와 폭우가 쏟아진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순식간에 역 앞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다시 맑게 개니 이것도 인공비인가.

미리 예약한 민박집 위치를 확인하는데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일단 택시를 타고 전화를 바꿔줬다. 이게 약간 상황 판단 착오였을까. 외지인들에게 각박하기로 유명한 톈진 택시운전사인 것을 깜박한 것이다. 아마도 여자운전사라 안심이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분명 20위엔이면 도착한다더니 37위엔이나 나온 것이다. 중간에 언제 도착하는가, 너 돌아가는 거지, 이래도 금방 도착이다, 아니다 차가 막혀서 그렇다, 여전히 돌면서 말이다.

톈진 시내 거리가 일방통행이 많고 그렇긴 해도 이리저리 빙빙 도는데 영 불쾌하다. 파퍄오(发票)를 챙겨 민박집 주인에게 '가깝다더니?' 했더니 차가 막혔나 보죠? 그런다. 지금 생각해봐도 난카이따쉬에(南开大学) 부근까지 37위엔이 나온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민박집에 짐 풀고 시내 구경이나 하려는데 쟈웨이(嘉伟)가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 수업이 있으니 지금 보자는 것이다. 난카이따쉬에 앞에서 1시간 후에 보기로 했다. 버스 타고 1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를 당장 오겠다는 것이다.

난카이따쉬에 앞에 도착하니 비는 그쳤는데 강풍이 분다. 먼지와 함께 부는 바람 때문에 눈 뜨기 힘들다. 카페에 들어가서 쟈웨이에게 '먼저 도착했고 강풍이라 카페 안에서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10분 기다리니 늠름하고 잘 생긴 쟈웨이가 들어온다. 반갑게 응석도 부리며 포옹을 한다. 영화배우 왕쟈웨이와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생긴 것도 참 잘 생겼고 좋은 녀석이다.

나이가 27살인데 네이멍구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베이징 얼와이따쉬에(二外大学) 4년제 영문과를 졸업했다. 스포츠 방송기자를 꿈꾸며 대학원 응시를 했는데 떨어져 낙담할 때 같이 술 마시며 상담해 준 덕분에 그는 여기 톈진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영문과 졸업해서 어느 정도 영어도 잘 하니 경영학, MBA를 한 후 유학하거나 외국계 기업에 취업하라고 조언했다. 집도 꽤 부유하니 가능한 코스이기도 하다.

▲ 쟈웨이가 준 펀져우
ⓒ 최종명

포옹을 마치더니 가방에서 술 한 병을 꺼낸다. 싼씨(山西)에서 만드는 10대 명주의 하나로 유명한 술이라고 한다. 알코올 도수가 53도나 되는 펀져우(汾酒)라는 술이다. 겉포장에 씽화춘(杏花村)이라 적혀 있어 은행이나 살구로 만든 과일주인 줄 알았는데 까오량(高粱), 따마이(大麦), 완더우(豌豆)가 첨가된 죽엽청주(竹叶青酒)로 유명하다.

펀져우는 1500여 년 전 남북조 시대 북제(北齐)의 궁정어주(宫廷御酒)로 등장한다. 당나라 말기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청명(清明)>에 '借问酒家何处有? 牧童遥指杏花村'(술 파는 곳 어디냐 물으니, 목동은 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라는 대목에 등장하며, 1915년 파나마(巴拿马) 운하 개통 기념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 번 세계에 이름을 떨쳐 중국 10대 명주의 반열에 올랐다.

미처 선물을 준비 못한 내가 민망했다. 커피와 음료를 마시고 시내 관광을 안내하겠다는 쟈웨이를 따라 나섰다. 저녁 수업시간 늦었으니 혼자 다녀도 된다고 해도 굳이 5시까지 30분 정도 같이 다녔다.

쟈웨이는 아쉬운 듯 내일 떠나지 말고 모레 가라고 계속 그런다. 수업이 10시에 끝나니 그때 다시 만나 술 한잔 하자고 한다. 그래서 10시에 차이징따쉬에 정문에서 만나기로 하고서야 보냈다.

옛날 건축 거리의 건물
ⓒ 최종명

진은 서구 열강이 조차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건물 양식이 남아 있는 거리를 찾았다. 허핑취(和平区) 거리를 이곳 저곳 걷노라니 100여 년 된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들이 섞여 있고 옛 건물도 유치원, 관공서, 회사 등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 시대의 느낌을 받기는 힘들어 보인다.

