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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천미터 베이징 링산,  안나푸르나를 정복하다
초 강풍 한파 속 베이징 최고봉 링산을 오르다

 

베이징은 평양보다 위도가 높다. 북방의 한파가 살을 파고드는 날. 한라산보다 해발이 더 높은 산이 베이징에 있다. 지난 1 29일 한겨울 영하 10도의 날씨에 해발 2,000미터 고지를 등산하는 산악회가 있다고 해서 함께 의욕을 부렸다. 링산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공연한 욕심이 아닐까 염려가 된다.

 

베이징 서쪽 먼터우거우(门头沟) 구에 위치한 링산(灵山)이 목적지이다. 베이징최고봉(北京的第一峰) 링산은 베이링()과 함께 둥링(东灵), 시링(西) 3개 거대한 봉우리로 이뤄져 있다. 다행인 것은 해발 1,600미터까지 도로가 있다. 차에서 내려 산으로 접어들자 엄청난 강풍이 분다. 7~8급 초 강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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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말로 능선과 능선 사이 산 입구를 야커우(垭口)라고 한다. 야커우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산길로 올라섰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장갑을 두 개나 꼈는데도 손이 얼얼하다. 사진이나 제대로 찍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과연 이 한파를 뚫고 단 100미터라도 올라갈 수 있을지 불안하다. 바람에 날려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것은 아닐지 괜한 공포도 엄습한다. 여성 회원들이 바람 앞에서 갈피를 잡느라 시작부터 정신 없다. 산악회 회원 17명이 산행에 참가했는데 안타깝게도 바람이 너무 불어 3명이 중간에서 산행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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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을 따라 바람을 헤치고 숨 가쁘지만 숨도 쉬지 않고 뛰어오른 듯하다. 멀리 주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보다 더 참기 힘든 추위라 할만하다. 신발로 조금씩 들어간 눈이 녹아 발이 얼얼하게 얼어간다. 발을 쿵쾅 구르며 높이뛰기를 해야 조금 견딜 만하다. 그러니 보통 산보다 곱절은 더 힘이 드는 셈이다.

 

땀이 나는 만큼 추위는 조금씩 익숙해진다. 앞만 보고 한참 올라 가다 잠시 뒤돌아보니 올라온 길이 마치 히말라야 등산로처럼 멀어 보인다. 눈과 볼만 남겨두고 온 몸을 다 감았는데 결국 양 볼은 새빨갛게 타 들어간다. 얼면서 얼굴이 타는 느낌이다. 봉우리를 하나 넘으니 또 높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얕아 보이지만 가까이 갈수록 가파르다. 그나마 맑은 햇살과 파란 하늘 덕분에 점점 추위도 잊는다. 호흡 곤란 때문인지 땀방울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해발 1,600미터에서 시작한 산행. 이제 1,700미터를 지난 듯하다. 완만한 능선 길이다. 추위와 바람과 싸우다 보니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능선 하나를 넘으면 또 새로운 능선이 나타난다. 가끔 멈춰 서서 뒤돌아보면 뒤따라 오는 회원들의 모습이 멋진 산과 잘 어울린다.

 

벌써 4번째 능선을 넘었나 보다. 이미 1시간 30분 가량 산행을 했다. 추위 때문에 중간에 멈춰서 쉬는 것보다는 천천히 느릿느릿 걷는 게 낫다. 이 나지막한 산길을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지그재그로 생긴 길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 지 현장이 아니면 모른다. 능선을 하나 넘을 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색다른 풍광이 아니었다면 아마 죽어라 힘만 빼는 산행이었을 것이다. 비탈길 평원에 살포시 쌓인 눈밭, 파란 하늘과 눈을 닮은 구름이 참 멋지다. 강물에 구름이 투명하게 비친 듯 눈밭 위로 풀들이 바람 따라 누웠다. 강렬한 햇살이다. 풀들이 검은 줄을 그은 듯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이 하얀 거품처럼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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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진하게 뻗은 그림자도 생긴다. 눈밭 위라 더욱 흑백 대비가 선명하다. 숲에는 햇살에 반사된 자작나무 줄기가 꽤나 밝다. 해발 1,800미터 지점에 이르니 회오리 바람이 분다. 눈들이 휘감겨 오르며 햇살을 가로막기도 한다. 히말라야 등반 다큐멘터리가 연상된다. 점점 자기도 모르게 착각에 빠진다. 마치 안나푸르나 등반대인 양.

 

눈길은 깊게 빠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눈이 얼었다면 준비해온 아이젠을 꺼내야 한다. 장갑을 벗어야 한다면 손에게 너무 미안할 뻔했다. 장갑 2개 끼고도 카메라 셔터 누를 때마다 손끝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산길에 쌓인 눈을 밟으며 걷는다. 뽀드득 소리가 나는 게 들린다. 이제 어느 정도 추위와 바람에 익숙해졌나 보다. 몸도 마음도 이제 완전히 링산에 적응한 느낌이다.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이제는 돌아가는 것이 더 무섭고 두려워진다.

 

어느새 링산의 봉우리들을 대부분 넘었다. 다시 또 올라가야 할 능선이 하나 더 남았다. 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비행기 꽁무니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시샘하나 보다. 브이(V) 자로 펼쳐진 능선 사이로 솟아올라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구도도 안성맞춤이다.  

