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싱(绍兴) 창챠오즈제(仓桥直街) 하천 몇 군데에는 돌로 만들어진 구름다리가 보인다. 보석다리, 광명다리 등 이름이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올라갔다가 내려간다고 해서 구름다리라 했겠지만 다리 아래를 지나가는 배들에게는 반달다리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하천에 비친 다리는 보름달처럼 둥글기도 하니 말이다. 다리 옆에는 '옌위(雁雨)'라는 이름의 찻집(茶艺馆)이 있는데 기러기와 비, 정말 낭만적인 조합이 아닌가. 2층 누각에서 차를 마셔도 좋고, 밤에는 악기소리 들으며 샤오싱 와인, 황주 한 잔 마시면 시름 걱정 다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하천 이름은 진후(鉴湖). 물이 디귿 자로 흐른다. 대쪽을 엮고 흑색을 칠한 덮개를 배에 장착한 독특한 형태의 배인 우펑선(乌篷船)이 떠다닌다. 물이 많은 샤오싱의 교..
루쉰은 필명인데 원래 이름은 저우장셔우(周樟寿)이고 나중에 다시 저우슈런(周树人)으로 개명했다. 5·4운동 이후 작품활동을 하면서부터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루쉰이 살던 집도 있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도 있다. 그의 스승 집도 있다. 담장 앞에 물이 담긴 조그만 종지 안에 붓 하나가 꽂혀 있다. 옆에는 반질반질한 돌로 된 바위가 있는데 바로 여기에 물을 묻혀 붓으로 글씨 쓰는 연습을 하는 곳. 붓을 들어 이름을 한자로 써봤는데 부드럽게 잘 써진다. 비가 내려서인지 표시가 남지는 않았다. 서옥 안에도 종지와 붓이 놓여 있다. 넓고 평평한 마당벽돌(地坪砖)이 자리잡고 있다. 수경오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 장치를 이용해 글 쓰는 서법을 익히도록 훈련시켰다고 한다. 에서 '문을 나서 동쪽으로 반리(半..
중국 샤오싱에 있는 루쉰고거 뒷편에는 '붓으로 그린 풍경'이란 뜻의 비샤펑징위엔(笔下风情园)이 있고 이 지방 결혼 풍속을 보여주는 작은 공간이 있다. 중국에서 옛부터 내려오던 3대 술 중 하나인 황주에는 '딸의 혼인'과 관련된 재미난 유래가 있다. 옆에 붙은 건물로 들어서니 항아리에 뉘얼저우(女儿酒)이라 적혀있다. 뉘얼=딸 바로 항아리에 꽃이나 예쁜 그림을 새긴다고 해 화댜오저우(花雕酒)라고도 부르는 샤오싱의 유명한 황주(黄酒)를 말한다. 항아리마다 꽃을 새겨 조각했는데 이것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동영상을 보고 글을 읽어보자! 옛날 샤오싱에 한 재봉사(裁缝师)가 있었는데 아내가 임신을 하자 아들을 낳으면 축하하려고 항아리에 술을 담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딸이 태어나자 실망해 화가 난 재봉사는 계수..
루쉰은 필명인데 원래 이름은 저우장셔우(周樟寿)이고 나중에 다시 저우슈런(周树人)으로 개명했다. 5·4운동 이후 작품활동을 하면서부터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루쉰이 살던 집도 있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도 있다. 그의 스승 집도 있다. 먼저, 조거(祖居)를 찾았다. 약 5백여 미터에 이르는 보행거리 초입이다. 저우자(周家) 라오타이먼(老台门)이라 부른다. 한림원 서길사(庶吉士)를 지낸 그의 할아버지인 주복청(周福清)이 살던 집, '한림(翰林)'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이 대문을 지나면 대청(正厅)인 더셔우탕(德寿堂)이 나온다. 손님들을 접객하는 곳으로 나란히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원래는 닝셔우탕(宁寿堂)이었는데 청나라 도광제(道光帝)의 연호 민닝(旻宁)를 꺼려해 개명했다고 한다. 황제 연..
루쉰(鲁迅)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루쉰이 살았던 곳은 이곳 샤오싱 외에도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살았던 베이징과 1927년에 머물던 광저우 그리고 1936년 숨을 거둘 때까지 살았던 상하이에도 그의 고거가 있다. 입구에 들어서니 4미터 정도 너비로 미로 같은 길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당시 사용하던 우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마치 가운데 구멍이 뚫린 주사위 모양 같다. 집과 집 사이는 8각형의 문으로 조성된 것이 독특하다. 한쪽 건물에 중국 유명 판화가이며 후이족(回族)인 자오옌니엔(赵延年)의 삽화도(插图) 전시실이 보인다. 을 비롯해 작품 내용을 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루쉰의 저서의 표지들을 장식하고 있는데 한눈에 작품의 성격을 대변할 정도로 인상적인 판화들이라 하지 않을..
닝보 사람인 그는 청나라 함풍제(咸丰帝) 시대 영국 외교관들에게 마작을 알려주고 함께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마작은 그 놀이할 때 쓰는 말이나 방법이 새를 잡는(捕雀)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성패(成牌)가 되는 상태를 ‘후(糊)’라고 하는데 이것은 새를 잡아 기른 매를 이르는 ‘후(鹘)’와 발음이 같은 씨에인(谐音)이다. 부딪친다는 ‘펑(碰)’, 먹는다는 ‘츠(吃)’도 다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정립한 사람이 바로 진정약이다. 그가 어느 날 골패로 놀이를 하고 하던 중 생겨난 패의 모습을 마작(麻雀)이라 썼는데 이 글자의 닝보 방언으로 ‘마장(麻将)’이라 한 데서 중국에서는 지금도 굳어진 것이라 한다. 일본에서는 건너간 ‘마작(麻雀)’은 다시 우리나라로 옮겨오면서 이 발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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