▲ 옛날 건축 거리마다 문물보호 대상 장소라는 표시
ⓒ 최종명


돌에 새겨 있는 문물보호장소를 보지 않으면 구분하기가 어렵다. 당시 시대의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일 터이지만 감흥이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만, 한적한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여유롭게 걷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눈에 띄는 것은 거리 곳곳에 서 있는 아이들 동상들이었다. 다채로운 표정으로 어울린 아이들의 모습이 거리를 빛나게 한다. 저녁 노을은 아이들의 눈빛을 더욱 밝게 비추고 있고 어스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고 있다.

▲ 옛날 건축 거리의 아이들 주제의 동상, 해맑은 얼굴
ⓒ 최종명

▲ 옛날 건축 거리의 아이들 주제의 동상
ⓒ 최종명

▲ 옛날 건축 거리의 아이들 주제의 벽화
ⓒ 최종명

천둥번개와 폭우, 강풍이 언제 있었냐는 듯 하늘은 화창하게 갰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핸드폰 배터리가 아웃이었다. 2004년에 핸드폰 중에서 가장 싼 거 골라 600위엔 주고 산 모토로라 핸드폰이 거의 돌아가실 때가 돼서 베이징에서 얼셔우(二手), 즉 중고제품을 하나 샀는데 배터리가 약간 문제가 있다. 카메라도 달렸고 칼라 화면에다가 아주 가벼운 것인데 248위엔이니 아주 만족스러웠는데 액땜을 한번 하려는지 완전 방전이다.

일단 민박집으로 돌아가서 충전을 해야 쟈웨이를 만날 수 있다. 더듬거리며 길을 찾는데 영 방향을 모르겠다. 지도를 하나 사서 10분을 훑어봤지만 마찬가지다. 결국 택시를 타고 난카이따쉬에로 가자고 하고 사실 길을 잃었으니 핸드폰 좀 빌리자고 했다. 집주인과 통화하고 겨우 찾았다. 급하게 나오느라 동네 분위기 파악을 못한 탓에 괜한 고생을 좀 했다.

저녁 먹고 인터넷 연결해 메일 체크하고 숙제(취재기와 동영상편집)하다가 쟈웨이를 만나러 갔다. 별 생각 없이 반바지, 반팔로 나섰더니 좀 쌀쌀하다. 택시는 거의 30분이나 걸려 티엔진차이징따쉬에에 도착했다. 문 앞에 기다리는데 경비인 빠오안(保安)이 '춥겠다. 여기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한다. 친절하네 자식. 그리고는 '친구에게 두꺼운 옷 가지고 나오라고 해'라고 하는 걸 보니 좀 불쌍해 보였나 보다. 밤 10시가 넘으니 춥긴 춥다.

수업을 마친 쟈웨이를 만나 가까운 양고기 구이 집으로 가서 맥주와 함께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했다. 대학원 공부한 지 벌써 1년 반이니 곧 졸업이니 진로 고민이 많다. 중국 학생들이랑 대화해보면 우리도 그렇지만 취업 등 진로 고민의 정도가 아주 깊다. 문제는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나 노력은 우리 학생들에 비해 조금 안이해 보이는 것 같다.

기회의 폭이 넓을수록 신분상승의 욕구가 높은 게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라고 보면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학생들과 이야길 하다 보면, 중국이 경제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하지만 사회적, 경제적 분배구조나 합리적이고 공평한 기회균등이 잘 보장되는 가 하는 면에서는 다소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쟈웨이에게 한국 학생들의 적극적인 구직활동 에피소드를 몇 가지 해주고 용기와 비전을 줬다. 곰곰 생각하더니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연신 고맙다고 한다. 그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고 남과 다른 방법으로 도전하고 성취하는 것이 아니던가. 쟈웨이가 건전하고 진취적인 사고로 잘 살며 한국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쟈웨이 여자친구는 잘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헤어졌다고 한다. 부모가 너무 반대해 고민상담까지 한 적이 있는데 결국 헤어졌다니 안타깝다. 네이멍구에 가면 꼭 씨린거르(锡林格勒)에 있는 대초원을 보라며 내일 점심 같이 먹자고 한다. 같은 반 통쉬에(同学)와 새로 사귄 여자친구랑 같이 보자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쟈웨이에게서 급하게 메시지가 왔다. 아주 아주 급한 일이 생겨 정말 정말 죄송하다고. 그래서 하루 종일 그동안 밀린 숙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