 

마지막 능선을 넘어섰다. 뒤돌아 보니 장관이 다름 없다. 뒤 따라오던 회원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멈췄다. 모두 겨울 산의 자태를 감상한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봤음직한 ‘안나푸르나 같다’고 한마디씩 거든다. 산 너머로 또 설산이 연이어 이어진 모습이 그렇다. 어디 명산이나 그러 하겠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같은 색깔조차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웅장하게 서 있는 산은 늘 사람을 흥분시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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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봉우리를 중국사람들은 우밍산(无名山), 즉 이름 없는 산으로 부른다. 링산 주봉 옆 베이링산을 이루고 있는 이 산봉우리는 곁가지 봉우리라 이름이 따로 없다. ‘안타푸르나’를 떠올렸다. 베이징의 ‘황산’이라고도 하고 ‘알프스(阿尔卑斯)’라고도 한다. 오악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아름답거나 유럽의 낭만이라 비유해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한겨울만큼은 지독한 ‘안나푸르나’와 같다. 이름이 따로 없다니 적어도 체감 온도 영하 30, 눈발이 휘날리는 강풍이라면 그렇게 불러도 좋을 듯하다.

 

베이징 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이렇게 멋진 겨울 산이 있을 줄 몰랐다. 산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눈이 쌓여서 썰매 타듯 내려가기도 하고 다시 언덕을 오르느라 숨을 헐떡이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바람 속도가 훨씬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날씨도 다소 따뜻해졌다.

 

12시가 넘었다. 햇살을 머금은 자작나무가 산행을 열어주고 있다. 눈 쌓인 벼랑길도 조심스럽게 걸었다. 산길을 내려오다 눈과 산, 하늘이 3분할로 나뉜 모습에 발길을 잠시 멈춘다. 오른쪽으로 산 능선을 따라 원을 그리듯 돌았다. 멀리 주봉인 링산의 멋진 모습도 보인다.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거친 산행이어서일까 자꾸 ‘안나푸르나’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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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길 위에 둥근 원이 그려진 모습을 문득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마치 제도용 컴퍼스로 그린 듯하다. 누군가 ‘나무줄기가 바람이 불어서 만든 둥근 원’이라고 한다. 정말 그렇다. 바람 따라 나무줄기가 한 바퀴 빙 돈 것이다. 강풍이 만들어낸 조화다. 한번에 돌았는지 여러 차례, 몇 날 며칠이 걸렸는지는 모른다. 귀퉁이에 오롯이 이렇게 조그맣게 만들어진 자연현상이 귀엽기조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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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1시다. 창청(长城)이 있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서둘러 추월해 앞서 갔다. 이 험준한 산에 만리장성이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만리장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돌로 쌓은 성벽과 망루가 있고 옆에는 벽돌로 쌓은 성벽도 있다. 명나라 시대 쌓은 것이다. 보수한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정말 명나라 창청이 완벽하게 남아있다.

 

바람을 피하고 햇살 드는 성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먹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쓰레기 한 톨 남기지 않았다. 영하의 날씨에 만리장성에서 라면과 김치로 먹는 밥은 정말 꿀맛이다. 성벽 무너진 틈 사이로 아주 멀리 링산 주봉이 하얗게 엷은 눈을 덮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성벽과 설산의 조화도 보기 힘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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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동남쪽 방향의 해발 1,737미터 황차오량(黄草梁)을 거쳐 하산하게 된다. 풀빛이 누런 산등성이라 해 황차오량이라 부르는 곳을 향해 간다. 비교적 평지이다. 밋밋한 산등성이의 모습이고 겨울인데도 밝은 빛깔의 누런 느낌이다. 이런 산등성이가 몇 군데 연이어 있는 곳이 황차오량이다. 이 멋진 등산로를 알았으니 가을 무렵 반드시 다시 찾고 싶다.

 

하늘빛과 풀빛이 아주 대조적이다. 가을 무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황차오량 등산로에서 쉬고 간다. 자작나무와 하늘 그리고 살짝 나온 흰 구름이 예쁘다. 구름 이동속도가 너무 빨라 몇 장 찍고 나니 나무 오른쪽으로 휙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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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차오량에서 측백나무 산골짜기 바이위()까지는 하산 길이다. 중간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계곡 길을 택했다. 계곡을 따라 거대한 암석들이 서로 엉켜 있다. 건너 쪽 암석이 만든 그림자 때문에 더욱 밝게 빛난다.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가로막고 있기도 하다. 계곡 절벽에서 자라난 나무가 높이 솟구쳐 있다. 하늘을 배경으로 나뭇가지들의 모습이 잘 어울린다.

 

계곡 길을 빙 돌아가니 코끼리 코처럼 생긴 바위가 나타난다. 틈새로 등산로가 만들어져 있다. 코끼리 코 앞에 서니 계곡을 벗어나는 경계이다. 이 절묘한 공간은 신이 만든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신이 망치로 마술처럼 깨놓지 않고서야 이렇게 기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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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해발고도가 낮아지고 있다. 등산로도 차분하게 정돈돼 있어 비교적 안전하다. 여유도 생기고 속도도 느슨해졌다. 뒷동산 약수터를 다니러 가는 느낌이다. 완만하면서도 순조로운 길이니 드디어 하산이다.

 

강렬하던 햇살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해가 저물고 있는 시간이다. 오후 4시가 넘었다. 여전히 해발 1,000미터가 넘는다. 계단 길을 지그재그로 내려간다. 저무는 햇살을 등지고 서 있는 나무 사이로 차 길도 보인다. 산 아래에 도착하니 4 30분이다. '불은 삼림의 큰 적이니 불씨를 삼림과 멀리 하라'는 문구가 써 있다.

 

해발 2,000미터의 호흡은 거칠었고 바람은 절벽으로 질주했고 살면서 가장 춥게 느낀 날씨였기에 안나푸르나를 빌어 산행의 기분을 만끽한 날이었다. 이 멋진 '알프스'이자 황산'안나푸르나'를 오로지 겨울 산행 최고의 기억이라 말하고 싶다. 최악의 등산이었지만 최고의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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